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기둥Ⅳ, ‘손’(H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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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0,627회 작성일 17-08-13 13:34본문
행복기둥Ⅳ, ‘손’(Hand)
누가복음 10:30~37
2017. 8/13. 11:00
기도하는 손
(그림을 보여주며)누구나 한 번쯤 이 그림을 보았을 것이다. 이 그림이 그 유명한 〈기도하는 손〉이다. ‘북유럽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독일 미술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erer)의 대표작이다. 이 그림에는 매우 감동적인 일화가 있다.
알브레히트 뒤러에게 프란츠 크닉슈타인(Franz Knigstein)이라는 절친(切親)이 있었다. 두 사람은 화가의 꿈을 키우고 있었는데 지독한 가난이 그들의 꿈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림 공부를 접어야했던 상황에서 두 사람은 대화 끝에 좋은 방법을 찾았다. 한 사람이 먼저 일을 해서 나머지 한 사람의 학비를 대주고, 그가 공부를 마치면 먼저 일을 한 사람의 공부를 도와주기로 한 것이다. 크닉슈타인이 먼저 일을 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뒤러를 열심히 뒷바라지했다. 뒤러는 자신을 위해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는 친구를 생각하며 공부에 전념했고, 크닉슈타인 역시 친구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일을 했다. 이윽고 뒤러는 친구의 도움과 뛰어난 재능을 밑거름 삼아 훌륭한 화가가 되었다. 뒤러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친구의 집을 찾아갔다. 친구의 집에 도착한 뒤러는 창문으로 우연히 기도를 하는 친구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데, 그의 기도를 듣던 뒤러는 무릎을 꿇고 오열하였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 저의 손은 오랜 기간 힘든 노동으로 굳어서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를 대신해 제 친구가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주님께서 도와주신다면 저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오열하던 뒤러는 기도하는 친구의 거칠고 굳은 손을 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래, 저 손을 그리자. 그래서 온 세상에 나를 위해 희생한 저 손을 알리자. 그리고 나의 감사하는 마음도 보여주자.’ 그래서 그는 종이를 꺼내 기도하는 친구의 손을 그렸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이 그림이다. 그러니 이 손은 친구를 위해 희생한 손이다. 친구를 위대한 화가로 길러낸 손이다. 친구를 위해 일한 손, 그 친구를 위해 기도한 아름다운 손이다. 이런 손이 있어 알브레히트 뒤러라는 뛰어난 화가가 탄생한 것이다. 사실 우리 뒤에도 이런 아름다운 손이 있어서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이다. 나를 위해 죽으신 우리 주님의 거룩한 손을 비롯하여, 부모형제, 남편, 아내, 친구, 선생님, 사랑하는 지체의 손이다. 이 시간에는 행복기둥 7H의 네 번째 ‘Hand’(손)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손 이야기
새벽예배에서 호세아서를 공부했는데, 호세아서에서 매우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말씀이 하나 있다. 그것은 ‘너는 또 가서 사랑하라’(호3:1)는 말씀이다. 선지자 호세아에게 자신을 버리고 정부(情夫)를 따라간 음란한 아내를 다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래서 호세아는 이 말씀에 순종하여 음란한 아내를 데려오기 위해 은 30개를 지불하였다. 이와 같은 선지자 호세아 부부 이야기를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호세아서다. 그래서 호세아서를 읽으면 하나님의 불붙은 사랑의 마음과 그 뜨거운 손길을 느낄 수가 있다. 그 사랑의 손길이 나를 살게 하였고, 살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본문은 너무도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다. 이 말씀을 단순화시키면 ‘세 종류의 손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첫째는 강도들의 손이다. 남의 것을 훔치고 빼앗고 해치는 손이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상처를 주고, 소중한 생명을 파괴하고 거반 죽게 만든 악한 손이다.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고, 피눈물을 쏟게 만드는 나쁜 손이다. 둘째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손이다. 어려운 이웃의 부르짖음에 귀를 막아버린 손이다. 도움을 외면하고 뿌리친 손이다. 도울 위치에 있으면서도 도움을 주지 않는 무정한 손이다. 남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는 무관심한 손, 그저 자기 안위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손이다(※최근 미국에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지도 신고하지도 않고 웃으며 촬영만 한 십대들 영상).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대개의 사람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고 본다. 셋째는 사마리아인의 손이다. 언제 강도들이 다시 몰려올지 모르는 위태한 상황이지만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지 않는 손이다. 불쌍히 여기면서 다가간 손이다. 상처에 포도주를 붙고 쌔매주는 치료하는 손이다. 쓰러진 이웃을 일으켜 세워준 손, 자신의 나귀에 태우고 주막까지 인도한 손, 밤을 지새우며 돌봐준 사랑의 손이다. 자신의 여비까지 몽땅 내놓은 희생의 손이고, 혹시 치료비가 더 들면 오는 길에 갚겠다고 약속하는 끝까지 책임지는 손이다. 주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37)는 말씀으로 이 말씀을 마치셨다. 이웃에게 사마리아인의 손과 같은 손이 되라는 뜻이다.
