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본받아, ‘참아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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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0,589회 작성일 18-11-04 14:50본문
주님을 본받아, ‘참아주심’
눅13:6~9
2018. 11/4. 11:00
10분을 참지 못해서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던 어느 날, 아브라함은 집 앞 상수리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다가 몹시 지친 한 나그네를 보았다. 나그네 대접에 극진한 아브라함은 그에게 다가가 자기 집에서 잠시 쉬어가라고 권했다. ‘집에 가서 씻고, 먹을 것을 드릴 테니 쉬어가십시오.’ 아브라함은 음식을 차려놓고 손님에게 함께 하나님께 감사기도 드릴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 나그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도를 하지 않았다. ‘나는 페르시아 사람이오.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소!’ 하고 기도를 거절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신앙을 가지도록 권할 요량으로 계속 기도를 요청했고, 그때마다 거절을 당했다. 화가 난 아브라함은 그 나그네를 내쫓아버리고 말았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아브라함아! 지금 너 무엇을 하고 있느냐?’ 그러자 아브라함이 대답했다. ‘글쎄 저 놈이 하나님께 감사할 줄을 모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쫓아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아! 나는 그를 위해 50년을 참았다. 그리고 이제 때가 되어 네게로 보냈는데, 네가 그만 10분을 참지 못해 일을 망처구나!’
‘忍一時之忿(인일시지분)이면 免百日之憂(면백일지우)라.’고 했다. 한순간의 분을 참으면 백일간의 근심을 면한다는 뜻이다. 술에 취한 23세 젊은이 둘이서 쳐다본다는 이유로 화가 나서 31세 젊은이를 주먹으로 속풀이를 했다. 그런데 두 젊은이에게 맞은 그 31세 젊은이는 뇌에 상처가 깊어 결국 숨을 거뒀다. 쳐다본다는 이유로 화가나 주먹을 휘두른 두 젊은이는 평생 죄값을 치르게 됐다. 한순간의 분을 참지 못하여 다른 사람도, 자신도 불행에 빠뜨린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순간을 참지 못해 사건사고에 휘말려 평생후회하며 사는 사람이 많다. 어느 사업가는 부적처럼 지갑 속에 글자 한 자가 적힌 종이를 넣고 다녔다. 그 글자는 한자로 참을 ‘忍’(인)자였다. 참고 참고 또 참자. 사는 동안에 참자. 이것이 그의 인생구호이고 사업의 구호였다. 사실 참는 것만으로 인생의 많은 위기를 넘어서고, 인생의 많은 기회를 붙잡을 수가 있다. 앞에서 아브라함 이야기는 한순간의 참지 못함이 하나님의 뜻을 그르친다는 것과 더불어 하나님은 참고 기다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교훈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풍성한 가을의 열매도 알고 보면 모두가 인내의 결과다. 수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부지런히 가꾸면서 참고 기다린 결과다. 우리 인생도 오늘 이렇게 건재(健在)한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참고 기다려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간은 주님의 그 기다리고 ‘참아주심’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려고 한다.
