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되지 못한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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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0,729회 작성일 17-07-16 13:02본문
회복되지 못한 땅
겔47:6~12
2017. 7/16. 11:00
영적 목마름
탁월한 세일즈맨(Salesman)이 있었다. 하루는 판매할 수 있는 큰 건수를 놓치고 말았다. 그는 무척 안타까워하면서 상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말을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지만 말에게 물을 먹일 수는 없나 봅니다!’ 그러자 그 상사가 그에게 이렇게 충고를 했다. ‘이보게, 자네의 일은 말에게 물을 먹이는 게 아니라 말을 목마르게 하는 것이야!’ 이 말 멋지지 않는가? 갈증을 느끼게만 만들면 물을 마시는 것은 저절로 따르게 된다. 물론 세일즈맨이 물건을 파는 것이 목적이지만 파는데 너무 집착하지 마라는 뜻이다. 무슨 일이든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과정에 충실해야 한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세상을 향한 우리의 사명이고, 또한 사역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에 대하여, 복음에 대하여, 영생에 대하여 목마르도록 만드는 것이다. 목이 말라 주님을 찾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과보다 과정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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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다. 우리 자신이 먼저 영적 갈증, 영적 목마름을 가져야 한다. 예배에 대해 목이 마르고, 말씀에 대해 목이 마르고, 찬양, 기도, 복음, 거룩한 삶에 대해 목마름이 있어야 한다. 이런 목마름이 있어야 다른 사람을 목마르게 할 수가 있다. 간절한 사람만이 간절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영적 목마름은 영적인 일들을 시도할 때 생긴다. 예배를 드릴수록 예배에 대한 목마름이 생기고, 말씀을 듣고 읽고 공부를 할수록 말씀에 대한 갈증이 생긴다. 전도를 할수록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뜨거운 목마름이 생긴다. 기도나 찬양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렇게 목마름이 있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다. 건강하다는 증거다. 특히 죽은 사람을 보라! 평생 물 한 모금, 밥 한 톨 먹지 않아도 갈증도 배고픔도 느끼지 못한다. 진수성찬을 차려놔도 미동(微動)도하지 않는다.
회복에 대한 환상
본문은 회복될 이스라엘 땅에 대한 에스겔 선지자의 환상이다. 작은 물줄기가 성전 문지방 밑에서 흘러나와 죽음의 땅 사해 골짜기까지 흘러가는 환상이다. 이는 복의 근원,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이시고, 그 출발점이 하나님께서 계신 성전(교회)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예배의 자리, 말씀의 자리가 왜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 물줄기가 닿는 곳마다 치료와 회복과 생명의 역사가 풍성하게 일어났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그것을 자로 일천 척씩 잴 때마다 물의 깊이가 변한다. 강의 폭이 넓어지고 강의 깊이가 깊어진 것이다. 물이 불어난 것이다. 처음 일천 척에서는 발목물이었는데, 다음 일천 척을 쟀더니 무릎 물로, 또 일천 척을 쟀더니 허리 물로, 그 다음 일천 척은 헤엄쳐야 할 물로 불어났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의 관계를 보여준다. 여기서 ‘자’(尺)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 자로 잴수록 물의 깊이가 깊어진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할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깊어진다. 발목깊이의 은혜에서 무릎깊이의 은혜로, 무릎깊이의 은혜에서 허리깊이의 은혜로, 허리깊이의 은혜에서 헤엄칠 수 있는 깊이의 은혜로 점점 은혜가 깊어지고 신앙이 깊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물이 깊어질수록 물의 지배력이 커져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처럼 은혜가 깊어지고 신앙이 깊어질수록 자기 마음대로, 자기 뜻대로 살지 않고 주님께 맡기는 삶을 살게 된다. 주님께 붙잡힌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가라 하시면 가고, 주님이 서라 하시면 선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기뻐하고, 주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좋아하게 된다. 무엇이든 무슨 일에든 주님을 따르는 ‘주(主)바라기’가 된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 물이 닿는 곳마다 살리는 역사가 풍성하게 일어났다. 죽음의 강이 살아나고, 거기에 각종 고기가 살게 된다. 이렇게 그곳이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자 어부들이 모여들고, 그 적막한 땅에 마을이 형성된다. 또한 소금 땅으로 황폐했던 강가에는 나무가 자라고, 그 나무에 잎과 열매가 풍성히 맺었다. 특히 나무의 이파리는 각종 약제로 사용이 되었다. 그런데 이런 풍성한 생명의 역사와 전혀 관계가 없는 별천지가 있었다. 개펄과 진펄이다. 다른 곳에서는 회복과 생명의 역사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지만 이곳은 그대로였다. 생명이 살 수 없는 소금 땅, 죽음의 땅 그대로 남아있었다. 나는 이 시간 왜 이 개펄과 진펄이 회복되지 못한 땅으로 남았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안에 아직도 개펄과 진펄로 남아 있는 것들이 회복되는 은혜가 경험하기를 바란다.
개펄과 진펄
우선 개펄과 진펄이 회복되지 못한 이유는 강물이 그곳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12). 물은 생명이다. 물이 닿는 곳에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 또한 물은 영적으로는 은혜의 상징이다. 사막과 같은 인생도 하나님의 은혜가 닿는 곳은 생명의 역사, 회복의 역사, 치료의 역사가 있다. 그래서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고, 풍성한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은혜를 받지 못하면 개펄과 진펄이 된다. 죽음의 땅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왜 강물이 개펄과 진펄에 미치지 못한 것일까?
1. 사방이 막혔기 때문이다.
