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부르는 꽃,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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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105회 작성일 17-07-02 13:04본문
행복을 부르는 꽃, 감사
롬8:28
2017. 7/2. 11:00(맥추감사주일)
내가 그 입장이라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다들 좋아해서 평상시에도 자주 듣고, 자주 말하는 말씀이고, 오늘처럼 감사절이면 빠지지 않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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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에 감사하라.’
‘그래도 감사하라.’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하라.’
얼마나 귀하고 좋은 말씀인가? 얼마나 사랑하는 말씀인가? 그런데 좀 더 진지하게 따져보면 참으로 부담스러운 말씀이 있다. 현실적으로 실천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평안하고 상황이 좋을 때는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면 과연 이럴 수가 있을까? 예를 들어, 치명적인 병으로 죽어가는 아내(남편)를 쳐다보고 있는 남편(아내)이라면, 오랜 지병 때문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는데 고쳐주시기는커녕 오히려 병이 점점 더 깊어가는 상황이라면, 평생을 장애라는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야 될 어린 자녀를 둔 부모라면, 술만 먹으면 짐승으로 돌변한 남편에게 구타를 당하는 아내라면, 부도로 재산은 다 날아가고 집안 곳곳에는 경매딱지가 붙고 가족도 뿔뿔이 흩어질 상황이라면, 이 상황에 대해서 정말 감사할 수 있을까? 입에서 ‘주님, 그래도 감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 나올 수 있을까? 내가 그 입장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말씀과 현실
사실 성경의 많은 말씀이 이와 같다. ‘항상 기뻐하라.’ ‘고난 받는 것을 즐거워하라.’ ‘핍박자를 위해서 기도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가줘라.’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줘라.’ 이 말씀들 역시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좋아하지만 자신과는 상관없는 말씀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많다. ‘그래, 그렇게 살면 좋지. 그러나 나는 못해!’ 이렇게 말씀과 자신을 분리해서 말씀은 말씀대로 나는 나대로 살게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귀만 즐겁게 하고 지키지도 못할 말씀이나 하시는 말쟁이시란 말인가? 지킬 수도 없는 말씀을 명령하시는 무지막지한 독재자시란 말인가? 우리의 연약함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분이시고, 게다가 복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 왜 이런 실천할 수도 없는 난처한 요구를 하신 것일까? 하나님이 정말 우리의 형편을 알기나 하신 것일까? 사실 이런 말씀을 접하다보면 온갖 의문이 생긴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높은 장벽처럼 보인 이유는 간단하다. 말씀의 이면에서 작동하고 있는 중요한 원리를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원리를 모르면 누구라도 이런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그 원리가 곧 ‘믿음의 원리’, ‘은혜의 원리’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이 하신다. 주님께서 은혜주시고, 주님께서 힘주시면 할 수 있다.’ 그렇다. 말씀과 현실의 차이를 극복하게 해주는 것이 믿음이다. 이 믿음의 시각(perspective), 믿음의 태도(attitude)가 불가능해 보이는 말씀을 순종으로 이끌어준다. 사실 믿음이 없으면 신앙생활 자체가 성립이 안된다. 생각해 보라! 빚을 내서 살아야 할 만큼 쪼들리고 힘든 상황인데 어떻게 십일조를 비롯한 헌금생활을 할 수가 있고, 쪽잠을 잘 만큼 시간을 아껴도 모자라는 판국인데, 어떻게 주일날 교회에 와서 세월아 네월아 하고 찬송하고 예배드리면서 주일성수할 수 있겠는가? 새벽잠을 푹 자야 힘든 하루를 보낼 수 있는데, 새벽예배에 나오라는 것이 말이 되는가?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다. 그런데 믿음을 가지면 이런 일들이 신기하게 가능해진다. 최소한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은 이 사실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이 믿음이 우리의 태도와 관점을 변화시켜 현실의 문제를 바라보게 하고, 또한 극복하게 한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믿음생활이라고 한다. 믿음이 있어야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가장 적절한 예가 오늘 본문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섭리적인 신앙
이 말씀은 바울의 신앙고백이자 그의 인생관이다. 한마디로 모든 일의 결과는 ‘좋음, 밝음, 만족함’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바울은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서도 감사할 수가 있었고, 기뻐할 수가 있었다(바울의 삶 참고). 이런 고백은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와 믿음에서 온다. 세상에는 좋은 일에도 방해되는 일이 많다. 좋은 일에도 방해되는 일이 많다면 좋지 않은 일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인생이 이래도 힘들고 저래도 힘든 것이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힘들다, 죽겠다, 희망이 없다.’와 같은 부정적인 말을 달고 사는 것이다. 그런데 믿음 안에서는 바울처럼 좋은 일이든 좋지 않는 일이든 항상 그 결과는 ‘좋음, 밝음, 만족함’이다. 때문에 어떤 상황, 환경, 사건 속에서도 ‘된다. 되고 있다. 될 것이다. 될 수밖에 없다.’는 기대와 소망과 확신을 가지고 감사하게 되고, 감사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사는 믿음의 열매다. 믿음이 있으니까 그 힘든 상황에서도 감사한 것이고, 감사의 조건을 생각해내는 것이다. 믿음은 모든 상황을 감사모드로 바꿔주기 때문에 ‘그래서’ 감사, ‘그래도’ 감사, ‘그러니까’ 감사, ‘그렇지만’ 감사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감사는 행복이라는 나비를 부르는 꽃이다.
