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본받아, ‘채워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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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0,395회 작성일 18-09-30 13:31본문
주님을 본받아, ‘채워주심’
요4:3~14
2018. 9/30. 11:00
현대인에게 가장 유명한 세 이름
작가이며 음악가인 킨키 프리이드맨(K. Friedman)이 「엘비스, 예수님, 그리고 코카콜라」(Elvis, Jesus and Coca-Cola)라는 제목의 소설을 썼다. 하필이면 왜 이 세 이름을 책제목으로 삼았을까? 먼저 작가는 적어도 영어권에서 이 세 이름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자신의 책제목을 이렇게 정한 것이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이 세 이름이야말로 현대인이 가장 많이 목말라하는 세 가지의 갈증을 대변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먼저, 엘비스 프레슬리(Elvis Aron Presley)는 현대인의 ‘연예/오락문화’를 대변한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연예/오락의 대명사다. 그가 부른 레코드판은 무려 10억장 이상이 팔렸고, 이 기록은 아직까지도 음악사에서 깨어지지 않는 신화다. 아무튼 사람들이 영화나 쇼, 음악과 같은 대중연예를 통하여 행복을 찾으려고 할 때, 엘비스라는 이름을 제일 먼저 떠올린다고 한다. 그만큼 엘비스는 대중연예계에 있어서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그 다음에, 코카콜라는 현대인의 ‘소비문화’(consumer culture)를 대변한다. 일터나 가정, 학교, 비행기나 차안에서, 심지어 걸어 다니면서도 마시고 소비하는 소비문화의 정점에 코카콜라가 있다. 수년 전 세계 청소년을 대상으로 세계화 의식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는데, 40%만이 UN의 로고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반면 코카콜라의 로고를 알고 있는 청소년은 무려 82%였다. 전 세계 어느 나라든지 코카콜라가 들어가지 않은 나라가 없다. 아무튼 코카콜라와 같은 청량음료는 우리 곁에 가장 가까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안식과 평안과 기쁨을 주는 상징처럼 되었다.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갈구하는 근원적인 목마름, 즉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영적 문화’(spirituality culture)를 대변해준다. 엘비스로 대변되는 연예/오락문화와 코카콜라로 대변되는 소비문화는 우리에게 육체적/정신적 즐거움은 줄 수 있어도 영적 갈증과 배고픔을 해결해주지 못한다. 인간은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 영적인 것을 갈망하며 사는 존재다. 또한 그 영적인 것이 충족되어야 만족하는 존재다. 이것을 해결해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이것이 해결되지 않는다.
채울 수 없는 공백을 가진 인간
파스칼은 인간에게는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공백이 있다고 했다. 이것은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도 채울 수 없고, 또한 이것이 채워지지 않는 한 만족이 없다. 이렇게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공백의 존재를 증명한 샘플 인생을 산 사람이 있다. 솔로몬이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지혜를 비롯하여 세상의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릴 수 있도록 복을 주셨고, 솔로몬은 유감없이 그런 인생을 살았다.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전2:10). 하고 싶은 것 다하고, 누릴 것 다 누리며 살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렇게 살았던 그가 이런 고백을 하였다.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전2:11).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5:10).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으신 공백을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었다는 고백이다.
본문에도 솔로몬과 같은 사람이 나온다. 그 주인공은 민족적/종교적인 편견에 시달리고 있는 ‘사마리아인’이요, 사회적으로는 여러 남성에게 버림을 받은 ‘여성’이다. 통념상으로 놓고만 보면 재수가 없는 불행한 여성 이야기일 수 있다.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이 사람 역시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으신 공백을 스스로 채우겠다고 몸부림치며 치열하게 살고 있는 우리 인간의 상징이다. 그러면서 이 공백을 채우는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절실한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여인을 버린 남자들도 여러 남자에게 버림 받은 이 여인도 모두가 이 공백을 채울 수 없는, 이 공백이 채워지지 않는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활동하지 않는 시간을 이용하여 물을 길으러 나온 것 또한 공백을 채우기 위한 절박한 몸부림으로 볼 수 있다. 솔로몬이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의 상징이라면, 이 여인은 아무 것도 갖추지 못한 사람의 상징이다. 그렇지만 공통점은 둘 다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공백을 채우려고 애를 쓰고 있으나 결국은 채우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러니 가진 사람이나 갖지 못한 사람이나 삶의 만족이 없기는 일반이다.
