축복이 약속된 말씀,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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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0,357회 작성일 19-01-27 12:41본문
축복이 약속된 말씀, ‘예배’
말3:13~18
2019. 1/27. 11:00
누구를 위한 예배인가?
헨리 워드 비쳐(Henry W. Beecher)목사가 있다. 그는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설교를 한다는 평가를 받았던 유명한 설교가다. 한번은 뉴욕의 큰 교회가 그를 초청하였다. 이 교회는 대대적인 홍보까지 하고 그를 기다렸는데, 주일 직전에 갑작스러운 질병으로 그가 올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동생 토마스 비쳐(Thomas Beecher)목사가 대신 왔다. 주일이 되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많은 사람이 각지에서 몰려와 예배당을 가득 채웠다. 예배가 시작되고, 그 교회 담임 목사가 헨리 비쳐 목사의 사정을 설명하며 대신 토마스 비쳐 목사를 소개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더니 한 사람씩 자리에서 일어나 예배당을 나갔다. 이 광경을 본 토마스 비쳐 목사가 이렇게 말을 꺼냈다.
‘저의 형님이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오늘 이 예배에서 설교를 못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저는 먼저 특별한 광고를 드리고 말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지금 예배 중간에 일어나 나간 분들 말고 혹시 헨리 비쳐를 예배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있다면 지금 이 시간에 나가시면(excuse) 감사하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헨리 비쳐를 예배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기 때문입니다.’
이 한 마디에 웅성이던 장내는 조용해졌고, 그 날 예배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하심이 있는 은혜로운 예배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150여 년 전 미국의 한 교회에서 일어났던 이 일이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예배현장에서는 일상이 되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주일에 예배당을 찾는 것이 아니라 어느 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해 예배당을 찾는 사람이 참 많다. 어느 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해 강원도에서, 광주에서, 심지어는 여기 순천에서도 찾아가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기에게 감동이 되는 설교를 듣는 것이 목적이다. 예배의 목적이 하나님을 경외하는데 있지 않고 자기만족에 있다. 이런 사람들이 오늘날 괴물 목회자를 만들어냈고, 거룩한 주님의 몸인 교회를 주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값싼 은혜를 파는 쇼핑몰과 같은 곳으로 만들어버렸다. 예배의 실패가 곧 삶의 실패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예배의 자리에 나올 때마다 예배는 무엇이고, 예배의 주인공이 누구며, 나는 주님이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인가를 늘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란다. 최소한 이것만 기억해도 우리는 예배의 실패를 막을 수 있다. 이 시간에는 올바른 예배생활에 주어진 복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한다.
예배가 무너지면 삶도 무너진다.
말라기서는 특별한 책이다. 신/구약성경의 다리역할을 하는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이라는 것도 그렇고, 본서는 모두 55절로 되어 있는데, 47절이 하나님의 말씀(예언)이라는 점이 그렇다. 그러니까 성경 중에서 예언(하나님의 말씀)의 비중이 가장 큰 책이 말라기서다. 내용 또한 특별하다. 목회자들이 십일조 설교를 할 때 본서를 주로 본문으로 선택하다보니 ‘말라기=십일조’라는 등식이 암암리에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십일조는 본서에 나온 일부분이고, 구약성경에서 드물게 ‘무너진 예배회복’(온전한 예배)이 본서의 주요내용 중 하나다.