본문에서 바울의 고백과 같은 믿음을 ‘섭리적 신앙’이라고 한다. 섭리(provideo)란 ‘하나님의 뜻에 의해 나의 삶이 지금 여기에 이렇게 존재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하나의 신앙고백’이다. 그러므로 섭리적 신앙이란 ①내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계획되고 결정된다(마10:29)는 고백이고, ②나는 우연한 삶의 자리에서 특정한 행위를 했는데 결국은 필연적으로 그러한 행위가 하나님에 의해 행하여졌다(왕상22:34)는 고백이다. 그래서 ③내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두는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라는 고백이다. 이런 섭리적인 신앙, 오직 하나님의 뜻에 초점이 맞추어진 신앙에는 염려나 걱정, 불평이나 원망이 자리할 틈이 없다. 모두가 은혜요, 감사요, 기쁨이다. 자꾸 우리의 삶이 이런 신앙에서 비껴가기에 말씀과 현실의 차이를 느끼게 되고, 그 사이로 사단이 틈을 타서 우리의 마음에 불평의 씨, 원망의 씨, 불신의 씨를 뿌려놓게 된다. 경건훈련이란 사단이 뿌려놓은 이런 씨앗을 제거하는 작업이다.
섭리적인 신앙의 모델
성경에 이런 섭리적인 신앙의 좋은 모범이 있다. 요셉이다(창37:~50:).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되었던 사람이다. 그의 지나온 삶의 여정은 ‘불행’ 그 자체였다. 그의 집은 콩가루 집안이었다. 어머니가 넷이었고, 열 명의 이복형들은 짐승같은 자들이었다. 그는 이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노예상인에게 팔려 애굽에서 종살이, 감옥살이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며 복수의 칼을 갈 법도한데, 그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주어진 여건과 환경에 충실했다. 때가 되어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혹독한 기근으로 자기를 노예로 팔아넘긴 형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형들은 출세한 그를 보고 자신들이 저지른 죄 때문에 전전긍긍하였고, 그는 형들을 무조건 용서하였다. 그가 이렇게 형들을 용서하였던 것은 핏줄 때문이 아니라 그의 믿음, 즉 ‘섭리적인 신앙’ 때문이다. 그는 무서워 떨고 있는 형들에게 이렇게 위로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45:5).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를 삼으셨나이다.”(창45:8).
“당신들은 나를 해하여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20).
요셉의 이 말들은 섭리적인 신앙의 진수(眞髓)를 보여주고 있다. 자신은 형들에 의해 ‘팔린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해 ‘보냄을 받은 존재’라는 고백이다. 그것은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사명을 가지고 보냄을 받은 존재라는 것이다. 이 일을 형들의 손을 빌려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는 고백이다. 물론 형들은 그가 미워서, 그를 해할 목적으로 하였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는 것이다(바울의 고백과 동일). 그러니 형들에게 복수가 아니라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을 감사로 꽃 피우고, 우리의 삶을 감사로 물들게 하는 비결은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야 바울처럼, 요셉처럼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사람이 될 수가 있다. 생활 속에서 감사의 기적을 경험하는 인생을 살 수가 있는 것이다. 감사는 믿음의 꽃이다. 믿음이라는 나무에 열린 꽃이 감사다. 그리고 이 꽃은 행복이란 나비를 부른다. 그래서 감사하는 사람에게 행복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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