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본받아, ‘들어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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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0,152회 작성일 18-10-21 18:39본문
주님을 본받아, ‘들어주심’
눅18:35~43
2018. 10/21. 10:00(산상예배)
그저 들어주었을 뿐인데
어느 동네 성당에 신부가 새로 부임했다, 그런데 그 동네에는 성당과 신부에 대해 항상 욕을 하고 다니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그 할아버지는 동네에서 유일하게 성당에 나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새로 부임한 신부는 그 소문을 듣고 할아버지를 찾아갔다. 그리고 자신의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자그만 치 3시간 동안 그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그래요? 아, 네, 그렇군요. 네.......’ 이 일 있고난 다음부터 할아버지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다녔다.
‘성당에 새로 온 신부님은 사람이 됐어. 괜찮더라구!’
그저 들어만 주었을 뿐인데 그동안 그렇게 성당과 신부를 욕하던 할아버지가 새로 부임한 신부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래서 흔히 하는 말로 말을 잘하는 것보다 잘 들어주는 것(경청)이 더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잘 들어주는 것, 곧 경청(傾聽)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다. 이것은 삶의 태도이자 상대방에 대한 배려이고, 존중의 표시다. 상대방의 깊은 내면을 탐험하는 여행이기도 하고, 자신의 인간성을 드러내는 인격적 행위이기도 하다. 그래서 경청만으로도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어떤 이는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고, 어떤 이는 혼란이 정리되고, 어떤 이는 관점이 바뀌고,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문제로부터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도 한다. 단지 잘 들어주었을 뿐인데 말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성으로 대충 듣는 소위 ‘배우자 경청’, 상대방의 말을 분석하면서 문제점을 찾아내는 ‘논리적 경청’을 많이 하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대화가 ‘대놓고 화내는 것’이 되고 만다. 진정한 경청은 상대의 생각과 느낌과 열망을 알아주고 인정해 주는 ‘공감적 경청’이다. 이와 같은 진정한 경청을 통해 관계가 깊어지고, 성장과 성숙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들음의 중요성
본문은 들음과 들어줌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우선, ‘들음의 중요성’이다. 바울은 믿음은 주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시작된다고 했다(롬10:17). 본문은 바울의 이러한 주장에 대한 좋은 예다. 소경 거지가 있었다. 그날도 사람들의 출입이 많은 여리고성 길가에 앉아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무리가 지나가는 듯 많은 사람 소리가 났다.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무슨 일이 생긴 것이냐고 물었고, 누군가가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고 있다.’(37)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이 소경은 마치 비명처럼 큰 소리로 외쳤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38). 그러자 사방에서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었다. 그렇지만 그는 더 큰 소리로 외쳤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39). 여기서 크게 외쳤다는 단어가 미완료형이다. 미완료형에는 반복의 의미가 있다.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자 더 크게, 계속해서 외쳤다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사람들의 꾸짖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큰 소리로 외친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외친 내용이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쳤다. 이 말은 구약성경에서 구원자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리라고 했는데, 그 메시야가 예수님이라는 뜻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맞먹는 놀라운 고백이다. 어떻게 주님을 만난 적이 없는 그가 주변 사람들에게 ‘나사렛 예수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고쳐서 외친 것일까? 비록 그가 주님을 만난 적은 없지만 주님에 대한 소문은 들었을 것이다. 당시 주님에 대한 소문이 온 갈릴리와 유다지역에 두루 퍼져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주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소문을 듣고 주님이 메시야라고 확신한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주님께서 하신 사역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야 사역과 정확히 일치한다(사61:1,2). 아무튼 소경은 소문을 ‘듣고’ 주님에 대한 믿음을 키워왔고, 사람들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 물었고, 어떤 사람으로부터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듣고’ 이런 멋진 고백으로 주님의 발길을 멈추게 하였다. 주님은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셨다. 이 소경은 들을 수 있는 복된 귀로 주님을 만나 영/육의 복을 누리게 된 것이다.
데려오라!
아울러 본문은 주님의 들어주시는 은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당시 주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이 소경의 간절한 외침을 단지 구걸하는 소리, 귀찮은 소음 정도로 생각했다. 그의 아름다운 믿음의 고백과 절박한 소원은 듣지 못했다. 그래서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었던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셨다. 특히 그의 아름다운 신앙고백에 가시던 발길을 멈추셨다(40a).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마치 새끼를 잃은 짐승처럼 절박하게 외쳐대는 그를 바라보셨다. 그리고 데려오라고 말씀하셨다(40b). 주님께서 들으시고, 주님께서 보시고, 주님께서 부르시면 이제 그의 문제는 해결되는 일만 남은 샘이다. 그렇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고 다 들으신다. 그것도 믿음을 담은 간절한 호소는 주님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주님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신앙생활은 우리의 삶에 주님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내 문제에 주님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그 비결은 부르짖음이다.
주님은 그를 ‘데려오라’고 하셨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은 ‘주님이 부르신다.’고 했다. 아마 그와 접촉을 꺼려 말로 전한 것 같다. 암암리에 저자는 이 소경을 대하는 주님과 주변 사람들을 대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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