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본받아, ‘만져주심’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0,292회 작성일 18-10-07 13:21본문
주님을 본받아, ‘만져주심’
막1:41~45
2018. 10/7. 11:00
에포(EPOH)냐! 호프(HOPE)냐!
잭 캔필드의 「가장 절망적일 때 가장 큰 희망이 온다.」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이 책에 친한 친구사이인 암전문의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 한 토막이 나온다. 한 의사가 자기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네. 자네나 나나 전이성 암(癌)환자에게 똑같은 약을 똑같은 양만큼 똑같은 스케줄에 따라 똑같은 용도로 처방을 하지 않는가? 그런데 왜 자네는 74%나 성공을 하고 나는 22%밖에 성공을 못한 것일까? 같은 암을 치료하는데서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긴다는 말인가? 자네에게 무슨 특별한 비결이라도 있나?’ 그러자 친구가 대답했다. ‘물론 그렇지. 에토포시드(Etoposide), 플라티눔(Platinum), 온코빈(Oncovin), 하이드록시우레아(Hydroxyurea). 나도 자네처럼 이 약을 주고 있네. 그런데 자네는 아마 이 약을 줄 때 환자에게 이 약은 어제도 먹은 에포(EPOH)라고 말할 걸세.’ 여기서 에포(EPOH)는 앞에서 소개한 약의 첫 글자를 모은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나는 통계상으로 회복 가능성이 별로 높지 않지만 그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이렇게 말을 바꿔서 약을 주고 있다네. 여기 당신의 호프(HOPE)가 있습니다. 이 약을 열심히 드십시요. 그러면 당신도 희망이 있습니다.’ EPOH(에포)를 뒤집으면 HOPE(호프)가 된다.
똑같은 상황인데 두 사람 사이에 이와 같은 차이가 난 것은 한 사람은 그냥 약만 주었고, 다른 한 사람은 희망을 주면서 약을 주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엄청났다. 똑같은 약인데도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고 주었을 때는 10명중에 7명이 죽어나갔고, 희망을 주었을 때는 10명중에 7명이 살아났다. 우린 이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인간이 무엇으로 사는 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성경은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고 했다(마4:4). 인간은 육체 이상의 정신적 영적인 존재라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에겐 배가 고픈 것보다 마음이 고픈 것이 더 심각하고, 몸이 병든 것보다 마음이 병든 것이 더 심각하다. 좌절하고 낙심하면 모든 것이 문제로 보이고 나을 병도 죽을병이 되고, 고칠 병도 고질병이 된다. 하지만 누군가로부터 위로와 격려를 받고 소망을 품게 되면 문제도 기회가 되고, 고질병도 고칠 병이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서 오셔서 문제 많은 인생을 만나 먼저 하신 일이 몸의 치료보다 마음의 치료, 영혼의 치유에 관심을 가지셨던 것이다. 본문이 좋은 예다.
주님의 첫 번째 기적
본문은 마가복음에 나온 첫 기적 이야기다. 주님께서 한 나병환자를 고쳐주신 사건인데, 나병은 당시 유대사회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병이면서도 불치병이었고, 또한 슬픈 병이었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가족은 물론 그가 속해 있는 공동체로부터 쫓겨나게 되었고, 그들에게 삶의 첫 번째 이유였던 예배의 자리에 나아갈 수도 없었다. 죄의 결과가 단절인 것처럼 일단 나병도 걸리면 모든 관계가 끝장이 났다. 때문에 나병을 가리켜 죄를 가장 닮은 병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주님께서 오셔서 나병환자를 가장 먼저 고쳐주셨다는 마가복음의 기록은 나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마가복음의 중요한 특징이 주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 없고, 그저 주님께서 하신 일만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하신 일을 보고 그가 누구신지 알라는 뜻이다. 이런 관점으로 주님이 하신 일들을 보면 주님이 누구신지 선명하게 보인다. 본문에서 흔하면서도 불치병이고 슬픈 병, 죄를 가장 닮은 이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주님께서 가장 먼저 고쳐주셨다는 것은 주님은 슬픈 불치병과 같은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신 분이시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본문에서 우리 눈여겨봐야 것은 주님께서 이 나병환자를 고치시기에 앞서 하신 행동이다. 