포도원에 심긴 무화과나무
본문은 열매를 맺지 않은 무화과나무 비유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다. 포도원에다 무화과나무를 심었다는 것은 분명 그 사람의 각별한 기대와 계획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지역에서는 길가 아무데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가 무화과다. 게다가 포도나무보다 장소를 몇 배나 더 차지하고, 영양분도 많이 흡수한다. 흔히 무화나무는 아무데서나 잘 자란다고 하는데, 과도하게 영양분을 흡수하여 주변을 척박하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에 그렇게 보인 것이다. 그러니 이런 무화과나무를 포도원에 심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다른 나무에게 피해를 주고, 토질을 망치기 때문이다. 본문을 보면 주인이 이런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무화과나무를 포도원에 심은 이유가 나온다. 그것은 열매 때문이었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사실 열매가 아니면 무화과나무를 포도원에 심을 이유가 없다.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와 함께 열매 외에는 어디에도 쓸모가 없다. 주인은 열매를 기대하고 포도원에 심어놓고 포도원지기에게 잘 가꾸도록 했다. 그런데 주인이 3년 동안이나 열매를 기대하고 포도원을 찾았으나 열매를 맺지 않았다. 화가난 주인이 포도원지기에게 자리만 차지하고 땅만 버리는 열매를 맺지 않은 무화과나무를 당장 찍어서 내버리라고 했다. 그러자 포도원지기가 주인에게 사정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8). 참아달라고 호소를 한 것이다.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와 함께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다. 포도원에 심길 자격이 없는 무화과나무처럼 아무런 자격이 없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선택하여 성민(聖民)으로 삼으셨다. 그리고 단지 열매하나 기대하면서 극진히 보살펴주었다. 그렇지만 끝내 열매를 맺지 않았고, 그래서 이미 심판이 선고되었는데, 포도원지기의 간절한 요청에 따라 참으심으로 그 심판이 유예(猶豫)된 것이다. 우리 역시 포도원에 심길 자격이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구원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자녀, 천국의 백성, 주님의 신부가 되었다. 이렇게 은혜를 받았으니 합당한 열매를 맺어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하지만 열매가 없어 주님을 실망시키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의 행위로만 보면 우린 이미 찍혀져 내버림을 당해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땅만 차지하여 그 땅만 버리고 있는 우리를 주님께서 참아주셔서 이렇게 있는 것이다. 열매를 기대하며 참고 계시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셨느냐는 것이다. 바로 앞 사건(1~8)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 몇을 학살한 사건을 주님께 알렸다(1). 그러자 주님께서 그들이 특별히 죄가 있어서 그리된 것이 아니고, 또한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깔려죽은 18명도 마찬가지라며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으면 이런 화를 당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이 비유를 주셨다. 자격이 없는데도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은혜를 잊어버리고 열매 맺지 못한 것을 회개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빌라도에게 죽임당한 사람들처럼, 실로암 망대에 깔려죽은 사람들처럼 되리라는 경고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과분한 은혜를 받고도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일까?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심각한 것이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는 태도 때문이라 생각한다. 비유를 통해서도 보았듯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다. 자격이 없는데도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 은혜를 당연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끝까지 싸워야할 것이 있다면 이 ‘당연의식’이다. 내가 이 자리에 서게 된 것도,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도, 내게 주신 가정도, 자녀도, 건강도, 내가 지금 숨을 쉬고, 말을 하고, 손발을 움직이고, 먹고 생활하는 것, 어느 하나도 당연한 것이 없다. 그런데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원망이 생기고, 불평이 생긴다. 이 당연의식이 무서운 것은 받은 것은 잊어버리고 받을 것만 생각하게 한다. 이런 사람에게 무슨 열매를 기대할 수가 있겠는가? 당연의식 반대는 은혜의식이다. 포도원이 원래 내가 있어야할 곳이 아닌데 이 좋은 곳에 심겨졌다는 생각이다. 지금 내가 누린 모든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라는 생각이다. 이런 은혜의식이 있어야 기쁨이 있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보답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이렇게 보답하는 삶에 열매가 따르게 된다. 단풍으로 점점 물들어가는 나무들을 보면서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있는 자리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열매로서 보답하고 있는데, 유일하게 그 일을 못하고 있는 존재가 인간인 ‘나’로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한편으론 이런 나를 참고 기대려주신 주님의 은혜가 몸 둘 바를 모를 만큼 크고 감사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죄송하고 부끄럽고 염치가 없다. 주님께서 공원에 서있는 나무만도 못한 배은망덕한 이런 나를 참고 기다려주시니 그저 감사하고 황송할 따름이다. 우리 모두, 거저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 지금까지 참고 기다려주신 주님의 은혜에 열매로 보답하자!
참아줘서 사는 인생
스위스 정신과 의사 폴 투르니에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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