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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소서 ‘소망’의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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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071회 작성일 18-12-02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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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소서 소망의 주님

9:1~7

2018. 12/2. 11:00(대강절 첫 주일)

절망과 소망의 차이

콧수염에 나비넥타이를 맨 할아버지 그림을 보았을 것이다. KFC 창업자 커넬 샌더스의 모습이다. 그가 세계 80여 나라에 진출한 KFC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한 때가 65세였고, 75세엔 경영권을 200만 달러에 넘기고 관련된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창업직전, 64세의 커넬 샌더스는 만신창이었다. 사업은 계속 실패했고, 아들이 죽고, 아내마저 그의 곁을 떠나자 그 충격으로 정신병에 걸렸다. 삶이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고 보니 더 이상 사는 것이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자살을 시도하려고 하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찬송소리가 들렸다. ‘너 근심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그는 무엇인가에 끌리듯 찬송소리를 따라갔는데, 찬송소리의 주인공은 휠체어를 타고 휴지를 줍는 사람이었다. 성치도 않는 몸으로 휴지를 주워 연명하면서도 찬송을 부르고 있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물었다. ‘무엇이 기뻐서 찬송을 부르오.그 사람이 말했다. ‘예수 믿고 너무 좋아서 그렇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밝습니까!자신은 세상이 온통 흑암이어서 죽으려고 하는데, 그 사람은 세상이 너무 밝아 좋다는 것이다. 그렇게 불우한 상황에도 기뻐하는 그 사람의 모습에 도전을 받아 그도 예수님을 영접하고 인생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그에게 있어서 절망이 소망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만의 양념비법과 요리법을 사줄 투자자를 찾아 나섰다. 물론 쉽지 않았다. 허름한 노인에게 로열티를 지불하고 요리법을 사줄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1,008의 거절을 당한 끝에 1,009번째에 투자자를 찾게 되어 마침내 KFC 1호점을 내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절망과 소망의 차이를 이렇게 말했다. ‘절망은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고, 소망은 더 이상 절망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소망이 있는 한 절망은 없고, 소망이 사라지면 자연히 절망이 찾아온다.

 

빛으로 오신 주님

흔히 성탄절을 빛의 축제라고 부른다. 곳곳에 성탄장식으로 어두운 밤을 대낮처럼 환하게 밝힌 이유가 이 때문이다. 어두운 우리의 심령과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주님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본문은 맹인으로 태어나 평생을 맹인거지로 살고 있는 한 사람을 주님께서 실로암 연못으로 보내어 눈을 뜨게 하신 사건이다. 주님은 이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5). 주님께서 평생 맹인으로 살아온 이 사람처럼 온갖 어두운 세력(권력, 제도, 사상, 종교, 습관, 가치관 등)에 붙잡힌 사람들과 세상을 향하여 친히 자신이 이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물론 주님의 이와 같은 선언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미 1장을 시작하면서 본서 저자는 주님을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다고 소개했고(1:4~10), 주님이 이 땅에 오시기 700여 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도 같은 말을 하였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9:2). 주님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으로 오실 것을 예언한 것이다. 그러니 성탄절이 빛의 축일인 것은 당연하다.

 

주님은 소망의 빛이시다.

성경에서 은 여러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이 되고 있다. 그러니 주님께서 세상의 빛이시다. 빛으로 오셨다는 의미도 다양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대강절(성탄절 전 4주간)이면 강단에 다섯 개의 촛불을 켜는데, 이것은 빛으로 오신 주님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 촛불마다 의미가 다르다. 첫째는 소망, 둘째는 평화, 셋째는 기쁨, 넷째는 사랑, 다섯째는 감사와 환희의 의미다. 그래서 이 순서에 따라 이 시간에는 소망의 빛으로 오신 주님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우리 기독교를 크게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두 진영으로 구분한다. /서 교회 간에 여러 차이가 있는데, 그 중에 성탄축일을 지키는 날짜가 다르다. 서방교회는 지금 우리처럼 주님이 세상의 빛으로 이 땅에 탄생하신 1225을 성탄축일로 지키고, 동방교회는 빛으로 오신 주님이 사역을 위해 자신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신(주현절) 16을 성탄축일로 지킨다. 여기서 누가 옳으냐는 의미없는 논쟁이다. 서로 관점이 다를 뿐이다. 내가 여기서 주목한 것이 있다. 서방교회는 한 해의 끝자락에 성탄축일을 지키고, 동방교회는 한 해를 시작하면서 성탄축일을 지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둘을 합하면 한 해의 시작도 주님이시고, 끝도 주님이신 것이다. 즉 소망이신 주님과 함께 한 해를 시작하고, 그 주님과 함께 한 해를 마감하는 것이다. 이렇게 동/서 교회는 성탄축일을 통해 주님과 함께서 할 때 시작도 끝도 소망이 있다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의 예언처럼 주님의 탄생은 말 그대로 개인의 소망, 민족의 소망, 시대의 소망, 세상의 소망이시기 때문이다.

 

절망을 소망으로

본문은 이와 같은 주님의 삶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한 맹인거지가 있었다. 맹인으로 태어난 것도 억울한데, 사람들은 그가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2절 참조). 물론 그 죄가 본인 때문인지 부모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맹인으로 태어난 것은 그가 죄인이라는 증거라는 것이다. 이렇게 당시 사회와 사람들이 그에게 이런 낙인을 찍어놓았다. 여기서 낙인을 스티그마’(στιγμα)라고 하는데, 이는 노예나 범법자에게 붙여주어서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차별화하기 위한 표지다. 그는 이렇게 억울한 낙인까지 찍힌 채 어둠 속에서 절망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주님이 그의 삶을 180도로 돌려놓으셨다.

 

그가 맹인으로 태어난 것에 대하여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3). 지금 그에게 찍힌 낙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이 말씀은 현재를 과거의 찌꺼기로 보려는 자세로부터 미래를 향한 출발점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고칠 수도 바꿀 수도 없는 과거에 매달려 자포자기하고, 절망하는 삶으로부터 훤하게 트인 미래를 향하도록 삶의 방향을 돌려놓은 것이다. 사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 누리게 되는 복이고, 또한 우리가 믿는 복음의 능력이다. 사람들과 그들의 종교는 그를 그의 과거에 묶어 두려했고, 행여 그 굴레에서 벗어날까봐 그에게 낙인까지 찍어놓았다. 하지만 주님은 이 사람 또한 사명을 받아 태어났다고 선언하셨다. 그에게서 낙인을 제거해버리신 것이다. 그리고 보냄을 받았다는 뜻을 가진 실로암으로 가서 씻으라고 그를 보내셨다. 절망의 자리를 털고 일어나 소망을 향해 걸어가라는 명령이다. 그래서 그가 어둠에서 빛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걸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본문 이후의 이야기를 보면 어둠의 세력이 참으로 집요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소망이신 주님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붙잡지 않으면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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