마가는 본문 바로 앞에서 주님의 갈릴리 사역을 총괄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39). 그리고 나서 본문의 사건을 소개한다. 물론 이 사건은 주님께서 갈릴리에서 행하신 여러 사건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런데 마가가 자신의 신학적 의도에 따라 이 사건을 첫 번째 사건으로 소개한 것이다. 한 나병환자가 주님께 나아와 엎드려 간구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40). 그러자 주님은 즉시 세 가지로 이 환자에게 반응하셨다. 첫째는 마음이다. “불쌍히 여기사”(41). 이는 마가복음에 자주 나온 표현으로, 문제를 지닌 사람을 대하신 주님의 마음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상대방의 불행이나 아픔을 단순히 공감하는 정도가 아니라 상대방의 불행이나 아픔을 자기 몸으로 전율하며 느끼고 일체화(一體化)하는 것이다. 둘째는 행동이다.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41). 이렇게 행동하신 다음 셋째로 말씀하셨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41). 대개의 경우는 먼저 말을 하고 다음에 행동하게 되는데, 주님은 먼저 행동을 하시고 말씀을 하셨다. 말보다 행동이 빠르신 주님의 모습이다.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는 글자대로만 보면 놀랄 것이 전혀 없는 그저 평범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율법에서 제시하고 있는 나병환자에 대한 관리배경을 이해하면 의미가 전혀 달라진다. 앞에서 소개한대로 나병에 걸리면 가장 먼저 취한 조치가 격리였다. 나병에 걸린 사람이 접촉하거나 나병에 걸린 사람과 접촉한 모든 것이 부정하게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일단 접촉을 피하기 위해 격리시켰고, 환자가 접촉한 모든 것은 불살랐다. 그래서 나병은 고독한 병이고, 슬픈 병이었다. 병도 병이지만 병으로 인한 단절이 더 큰 아픔이었다. 게다가 믿는 사람으로서 예배의 자리에 나갈 수가 없으니 천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왜 부정(不淨)을 이토록 경계한 것일까? 레위기에 따르면 죄를 크게 두 종류로 말씀하고 있다. 하나는 거룩에 반대가 되는 ‘속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결에 반대가 되는 ‘부정한 것’이다. 부정한 모든 것이 죄이기 때문에 죄의 확산을 막기 위해 부정을 철저히 제거하거나 방지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병에 걸린 사람을 격리시켜 접촉을 막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을 주님께서 손을 내밀어 만지셨다. 주님은 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니 말씀만으로도 이 사람을 고쳐주실 수 있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율법의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이 일로 따르게 될 여러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환자를 만져주셨다. 한 영혼에 향한 주님의 지극한 배려와 사랑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아울러 사람을 부정하게 하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병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악한 생각들, 곧 시기나 질투, 미움, 탐욕, 악독, 음욕과 같은 것들이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신 것이다(막7:18~23).
특히 ‘대다.’에 해당되는 헬라어 단어(απτομαι)를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이 단어의 원래의 뜻은 ‘풀로 붙여서 들을 하나로 만들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께서 그에게 슬쩍 손을 댄 것이 아니다(우리 성경은 이런 오해를 줄 수 있게 번역이 되어 있지만). 꽉 잡아주셨거나(hold on) 아니면 꼭 껴안아주신(embrace) 것이다. 이와 같은 주님의 강력한 사랑의 만져주심이 병으로 인해 무너지고 깨진 마음이 회복된 것이다. 주님은 이렇게 마음을 회복시킨 다음 몸의 병을 치료해주셨다. 그래서 말씀보다 먼저 만져주신 행동을 하신 것이다.
가장 효과적인 사랑의 언어, 만져줌
서울의대 어느 교수는 자신의 외모를 보고 불만을 품으면 그때부터 불행의 씨앗이 움트기 시작한다며 자신의 얼굴에 자신감을 갖고 잘 만져주면 피부가 탄력이 생겨 더 고운 외모를 갖게 된다고 했다. 한 마디로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잘 만져주는 것이다. 그것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의 비결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관계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