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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본받아,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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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793회 작성일 18-09-09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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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본받아, ‘눈물

11:33~35

2018. 9/9. 11:00

눈물, 인간다움의 표시

인도의 정글에서 늑대에게 길러진 모글리(Mowgli)라는 늑대소년의 모험이야기를 담은정글북이란 책이 있다. 모글리는 친구인 갈색곰 발루(Baloo)와 흑표범 바기라(Bagheera)에게 정글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런데 어느 날, 슬픔으로 인해 눈물이 흐르자 모글리는 자신이 죽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때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흑표범 바기라가 이렇게 말한다. ‘동생, 그것은 인간만이 흘리는 눈물이라는 거야. 너는 이제 인간의 아기가 아니야. 진정한 인간이 된 것이지!눈물은 인간됨의 표시라는 것이다. 사실 눈물처럼 마음의 상태를 잘 보여주는 것이 없다. 사람은 아파도 울고, 슬퍼도 울고, 기쁘고 행복해도 운다. 감동을 받아도 울고, 다른 사람이 슬퍼하고, 아파하고, 기뻐하는 것을 보아도 눈물을 흘린다. 그래서 눈물을 인간의 감정 중에서도 가장 순수한 슬픔과 기쁨, 절심함, 공감을 표현하는 침묵의 언어라고 말한다. 마음의 이슬이고, 감정의 샘물이고, 양심의 표현이라고 한다. 때로 백 마디 말이나 기도보다 호소력이 강한 것이 눈물이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다. ‘천국의 문은 기도에는 닫혀 있더라도 눈물에는 열려있다.눈물 자체가 말없는 말이고, 말없는 기도인 것이다. 사실 성경에 눈물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신 장면이 자주 언급되고 있다(삼상1:10, 38:3 ). 


사단도 천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 지혜도 있고, 권능도 있고, 치유의 능력도 있다. 말씀의 능력도 있고, 예언의 능력도 있다. 모든 것이 다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다. 그런데 사단에게 한 가지가 없는 것이 있다고 한다. 눈물이다. 반면 우리 인간은 약하다. 지혜도 없고, 능력도 없고, 치유능력도 말씀능력도 예언능력도 없다. 하지만 사단이 가지지 못한 그 한 가지를 가지고 있다. 눈물이다. 사단이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무너뜨리는 파괴적인 존재가 된 것은 눈물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도 잔인한 사람을 가리켜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라고 한다. 이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우리 몸은 슬프거나 화가 나는 등 감정의 변화가 생기면 스트레스를 받아 호르몬을 많이 분비한다. 필요이상으로 나온 호르몬은 우리 몸에 오히려 독이 된다. 눈물은 많이 나온 호르몬을 밖으로 배출하는 역할을 한다. 독이 우리 몸에 쌓이지 않도록 해준 것이다. 그런데 눈물을 흘려 독을 씻어내지 않으면 독이 차곡차곡 쌓여서 독하고 잔인한 사람이 된 것이다. 반면에 잘 우는 사람, 눈물이 많은 사람은 눈물로 쌓인 독을 해독시키니까 다른 사람을 세워주고 붙들어주고 밀어주는 선한 마음을 가진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눈물의 사람

정호승 시인의 시() 중에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시가 있다. 이 시에 이런 시구가 나온다.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깊이 공감이 되는 부분이다. 우리가 믿는 주님이신 우리 예수님이야말로 눈물이 많은 사람, 눈물을 사랑하는 사람, 눈물이 된 사람, 그리고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이셨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주님의 눈물에 대하여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성경에는 주님이 우셨다(Dominus Flevit)는 말씀이 세 번 기록되어 있다. 장차 예루살렘에 닥칠 심판을 내다보시고 우신 애국적인 눈물(19:41~43),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통곡하신 사명의 눈물(5:7), 그리고 본문이다. 이것은 주님이 평생 세 번만 우셨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주님이 울보(Weeper)셨다.는 뜻이다. 그래서 복음서를 깊이 읽어보면 주님의 눈물이 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눈물에 초점을 두고 주님의 생애를 다룬 책이 한 권 있다. 엔도 슈사쿠의 사해 언저리). 성경문학에서 3이란 수는 그냥 숫자 3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완전을 뜻한다. 이렇게 상징적인 수를 통하여 주님께서 눈물의 사람이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본문은 주님께서 아끼신 사람들의 오빠이지 친구인 나사로의 죽음을 두고 우신 것이다(배경설명은 생략). 35절은 성경에서 가장 짧은 구절이다. 원문은 관사를 포함해서 세 단어이고, 영어성경은 두 단어로 되어 있다. 짧지만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이다. 아무튼 이 눈물은 우는 사람과 함께 우신 공감의 눈물,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시고 우신 동정의 눈물, 사랑하는 친구를 잃고 우신 슬픔의 눈물이다. 여기에 학자들은 한 가지를 더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의 한계를 비통하게 여기시는 비탄의 눈물이라고 한다.

 

눈물은 회복의 출발점이다.

우리에게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는 칼 야스퍼스라는 철학자가 있다. 그는 원래 정신과의사였는데, 인간실존을 사색하며 철학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배경에는 그만의 뼈아픈 인생체험이 있었다. 독일에 나찌정권이 들어서면서 정부가 그에게 아내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아내와 헤어질 것을 요구했다. 그가 거절하자 교수직을 박탈했다.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린 것이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가까운 친구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하이데거에게 크게 실망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나찌정권의 강압을 견디지 못하고 우리나라 이광수나 최남선처럼 끝내 협력하게 된다. 그 대가로 프라이브르크 대학 총장까지 하게 된다. 하지만 야스퍼스는 하이데거에게 실망은 했으나 변절자라고 욕은 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에게는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음을 깊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한계상황’(Grenzsituation)이라 불렀다. 그러면서 이 한계상황을 누구나 그 앞에 섰을 때 좌절할 수밖에 없는 일종의 벽 같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한계상황의 대표적인 것이 죽음이다.

 

그렇다. 죽음이란 누구도 원치 않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이 죄를 범한 인간의 숙명이다. 또한 인간으로서 극복할 수 없는 한계상황이다. 그러니 인간은 죽음 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는 벽을 만나게 된다. 본문에서 나사로와 그의 가족은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에 마주하고 있다. 그런데 죽음이라는 보편적인 한계상황 외에도 어떤 사람에게는 해결할 수 없는 인간관계가, 또 어떤 사람에게는 치유할 수 없는 질병이, 탈출구가 없는 절박한 삶의 형편이 한계상황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이런 우리의 한계상황을 잘 아신다는 것이다. 그 한계상황 앞에 서 있는 우리 보시고 비통해하시고, 그래서 눈물을 흘리신다. 본문이 이런 주님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러한 현실을 비통해하시며 비탄의 눈물만 흘리시는 분이 아니다. 주님은 나사로를 그 한계상황에서 건져주셨다. 결국 주님의 눈물은 나사로를 회복시키는 출발점이었다. 한계상황에 직면한 우리에게도 똑같이 역사하실 주님을 찬양하자! 눈물은 회복의 신호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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