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본받아, ‘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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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0,256회 작성일 18-08-12 10:17본문
주님을 본받아, ‘평안’
막4:35~41
2018. 8/12. 11:00
걱정의 실체
아마 들어보았을 것이다. 심리학자 젤린스키(Ernie J. Zelinski)는 그의 책 「느리게 사는 즐거움」에서 우리가 걱정하는 것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걱정거리의 40%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한 것이고, 30%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고, 22%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사소한 일에 대한 것이고, 4%는 우리 힘으로 어쩔 도리가 없는 일에 대한 것이다. 단지 나머지 4%만이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일에 대한 것이다. 즉 우리가 걱정하는 것의 96%는 쓸데없는 걱정인 것이다.’ 걱정의 96%는 쓸데없는 것이고, 게다가 4%도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것이니 걱정거리가 될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쓸데없는 걱정에 매여 살고 있다는 셈이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마6:27). 걱정해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성경은 걱정의 심각성을 역설하고 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17:22). 최고의 보약은 즐겁게 사는 것이고, 가장 나쁜 바이러스는 근심과 걱정, 염려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걱정을 털어내지 못하고 그림자처럼, 혹은 혹처럼 달고 살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인류 역사상 유명한 건축물은 걱정(불안)해소 위해 세워진 경우가 많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파라오의 죽음에 대한 걱정해소를 위해 세워졌다. 중국의 만리장성은 황제의 정치적 걱정해소를 위해 세워진 건축물이다. 이런 불가사의한 건축물 말고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울타리나 담장, 성(城), 그리고 각종 보안장치도 결국은 걱정해소가 주목적이다. 창11장의 바벨탑도 흩어짐에 대한 걱정해소를 위해 쌓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걱정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하지 못해서 생겨나는 마음의 현상이다(창3:7,8, 4:17). 그런데 이렇게 걱정해소를 위해 많은 비용을 지불했지만 제대로 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그래서 성경은 진정한 걱정해소방법에 대해 이렇게 말씀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모든 일을 주님께 맡기고, 그저 감사함으로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신다는 것이다. 걱정은 생각의 문제이고, 또한 생각의 근원인 마음의 문제다. 그리고 그 마음과 생각을 다스릴 수 있는 분은 그것을 지으신 하나님밖에 없다. 그러니 결국 걱정극복은 전적으로 주님께 맡기는 믿음의 문제이고, 또한 기도의 문제다. 이를 잘 보여준 것이 본문이다.
풍랑 속으로
흔히 사람들은 평안을 단순한 고요함, 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모든 조건이 완전하게 갖춰진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별일이 없으면 ‘편하다. 혹은 평안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기에 작은 일만 일어나도 그 평안은 금방 깨진다. 그러니 이것은 참 평안이 아니다. 참 평안은 본문의 주님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태도다. 본문의 내용은 이렇다. 주님과 제자들이 늦은 밤에 작은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 바다 중간쯤 가다가 돌풍(突風)을 만나 배가 뒤집힐 지경에 이르렀다. 주님을 제외한 제자들 모두 바다와 바람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지만 거세게 몰아치는 바람과 그 바람으로 인한 파도를 당할 수가 없다. 나름 최선을 다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상황이 점점 더 악화되어 갔다. 결국 그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무시는 주님을 깨워 살려달라고 아우성쳤다.
이와 같은 돌풍은 갈릴리 바다의 지형적인 특성 때문이다. 갈릴리 바다는 남북으로 약21km, 동서로 약15km에 달하는 마치 심장처럼 생겼다. 해면은 해발보다 약210m 가량이 낮고, 수심은 얕은 곳이 25m, 깊은 곳은 228m에까지 이르며, 사방이 해발 1000m가 넘는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런 지형적인 특성으로 낮에 달궈진 땅이 저녁이 되면 급속히 식으면서 차가운 공기를 만들고, 그 공기가 산을 타고 내려와 바다로 유입되면서 돌풍을 만들었다. 그러니 노련한 기상전문가도 가늠하기 어려운 것이 갈릴리 바다의 상황이다. 예측이 어렵기는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이런 점에서 갈릴리 바다는 우리 인생을 닮았다. 이내 평온하다가 갑작스럽게 돌풍이 일어나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요동치는 갈릴리 바다처럼 우리 인생에도 돌풍이 얼마나 많은가! 안전한 방법은 밤바다에 나가지 않는 것이지만 바다를 터전으로 삼고 살면서 그럴 수는 없는 일이고, 또한 살다보면 부득불 밤에 배를 움직여야 할 때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늘 두려움과 걱정을 안고 바다로 나가야했다. 그런데 본문에서 제자들에게 그 걱정과 두려움이 현실이 되었다.
풍랑 속에서도
지난 주일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가치관을 가진 사람인지를 알아보는 법에 대하여 여러 가지 예를 드렸는데, 문제를 만났을 때 대응하는 태도를 보면 또한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가 있다. 본문에서 풍랑을 대하는 주님과 제자들의 태도가 전혀 다르다. 제자들은 풍랑이 두려워 죽게 되었다고 아우성을 쳤으나 주님은 풍랑 속에서도 편히 주무셨고(38), 또한 말씀 한 마디로 풍랑을 잠잠하게 만드셨다(39). 이와 같이 풍랑을 대하는 주님의 태도는 주님이 누구신지, 어떤 분이신지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준다. 주님은 어떤 환경에도 영향을 받지 않으신 분이시라는 것이다. 오히려 환경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이는 주님의 신성(神性), 곧 주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아무튼 주님은 풍랑 속에서도 평안하게 주무셨다. 거센 풍랑도 주님의 고요를, 주님의 내적 평안을 깨뜨리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참 평안이고, 참된 평안을 누리는 사람의 모습이다. 참 평안은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 역시 이런 평안을 누리기를 원하신다. 주님께서 풍랑으로 인하여 두려워 쩔쩔매는 제자들의 태도를 책망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실 배를 삼킬 것 같은 거센 풍랑, 배안으로 쇄도하는 거친 물결 앞에서 아무리 바다에 익숙하고 노련한 어부출신이라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이상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목숨을 걱정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그들을 책망하셨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40). 풍랑에 대한 두려움의 문제, 걱정의 문제는 곧 믿음의 문제라는 것이다.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풍랑 앞에서 마음의 평안을 잃고 걱정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신 것이다.
문제는 믿음이다.
그러면 그 믿음이란 어떤 믿음인가?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 나와 함께 하신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믿음이다.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함께 하신 주님이 환경을 초월하시고, 말씀 한 마디로 그 환경을 다스리는 분이신 것을 몰랐다.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사람의 목숨이 풍랑에 달린 것이 아니라 천지의 유일한 주권자이신 주님께 달렸다는 사실이다. 참새 한 마리도 주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문제는 그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이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풍랑 앞에 쩔쩔매며 두려워했던 것이다. 주님은 이 점을 지적하여 책망하신 것이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다. 작은 일에도 마음의 평안을 잃고, 쉽게 걱정의 노예, 염려의 노예, 두려움의 노예로 전락하는 것은 결국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이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 그 주님이 말씀 한 마디로 세상을 창조하시는 세상의 유일한 주권자이신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여전히 이 걱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공중을 나는 작은 새는 물론 이름 모를 들풀까지 돌보시는 주님을 믿지 못한 까닭이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고 책망하신 것이다. 그러면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고 하셨다. 믿음을 보시겠다는 뜻이다.
문제는 믿음이다. 주님이 도우신다는 믿음, 주님이 지키신다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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