물은 낮은 곳, 활짝 열린 곳으로 흐른다. 막힌 곳이나 높은 곳은 물이 흘러들어갈 수 없다. 개펄과 진펄에 물이 들어가지 못한 것은 사방이 막혀있는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닫힌 마음, 교만한 마음의 상징이다. 은혜를 받지 못한 이유 또한 이 마음 때문이다. 사방으로 닫힌 교만한 마음 때문이다. 교만이란 자아라고 하는 벽에 의해서 사방이 막힌 것과 같다. 이렇게 닫힌 교만한 마음에는 은혜가 임할 수 없다. 그래서 여전히 소금 땅으로, 생명이 존재할 수 없는 죽음의 땅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활짝 열린 낮은 마음, 겸손한 마음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 교만은 천사를 떨어뜨려 마귀가 되게 하고, 겸손은 사람으로 천사가 되게 한다. 겸손은 천국의 풍부한 창고를 발견하는 눈이요, 그것을 받는 손이다. 독일어로 겸손을 ‘데무트’(Demut)라고 하는데, ‘힘’이란 뜻이다. 겸손이 진정한 힘이라는 것이다. 영적인 힘, 성도의 힘, 교회의 힘은 겸손에 있다. 겸손한 사람에게 주님의 힘, 은혜의 힘이 머물게 된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개펄과 진펄이 되지 않기 위해선 은혜의 강물이 흘러들도록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내려놓아야 한다. 막힌 것들을 다 허물어야 한다. 특히 내 경험, 내 지식, 내 욕심, 내 야망 등을 내려놓아야 한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를 충만히 경험하는 비결이고, 은혜의 강물이 봇물처럼 흘러들게 하는 비결이다. 이것이 은혜를 위한 수용성 확장(open mind)이다. 그리하면 내 삶에서 생명의 역사, 회복의 역사, 풍성하게 열매를 맺는 역사를 경험하게 되고, 이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이웃을 유익하게 할 수가 있다.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81:10).
2. 강의 가장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개펄은 강도 육지도 아닌 습지를 의미한다. 비가 올 땐 물이 고였다가 비가 오지 않으면 말라버린 곳이다. 진펄은 물이 들었다 나갔다 하는 곳을 의미한다. 비가 많이 와서 수위(水位)가 올라가면 물에 잠겼다 비가 오지 않아 수위가 낮아지면 물이 빠져나가 버린 곳이다. 물이 항상 머물지 않는 곳이다. 그 지역이 강의 중심이 아니라 강의 가장 끄트머리에 있기 때문이다. 강이나 바닷가에 가면 이런 곳을 흔히 발견할 수가 있다. 이것은 신앙과 세상의 경계에 머물면서 한 발은 세상에, 한 발은 신앙세계에 들여놓고 있는 사람의 상징이다. 교회는 다니지만 교회의 중심에 서서 섬기지 않고, 신앙생활은 하지만 주님께 자신을 올인(All in)하지 않고 주변만 맴도는 사람이다. 주님을 바짝 쫒지 않고 멀찍이 거리를 두고 따르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주변에서 아무리 엄청난 생명의 역사, 살리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어도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 되고 만다.
사도행전에 이런 신앙의 위험성에 대한 예가 나온다. 바울이 드로아에 이르러 밤늦도록 설교를 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 유두고라는 청년이 있었다, 졸며 설교를 듣다가 3층에서 떨어져 죽었다. 그가 이렇게 된 것은 졸음도 문제지만 창가에 걸터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졸아도 방안이었다면 괜찮은데 문제는 창가였다. 창가에 걸터앉아서 졸다가 이런 봉변을 당한 것이다. 창이 무엇인가? 안과 밖의 경계다. 물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개펄과 진펄이다. 이 경계에 있었기에 위대한 선생님의 마지막 설교를 제대로 듣지 못하고 졸게 된 것이고, 졸다가 그만 떨어져 죽고 만 것이다. 중심에서 벗어나면 주님으로부터, 은혜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 깊은 은혜에 잠길 수가 없다. 그러므로 중심에 서서 섬기고, 중심에 서서 생활하기 바란다. 흔히 군대는 줄이라고 한다. 신앙생활에서는 위치와 거리가 중요하다. 중심에 있어야 신앙생활에서 안전지대를 확보하는 것이다. 주님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고, 주님과 동행이 가능해 진다. 이것이 개펄과 진펄이 되지 않는 비결이다. 주님의 은혜 안에 풍덩 잠기는 비결이다. 물리적인 위치와 영적인 위치는 비례한다. 물리적인 거리와 영적인 거리도 비례한다. 중심에 서서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면 주님 중심의 삶이 된다.
어려서 아버지에게서 자주 들은 말이다. ‘사람은 혼자서는 못산다. 귀신이 도와도 도와야 산다.’ 사람은 의존적인 존재라는 것을 강조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귀신이 돕는 삶이 온전하겠는가? 사람들의 삶이 망가지고, 세상이 뒤죽박죽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님이 아닌 다른 것에 의존해 있기 때문이다. 주님이 도우셔야 온전한 삶을 살 수가 있다. 그러니 주님의 은혜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다. 영적인 존재는 물리적인 것으로 바꿀 수 없다. 주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살리고 고치고 회복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려면 은혜의 강물이 흘러들도록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 앞서 말한 대로 활짝 열린 낮은 마음,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수용성을 확장해야 한다. 또한 변두리에 머물지 않고 중심에 서야 한다. 그런데 이런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서두에서 말한 목마름이다. 주님을 향한 목마름, 은혜를 향한 거룩한 목마름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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