손은 사랑하라고 있다
한번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기 바란다. 지금까지 내 손은 어떤 손이었는가? 그리고 생각해 보기 바란다. 주님께서 왜 나에게 손을 주셨을까? 그것도 두 개씩이나 주셨을까? 사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이 손으로 나쁜 짓을 참 많이 하고 있다. 요즈음 국정원 댓글사건이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이와 같이 좋지 않는 의도를 가지고 여러 사회관계망에 악성 댓글을 다는 것을 비롯해서 강도들처럼 약한 이웃을 괴롭히고 폭력을 휘두르라고 주신 것이 아닌데,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훔치고 빼앗으라고 주신 것이 아닌데, 그저 움켜쥐기만 하고, 남의 약점을 지적하는데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 아닌데, 이렇게 불의하고 부정하고 부당한 일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 손을 주신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한 손으로는 자기의 일을 하고, 다른 한손으로는 이웃을 도와야하기 때문이다.’ 역시 철학자다운 말이다. 한 손은 자신을 돌보고 가꾸고 키워가는 일에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고 돌보는데 사용하라고 주셨다는 것이다. 그렇다. 손은 사랑하라고 주신 것이다. 섬기라고 주셨다. 돌보라고 주신 것이다. 서로 붙들어주고, 잡아주고, 이끌어주고, 꼭 안아주라고 주신 것이다. 그리고 손가락은 왜 열 개일까? 아마도 최소한 열 명은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닐까? 무엇보다도 이 두 손을 모아 주님께 기도하라고, 두 손을 높이 들고 주님을 찬양하라고, 부지런히 주님을 섬기라고, 선한 일에 힘쓰라고 주신 것이다.
지난주일 소개한 「파랑새」라는 동화처럼 행복은 가까이 있다. 힘들고 지쳐 있을 때 말없이 안아주는 손이 행복이다. 슬프고 외로울 때 흘리는 눈물을 닦아주는 위로의 손이 행복이다. 실의에 빠져 있을 때 다가와 어깨를 꼭 감싸주며 또닥여주는 손, 쓸쓸히 걷는 인생길에서 조용히 다가와 꼭 잡아주는 손이 행복이다. 본문의 주인공 사마리아인처럼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는 손, 힘을 보태서 섬기는 손, 적은 것이라도 사랑의 마음으로 나누는 손이 행복이다. 그래서 성경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행20:35)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런 손이 행복을 부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손이 행복을 만드는 손이고, 행복을 주는 손이다. 손은 두 사람을 묶어줄 수도 있지만 서로 밀어낼 수도 있다. 손가락은 두 사람을 연결시키기도 하지만 접으면 주먹으로 변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이 힘없이 두 손을 늘어뜨리고 서서 서로에게 내뻗지도 못하고, 서로를 붙잡지도 못하고 있다. 이런 사람은 불행을 부를 수밖에 없고, 주변에 불행을 퍼뜨리는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움켜쥔 손을 펴달라고, 힘없이 늘어진 손에 힘을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자! 그래서 사마리아인처럼 행복을 만드는 손, 행복을 주는 손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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