하나님은 말라기 시대(주전515년~450년, 제2성전 완공에서 느헤미야의 총독부임 전까지)의 예배자로부터 큰 모멸감을 느끼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탄식하셨다. “너희가 내 제단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1:10). 성전 문을 닫아버렸으면 좋을 만큼 하나님께서 그들의 예배에 마음이 상하셨다. 심지어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할 것이라.”(2:3)고 하셨다. 하나님께 왜 이렇게 과격한 말씀을 하신 것일까? 그 이유는 ‘부정한 제물’(눈 먼 것, 훔친 것, 저는 것, 병든 것) 때문이다(1:13). 그런데 이것은 전적으로 제사장 책임이었다. 백성이 이렇게 부정한 제물을 드리면 제사장이 잘못을 지적하고 제물로 받지 말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는 생계의 위협을 느낀 제사장들이 생계를 위해 방조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들의 양식을 얻기 위해 ‘흠 있는 제물을 드려도 무방하다.’고 가르쳤고, 백성은 여기서 한 술 더 떠 아예 흠 없는 좋은 짐승은 숨겨두고, 흠 있고 건강하지 않는 것만 골라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멸감을 느끼실 만큼 예배가 무너진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예배의 실패는 곧 삶의 실패로 이어졌다.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고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는 등 이웃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않고(3:5), 이혼이 엄청나게 증가하고(2:14~16), 양심없는 고리대업으로 형제를 노예로 만들고(2:10), 이방인과 결혼을 하여 선민의 정체성을 상실하였다(2:11).
신실한 예배자에게 약속된 복
무슨 일에든 태도가 중요하다. 예배도 마찬가지다.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다. 예물보다 중요한 것이 이와 같은 예배자의 태도다. 예배자의 태도가 잘못되면 무수한 예물도 소용이 없다. 말라기 시대에 예배가 멈춘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예배는 드려지고 있었지만 예배자의 태도가 잘못되어 온전한 예배가 드려지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을 회복시키고자 한 사람이 말라기 선지자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백성에게 예배자로서의 태도가 잘못된 것을 책망하신다(13a). 그러면 잘못을 인정하며 회개해야 하는데, 오히려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냐며 따졌다(13b).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셨다(14,15).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올바른/신실한/참된 예배자)에게 임할 복을 약속하셨다.
첫째는, 분명히 들으시고 기념책에 기록하시는 복이다(16). 예배를 들으시고 기억하시는 복이다. 앞에서 올바른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은 그들이 예배를 드릴 수 없도록 성전 문을 닫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1:10). 그런데 여기서는 분명히 들으시고 기념책에 기록하시겠다고 하셨다. ‘기념책’이란 기억의 책으로, ‘기념책에 기록한다.’는 것은 잊지 않고 기억하시겠다는 뜻이다. 내가 드리는 기도, 내가 드리는 찬양, 내가 드리는 예물, 내가 드리는 섬김, 내가 드리는 헌신을 주님께서 분명히 들으시고 잊지 않고 기억하신다는 것이다. 사실 이보다 크고 중요한 복은 없다. 주님께서 들으시고 잊지 않고 기억하신다면 응답은 시간문제다. 예배는 만남이다. 주님과의 만남이다. 올바른 예배자는 예배를 통하여 주님을 만나게 된다. 주님을 만나면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잊지 않도록 기록하여 기억하신다. 이것이 올바른 예배자에게 임할 복이다.
둘째는, 특별한 소유로 삼으시는 복이다(17a). ‘특별한 소유’를 히브리어로 ‘세귤라’(סגלה)라고 한다. 아주 값지고 귀한 ‘보배’란 뜻인데, 왕의 소유물에만 붙여진다.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서 올바른 예배자를 특별한 보배가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will/shall be). 물론 우리는 주님을 믿을 때 이미 주님의 특별한 소유(보배)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간주해 주신 것이지 실제로 보배는 아니다. 신앙생활이란 진짜 보배가 되어가는 과정이고, 올바른 예배가 그 중심에 있다. 그래서 예배가 중요하고, 이것이 올바른 예배자에게 임하는 또 하나의 복이다. 그리고 셋째는, 부모가 자신을 섬기는 자식을 아낀 것처럼 아낌을 받는 복이다(17b). 부모에게 소중하지 않은 자식은 없다. 하지만 자식 중에서도 부모를 잘 섬기는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더 받게 된다. 이와 같이 믿는 사람 모두가 주님의 특별한 소유지만 올바른 예배자를 주님께서 더욱 소중히 여기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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