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본받아, ‘찾아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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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0,490회 작성일 18-10-14 12:57본문
주님을 본받아, ‘찾아주심’
막6:45~52
2018. 10/14. 11:00
찾아가는 종교, 찾아오는 종교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다. 그 모든 종교는 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이 법(法)이고, 경(經)이다. 언뜻 보면 이것이 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늘에 있는 별의 수를 다 세고, 그 이름을 다 안다 해도, 혹은 철학사유를 완성하였다 해도, 그래서 온전한 깨달음에 도달하여 신을 찾았다 해도, 그 신은 가짜일 수밖에 없다. 신은 우리가 찾아내거나 발견하거나 증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스스로 찾아내거나 발견되는 것, 혹은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신일 수 없다. 신은 찾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드러내는’(계시) 존재다. 신은 사유(思惟)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열심히 찾아도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지 않으면 찾을 수가 없는 존재가 신이다. 이점을 강조한 것이 우리 기독교의 특징이다. 스스로 존재하신 신이 우리를 찾아오는 종교가 기독교다. 내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는 종교,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 찾아오시는 종교, 이것이 기독교다.
바로 여기서 우리 기독교와 타종교가 갈리게 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타종교는 모두가 ‘찾아가는 종교’다. 반면 우리 기독교는 ‘찾아오는 종교’다. 기독교는 사람이 신앙의 대상(신)을 찾아가는 구도의 종교, 탐구의 종교, 행위의 종교 아니라 신앙의 대상이 사람을 찾아오는 사랑의 종교, 은혜(총)의 종교다. 수행(修行)종교가 아니라 계시(啓示)종교다. 그래서 성경은 온통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이야기다. 하나님의 찾으심은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의 범죄에서부터 시작된다(창3:). 구약 수천 년 동안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신 경우도 있고, 천사를 통하여 찾아오신 경우도 있고, 환상이나 특이한 사건을 통해서 찾아오시는 경우도 있고, 특히 수많은 하나님의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찾아오셨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으신 이유도 다양하다. 그래서 구약 수천 년 역사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신 역사다. 신약시대 역시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찾아오심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태어난 성탄은 찾아오심의 출발이자, 절정이다. 이렇게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사람 곁으로 찾아오신 주님은 평생 사람들을 찾아다니셨다. 복음서는 식사하실 겨를도 없이 사람들을 ‘찾아다니시는’ 주님의 삶을 보여준 책들이다. 본문도 그 중에 하나다.
돌풍을 만난 제자들
본문은 소위 ‘오병이어’(五餠二魚)로 불리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후에 일어난 사건이다. 주님은 서둘러 제자들을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보내고, 홀로 남아 산에서 기도하셨다(45,46). 이렇게 하신 이유는 (요한복음에 따르면)기적의 떡을 맛본 사람들이 주님을 왕으로 삼으려했기 때문이다. 이는 당연한 반응이라 생각한다. 예나 지금이나 백성이든 통치자든 최대관심이 먹는 문제, 곧 경제문제해결이다. 다음이 삶의 질을 결정하는 건강문제, 곧 질병문제해결이다. 그런데 주님을 왕으로 모시면 이 두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이 되었다. 주님은 장정 오천 명을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먹이고도 남는 기적을 베푸셨고, 무슨 병이든 말씀 한 마디로 다 고치셨다. 그러니까 주님이 왕이 되시면 먹을 것, 병든 것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주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육신을 먹이고 고치는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니었고, 제자들이 이런 분위기에 휘둘리는 것도 원치 않아 무리로부터 속히 떠나도록 조치하신 것이다.
그런데 주님을 뭍에 두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던 제자들에게 문제가 생겼다. 호수 중간쯤 건너고 있을 때, 갈릴리 호수에 자주 발생하는 돌풍을 만난 것이다. 갑작스럽게 불어 닥친 돌풍이라, 그것도 어두운 밤중에 일어난 일이라 제자들은 크게 당황하고, 두려워했다. 문제는 주님까지 그 배에 계시지 않았다. 이런 경우를 두고 소위 인생의 삼중고(三重苦)라고 한다. 제자들이 인생이란 바다에서 이런 삼중고를 겪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가고 있는데도 돌풍을 만났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다가 어려움을 만나게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주님께 순종하면 주님께서 앞길의 모든 장애물을 제거해 주셔서 탄탄대로만 걷게 되고, 꽃길만 걷게 되리라 기대한다. 이것은 착각이다. 오히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순종의 길이 고난의 길이고, 믿는 사람도 혹독한 시련을 만날 수가 있다. 이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이 본문의 교훈이다.
찾아오신 주님
그렇다고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 본문을 보니 놀라운 말씀이 있다.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를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48). 여기에 세 개의 중요한 동사가 나온다. 두 개는 제자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주님의 반응을 보여주는 동사이고, 하나는 제자들의 응답을 촉구하는 주님의 행동을 보여주는 동사다. 먼저 ‘보시고’ 라는 동사다. 비록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배에 계시지 않으셨지만 제자들이 처한 상황을 다 보셨다. 제자들이 돌풍을 만나 힘겹게 노를 젓는 것을 보셨다. 순종하다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제자들을 보셨다. 멀리 계셔도 다 보셨고, 배에 함께 계시지 않아도 다 보셨다. 제자들이 돌풍을 만나 얼마나 힘들어 하는지, 얼마나 당황하고 있는지,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 다 보셨다. 그리고 ‘보는 것’에는 ‘아는 것’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다 아셨다. 우리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주님은 다 보시고, 다 아신다. 그리고 주님이 보시고 아시면 해결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 다음은 ‘오사’ 라는 동사다. 여기서 ‘오사’는 이미 ‘보시고’ 라는 동사에 예견된 행동이다. 주님께서 제자들이 어려움에 처한 것을 보시고 아셨으니 당연히 구원하기 위해 찾아오신 것이다. 주님은 보고만 계시지 않는다. 정확한 도움이 필요한 그 때, 찾아오시는 분이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바다위로 걸어서 오셨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준다. 주님은 모든 한계를 뛰어넘으신 분이라는 뜻이다. 주님과 제자들 사이에는 돌풍으로 요동을 치고 있는 바다라는 큰 장애물이 놓여있고, 한적한 곳에다 밤이 깊어 타고 갈 배도 없었고, 바다에는 돌풍으로 큰 풍랑이 일고 있어서 배가 있어도 타고 갈 수가 없었다. 이 정도면 사람은 보고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물리적인 한계를 뛰어넘어 그냥 바다위로 풍랑을 밟고 걸어오신 것이다. 하나님이 아니시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마가복음 저자는 이 사건을 통해 주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와’계신 하나님이신 것을 보여준 것이다. 둘째는 어려움에 처한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힘들어하고 아파할 때 주님 역시 힘들어하시고 아파하신다. 이런 주님의 마음을 잘 보여준 것이 바다위로 걸어서 오신 것이다. 힘겹게 노를 젓는 제자들을 보시고 잠시도 지체할 수가 없어서 주님은 바다위로 걸어서 찾아오신 것이다. 제자들이 고생하는 고난의 현장으로 헐레벌떡 달려오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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