채워주기 위해 찾아오신 주님
예전에, 어느 절에서 불량배와 스님이 함께 생활하며 벌어진 일을 소재로 만든 영화를 보았다. 경찰에 쫓긴 불량배들이 어느 절로 숨어들어와 몸을 숨기고 있으면서 온갖 행패를 부렸다. 그러자 그들을 쫓아내려는 스님들과 갈등이 생겼다. 이를 지켜보던 주지스님이 불량배 두목에게 밑 빠진 항아리를 주면서 거기에 물을 다 채우면 절에 남도록 하겠다고 했다. 불량배들은 반항을 하면서도 딱히 방법이 없으니 받아들이고 온 힘을 다해 물을 채우려고 시도하지만 헛수고였다. 그 때 두목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두목은 씩 웃으며 주지스님을 한 번 처다 보고는 밑 빠진 항아리를 들어서 깊은 연못 속으로 던졌다. 그러자 항아리가 연못 속으로 가라앉으며 물이 가득 채워졌다. 밑 빠진 항아리는 물을 떠다가 부어서 채워는 것이 아니라 물이 가득한 연못에 안겨야 채울 수 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공백은 우리의 어떤 노력도 헛수고로 만들어버린다. 오직 완전하신 주님, 충만이신 주님, 충만하게 하시는 주님께 안겨야 채워질 수 있다. 본문이 이를 잘 보여준다.
본문을 보면 스스로 공백을 채우기 위해 헛수고하고 있는 여인을 찾아 광야를 가로질러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 바로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이시다. 목말라 신음하는 한 영혼을 채우시기 위하여 지나가기를 꺼리는 땅을 직접 찾아오셨다. 아무도 여행하지 않는 한 낮에 여행을 하시고, 마치 더러운 오물 덩어리 취급을 하며 누구도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여인을 만나 먼저 말을 거셨다. 그리고 그녀의 문제를 단박에 해결해 주셨다. 밑 빠진 항아리처럼 아무리 채우려고 발버둥을 쳐도 항상 헛수고였는데, 주님을 만나자 즉시 해결이 되었다. 어거스틴은 ‘주의 품에 안기기까지는 참 안식이 없다.’고 고백했다. 그렇다. 우리 인생은 주님 품에 안겨야 평안이 있고, 기쁨이 있고, 쉼이 있고, 힐링이 있고, 삶의 진정한 채움이 있다. 주님을 만난 전후 이 여인의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주님을 만나기 전 이 여인은 스스로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물동이를 의지했는데, 주님을 만난 다음엔 물동이 버려두었다.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사람들을 피하여 생활했는데, 주님을 만난 후엔 마을로 뛰어 들어가 사람들을 모았다. 그리고 채워지지 않는 삶의 공백을 공개하며 그런 자신의 공백을 채워주신 분을 만났다고 증거했다. 이 모두가 주님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다.
바제도병(Basedow's disease/ 갑상샘 항진증의 대표적인 질환)으로 고생했던 19세기의 시인 크리스티나 로제티는 〈고뇌의 기도〉라는 시에서 주님을 이렇게 부르고 있다. ‘지친 세상의 큰 바위 그림자 같은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주님은 결핍에 지치고, 갈증에 지치고, 질병에 지치고, 공허함에 지친 우리에게 큰 바위 그림자 같은 분이시다. 우리의 인생은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밑 빠진 항아리와 같다. 그러나 큰 바위 그림자와 같은 주님을 만나, 그 주님께 안길 때 인생이란 결핍의 항아리가 채워지고, 갈증의 항아리가 해소되고, 질병의 항아리가 치유되고, 공허의 항아리가 의미로 가득 채워지게 된다. 나와 여러분은 이미 이 복을 경험하여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채워주는 사람이 되자!
남태평양에 솔로몬 제도가 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원주민은 커다란 나무가 필요할 때 우리와 전혀 다른 방법으로 나무를 쓰러뜨린다고 한다. 그것은 마을의 사람들이 모여 매일 아침 해가 뜰 때 이 나무를 바라보면서 소리를 지른다고 한다. 소리 지르면서 욕이나 저주, 잔소리를 30일 동안 계속 나무를 향해 퍼붓는다고 한다. 이들은 이렇게 부정적인 소리를 나무가 계속 듣게 되면 나무의 있는 영혼이 죽어버린다고 생각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나무가 100% 죽는다고 한다. 해프닝 같은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생각해보면 매우 중요한 교훈과 함께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사람 역시 사소한 말 한마디에 흔들린다. 아무리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라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나쁜 말, 악한 말, 독한 말, 억울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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