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름의 상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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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6,371회 작성일 18-12-30 14:04본문
부름의 상을 위하여
빌3:12~14
2018. 12/30. 11:00(송년주일)
삶에 대한 정의
삶을 한 문장, 혹은 한 단어로 정의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 정의하겠는가? 마더 테레사는 ‘삶은 기회다.’고 했다. 삶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기회라는 것이다. 주어진 기회를 어떻게 선용하느냐에 따라 삶의 질과 평가가 달라진다. 생리학자 클로드 베르나르는 ‘삶은 창조다.’고 했다. 삶이란 누군가를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길을 발견하여 새로 가꾸고 넓혀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나만의 빛깔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각자에게 주어진 삶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산(茶山) 정약용의 〈독소(獨笑)〉(나 홀로 웃는 이유)라는 시가 있다. 여기서 다산이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양식 넉넉한 집은 자식이 귀하고
자식 많은 집에서는 굶주림이 있으며
높은 벼슬아치는 꼭 멍청하고
재주 있는 사람은 재주 펼 길 없다.
복을 다 갖춘 집 드물고
지극한 도는 늘 펴지지 못하며
아버지가 아끼면 자식은 방탕하고
아내가 지혜로운가 싶으면 남편이 꼭 바보다.
달이 차도 구름이 가리기 일쑤고
꽃이 활짝 피면 바람이 불어댄다.
세상일이란 모두 이런 거야!
나 홀로 웃는 그 뜻을 아는 이 없다.
자신의 처지를 빗댄 다소 자조적인 것 같은데, 이 시에서 다산은 삶을 ‘아이러니’라고 생각한 것 같다. 쉽게 말하면 사람은 누구나 결핍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를 알고 채워가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고, 서로 채워주며 사는 것이 성숙한 삶이라 생각한다. 아무튼 우리는 삶을 자신만의 경험과 생각으로 표현할 자유가 있다. 어떤 사람은 삶을 슬픔으로, 어떤 사람은 기쁨으로, 어떤 사람은 배신과 고통으로, 아픔과 눈물로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정의는 곧 그 사람의 존재를 결정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앞에서 소개한 마더 테레사는 삶이라는 주어진 기회를 잘 선용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어머니’가 되었고, 클로드 베르나르는 누군가를 따라하지 않고 스스로 길을 찾아서 가꾸고 넓혀나가 ‘근대 실험의학의 시조’가 되었다. 다산 역시 재주는 있으나 그 재주를 펼 수 있는 길이 막혀버린 유배지에서도 낙담하여 주저앉지 않고 부단한 글쓰기로 자신의 부족을 채워나가 수많은 책을 남겨서 후대에 귀감이 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삶의 의미를 분식집에서 찾았다면서 ‘삶은 계란!’(삶=계란)이라고 했다. 농담이겠지만 계란을 어떻게 삶느냐에 따라 반숙이 되기도 하고, 완숙이 되기도 한다. 불이 너무 세면 터지기도 한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과정으로서의 삶
본문은 사도 바울의 삶에 대한 정의라 할 수 있다. 바울은 삶을 ‘과정’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본문에서 바울은 ‘달려간다.’는 표현을 두 번(12,14)이나 반복되고 있다. 게다가 바울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12)고 했고,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13), ‘푯대를 향하여.....달려가노라.’(14)고 현재 자신의 모습을 고백하고 있다. 이 고백을 통해 자신의 삶이 과정으로서의 삶인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바울의 삶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성도의 삶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천국이라는 ‘온전히 이룸’, 혹은 ‘푯대’를 향하여 달리고 달려 가야는 하는 것이 성도의 삶이다. 이런 의미에서 연말(年末)이니 연초(年初)니 하는 인위적인 매듭은 우리에게 큰 의미가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달려온 삶을 점검하고, 앞으로 달려갈 삶에 대한 결단의 기회로 삼는다면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송년주일이 저와 여러분에게 이와 같은 점검과 결단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본문에서 바울은 ‘달리기’라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과정으로서의 삶’을 설명하고 있다. 바울 자신이 천국이라는 결승점을 향해 달리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성공적인 달리기를 위해선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히브리서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온다.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12:1). 이는 상식이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잘 달릴 수는 없는 일이다. 특히 달리기 선수를 보면 종목에 상관없이 입는 옷까지도 지극히 가벼운 차림을 하고 있다. 잘 달리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한 잊어버려야 할 뒤에 있는 것이란 무엇일까? 신앙의 경주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무엇일까? 그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라고 했다. 이를 보다 일상적으로 표현하면 긍정적인 것으로는 승리(성공)에 대한 경험이고, 부정적으로는 실패(수)에 대한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신앙경주에 심각한 장애물이다. 성경은 ‘섰다고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고 경고한다. 한 마디로 성공에 안주하지 말라는 뜻이다. 본문에서 바울이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고백한 것도 같은 의미다. 여전히 목마르다는 뜻이다. 승리에 대한 기억은 잊고 항상 자기 한계를 기억하면서 거룩한 목마름을 가지고 달려가야 한다. 잘 나가던 개인이나 집단이 한순간에 무너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실패나 실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실수나 실패를 인생의 무덤으로 생각해서도 안된다. 그것으로 인생이 끝장난 것처럼 생각해서도 안된다. 털고 일어나 잊어버리고 다시 출발해야지 거기에 매몰되어서는 안된다. 승리에 도취되어 거기에 안주하는 것도, 실패나 실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좌절하는 것도 신앙경주자가 버려야 할 것들이다.
기도만 하면 늘 주님이 찾아오신다는 여인이 있었다. 교회 안에 그 소문이 크게 났다. 그래서 목사님이 확인하려고 불렀다. 정말 기도만 하면 주님이 찾아오시냐고 묻자 그렇다고 했다. 그러면 주님께 자신이 중학교 2학년 때 무슨 죄를 지었는지 물어달라고 했다. 며칠이 지나 목사님이 그 여인을 다시 불렀다. 그리고 물었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무슨 죄를 지었대요?’ 여인이 대답했다. ‘다 잊으셨기 때문에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이런 질문을 한 목사가 바보다. 스스로 성경에 대한 무식을 폭로한 셈이다. 주님은 우리의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해주셨고, 한 번 용서하신 죄는 다시 기억하지 않으신다. 우리에게 용서의 확신이 없어 그것들을 들춰내서 거기에 스스로 얽매이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사단은 그것을 이용하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게 만드는 것이다. 우린 이 때 단호하게 선포해야 한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내 죄는 다 용서되었고 주님은 기억조차 하지 않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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