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본받아, ‘알아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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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0,305회 작성일 18-09-16 12:53본문
주님을 본받아, ‘알아줌’
요1:43~51
2018, 9/16. 11:00
군자(君子)됨의 조건
논어(論語)에 이런 말이 있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나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냐!’(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말이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공자(孔子)의 이상이고 지향점이었다. 사람들이 이런 군자가 되기를 공자는 희망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을 뒤집어 생각해보면 공자가 이 말을 강조했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에 군자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공자는 왜 군자의 조건으로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나지 않는 것’으로 제시한 것일까? 이는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화를 내고, 화가 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공자시대에만 그런 것이 아니고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알아달라고 엉뚱한 짓을 하는 사람이 참 많다. 심지어 죄를 저지른 사람도 있다. 소위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사는 연예인이나 정치인의 경우는 잊혀진 것이 두려워 일부러 스캔들을 만들기도 한다. 특히 정치인들이 격한 말이나 돌출행동을 하는 것, 이 또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정치적 수사이고 몸짓이다. 공자는 이런 한심한 행태를 군자가 버려야 할 악덕의 하나로 꼽은 것이다. 하지만 심리학자들은 인간이 가장 두려워한 것 중에 하나가 ‘잊혀짐’이라고 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는 것을 죽는 것보다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여류작가가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가장 비참한 여인은 죽은 여인이 아니라 잊혀진 여인이다.’ 이쯤 되면 알아주지 않음이 심각한 문제라는 것, 그러니 보통 사람의 입장에서 공자의 이 기준은 좀 지나치게 높을 수도 있다. 사실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화나는 것, 최소한 섭섭한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알아준다는 것
그렇다면 공자는 왜 이것을 군자의 조건으로 제시한 것일까? 여기에는 두 가지 속뜻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무엇을 하든 그 기준을 ‘남’에게 두지 말고, ‘나 자신’에다 두라는 권고라는 것이다. 여기엔 자기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전제되어 있다. 그래서 ‘남의 평가나 알아줌’ 여부에 좌우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화날 여지도 없고, 화는커녕 소신껏 살게 된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든 그 기준을 남에게 두지 않고 자신에게 두고 소신껏 사는 사람이 군자라는 것이다. 사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평가에 민감하다. 다른 하나는 서로 알아주지 않는 안타까운 현실을 탄식하는 것이라고 한다. 알아줄 만한 사람을 알아주지 않는 이 현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거의 보편적이다. 공자가 살았던 시대도,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도, 심지어는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공자는 이것을 안타까워한 것이다. 여기서 ‘알아줌’은 삶의 맥락에서 관계를 갖게 되는 상대방을 ‘이해’, 혹은 ‘배려’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 대한 근본적인 ‘존중’이 깔려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그가 처한 상황내지 사정을 들여다보는 것, 무엇보다 그의 아픔을 들여다보는 것, 이것이 곧 ‘알아줌’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이것이 너무 안 되고 있다. 그저 마음속에는 오로지 나만, 나의 이익만 있고, 다른 사람의 존재가 들어갈 틈이 없다. 그러니 알아줌이라는 꽃이 피어날 토양이 없는 것이다. 마음도 삶도 교회도 세상도 삭막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면 알아줌이라는 이 꽃을 어떻게 피워낼 수 있을까? 부모가 자식을 알아주고, 자식이 부모를 알아주고, 아내가 남편을 알아주고, 남편이 아내를 알아주고, 친구가 친구를 알아주고, 선생이 제자를 제자가 선생을, 목회자가 성도를 성도가 목회자를, 성도가 성도를 서로 알아주는 세상은 언제쯤 볼 수 있을까? 이를 아주 실천적으로 잘 보여주신 분이 우리 예수님이시다. 히브리서 저자는 주님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아시고, 이해하시고, 공감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알아줌의 꽃이셨다는 뜻이다. 이 시간에는 우리를 잘 알아주시는 주님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알아주면 바뀐다.
본문에 세 분이 등장인물로 나온다. 예수님, 빌립, 그리고 나다나엘(바돌로메)이다. 주님과 빌립은 이미 아는 사이였다. 빌립이 주님의 제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빌립은 구원자를 기다리던 사람이었는데, 주님을 만나는 순간 ‘이 분이 모세와 여러 선지자를 통해 약속하신 구원자(메시야)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빌립과 나다나엘도 아는 사이였다. 그들은 갈릴리 벳새다에서 같이 나고 자란 친구였다. 그렇지만 주님과 나다나엘은 만난 적이 없다. 그런데 먼저 주님의 제자가 된 빌립이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주님을 소개했다. 나다나엘 역시 구원자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빌립은 기다리는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했다(45). 하지만 그 분이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는 빌립의 말에 크게 실망하여 비웃듯 말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46). 경건한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구원자가 베들레헴에서 난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빌립이 나사렛 출신이라고 하니 나다나엘이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이다. 하지만 빌립 역시 물러서지 않고 그를 잡아끌면서 그러면 가서 직접 확인해보자며 주님 앞으로 데리고 갔다.
여기서 빌립의 태도는 전도에 좋은 모범이 되고 있다. 빌립이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간 것처럼 전도는 가까운 사람에게 먼저 전하는 것이다. 빌립이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한 것처럼 전도는 내가 주님을 만난 경험을 나누는 것이다. 나다나엘이 회의를 품자 직접 확인해 보라고 주님께로 초청했던 것처럼 전도는 자신이 직접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주님께로 데리고 가는 것이다. 다음은 주님이 책임지신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반대에 부딪쳐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열정을 보인 태도다.
이렇게 빌립의 초청으로 주님께 나아온 나다나엘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된다. 주님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잘 바뀌지 않는 것이 사람인데, 어떻게 한 순간에 이렇게 바뀐 것일까? 그것은 주님이 자신을 알아주신 것 때문이다. 주님은 나다나엘을 보시고 대뜸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47). 자기 입장이나 유익을 위해서 거짓을 말하지 않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 소신이 분명한, 그러면서도 열린 마음을 가진 신실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나다나엘에 대한 주님의 평가였고, 칭찬이었다. 이에 나다나엘이 깜짝 놀라며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고 물었고, 주님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대답하셨다(48). 무화과나무는 평화를 뜻한 데다 잎이 무성하고 그늘이 많아서 그 아래 앉아 기도하는 것이 유대인의 관습이었다. 빌립의 말을 보아(45) 나다나엘 역시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구원자를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의 이런 심중을 꿰뚫어보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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