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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받는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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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522회 작성일 17-06-04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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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받는 그릇

골3:15~17

2017. 6/4. 11:00

감사의 출발점

여러분, 초코파이를 맛있게 먹는 법을 아는가? 그것은 ‘군대에 가는 것’이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전에는 군대에서 초코파이는 최고 인기였다. 훈련은 고되고, 배는 고프고, 먹을 것은 없다보니 초코파이는 꿀맛이었다. 사실 배고플 때는 맛없는 것이 없다. 그래서 배고픔을 아는 사람은 사소한 것에도 만족할 줄 안다. 만족을 아는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한다. 만족을 아는 사람은 남에게 싫어하는 일을 강요하지 않는다. 또한 만족을 아는 사람은 억지가 없다. 만족을 아는 사람은 삶이 즐겁고, 늘 좋은 느낌을 갖는다. 이와 같은 만족은 감사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감사는 깨닫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미국 뉴욕재활병원과 우리나라 실로암 안과병원의 벽에 다음과 같은 어느 환자의 글이 붙어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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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을 이루기 위해 힘을 주십사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겸손을 배우라고 연약함을 주셨고,

많은 일을 하려고 건강을 구했더니 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하라고 병을 주셨으며,

행복해지고 싶어 부유함을 구했더니 지혜로워지라고 가난을 주셨다.

 

세상 사람의 칭찬을 받고자 성공을 구했더니 뽐내지 말라고 실패를 주셨고,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달라고 기도했더니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삶 그 자체를 선물로 주셨다.

 

구한 것 하나도 주어지지 않은 줄 알았는데, 내 소원 모두 들어주셨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한 삶이었지만 미처 표현 못한 기도까지 모두 들어주셨다.

나는 가장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감사는 받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은혜를 깨닫는 것이 감사의 출발점이다. 깨닫는 것이 은혜이고, 깨닫는 것이 복이다.

 

당연한 것은 없다!

겨우 300그램에 불과한 우리의 심장은 하루에 10만 번 이상을 뛰고, 혈액은 4억 3천만 킬로를 달리고, 폐는 2만 3천 번 숨을 쉬고, 뇌세포를 700만개를 사용하며 산다고 한다. 내가 무슨 수고를 했다고 심장이 그렇게 많이 뛰어주고, 내가 달리라고 해서 혈액이 그 먼 거리를 달려주는 것이 아니다. 또 가만히 있어도 폐는 그렇게 여러 번 호흡을 해준다. 이 모든 일에 약간의 차질만 와도 생명에 금방 이상이 오는 것인데, 아무런 수고를 하지 않고 생각조차 안 해도 이처럼 여러 번 심장이 뛰어주고, 폐가 호흡을 해주고, 혈액이 흐른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한가? 내 몸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마 내가 이 모든 장기를 작동시킨다면 심장도 혈액도 호흡도 벌써 멈추고, 뇌세포도 활동을 그만뒀을 것이다. 이런 놀라운 일이 지금도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러니 이 사실만 가지고도 나를 지으시고 지탱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 모든 일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당연하게 여기다보니 오히려 조금만 불편해도 불평하고 원망을 터뜨린다. 이 당연한 것들이 은혜인 것을 알게 하는 것이 믿음이고, 믿음이 은혜에 대한 깨달음을 갖게 한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 감사를 일으킨다. 그래서 감사를 믿음의 꽃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주장하는 삶

감사는 은혜 받는 그릇’이라고 우찌무라 간조가 말한 적이 있다. 은혜에 대한 깨달음이 감사의 출발점이고, 또한 감사는 은혜를 받는 그릇이다. 감사의 그릇이 클수록 은혜가 크게 임하고, 감사의 그릇이 많을수록 은혜도 많이 임한다. 또한 감사는 은혜를 유지하게 하는 비결이다. 지난주일 행복해지는 습관에 대해 말씀을 드렸는데, 사실 행복해지는 최고의 습관은 감사다. 감사를 잘 훈련하면 그 인생이 감사로 물들게 되고, 이런 사람은 행복할 수밖에 없다. 감사인생은 감탄인생이 되고, 불평인생은 감옥인생이 된다. 불평과 불만에 사로잡히면 은혜를 잃게 된다. 하지만 감사는 은혜를 계속 머무르게 하고, 항상 은혜 안에서 살게 한다. 본문은 은혜로 구원을 받은 우리가 항상 은혜 안에서 사는 비결에 대한 말씀이다.

 

성도는 소위 예수 브랜드의 옷을 입은 사람(롬13:14)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입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예수 브랜드의 옷은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12)이고, 그 위에 ‘용서와 사랑’(13)을 더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 브랜드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려면 ‘그리스도의 평강이 주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15). 본문은 예수 브랜드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즉 그리스도의 평강이 주장하는 삶(은혜 안에서 사는 것과 같은 의미)에 대한 말씀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평강이 주장하는 삶(은혜 안에서 사는 삶)이 가능할까? 그 비결이 감사’하는 생활이다. 다같이 15절을 읽어보자.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감사는 자가 되라.

 

여기서 ①은 3인칭 현재 명령형이고, ②는 2인칭 현재 명령형이다. ①의 주어는 그리스도의 평강이고, ②의 주어는 그리스도의 평강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평강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평강에 지배를 받으려면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의 모든 구절이 감사로 끝을 맺고 있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그렇다.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고, 죄 용서를 감사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감사하고, 섬길 수 있는 은혜를 감사할 때 주님의 평강이 우리를 주장하게 된다. 그래서 성경은 기도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고 했고, 찬양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16)고 했고, 예배도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시50:14)고 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리라’(시50:23)고 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고 찬양하는 것이 황소를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하는 것’(시69:30,31)이라고 했다. 또한 감사함으로 기도하는 사람을 ‘그리스도의 평강이 마음과 생각까지 지키실 것’(빌4:7)이라고 했다.

 

감사의 그릇은 말씀으로 키울 수 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평강이 주장하는 감사하는 삶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말씀’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16). 이를 새번역으로 읽으면 그 뜻이 좀 더 분명해진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풍성히 살아있게 하십시오.” 감사하려면 우리 안에 주님의 말씀이 풍성히 살아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듣고 잊어버리는 말씀으로 그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메시지 성경은 더 쉽게 번역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마음껏 드나들게 하십시오. 말씀이 여러분 삶에 속속들이 스며들도록 충분한 자리를 만드십시오.”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고 메마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님의 말씀이 내 삶을 마음껏 드나들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씀이 우리의 삶에 속속들이 스며들도록 충분한 자리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모내기철이다. 논에 모내기를 할 때 아낌없이 물을 채워야 한다. 그래야 옮겨 심은 모가 말라죽지 않고 뿌리를 내릴 수가 있다. 감사하는 자가 되려면 말씀으로 삶을 충분히 채워야 한다. 말씀이 풍성히 채워져야 한다. 말씀이 삶에 속속들이 스며들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감사가 흘러넘치게 된다. 역동성이 넘치는 생명력 있는 성도가 된다.

 

 

감사의 방해꾼 

감사의 방해꾼이 있다. 분주함이다. 이것은 감사뿐만 아니다. 모든 영적 생활의 방해꾼이다. 오늘날 성도의 삶을 무너뜨리기 위한 사단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분주함이다. 사단은 우리로 바빠 죽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사단의 뜻을 충실하게 따르는 추종자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바빠 죽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바빠서 예배도 못 드리고, 바빠서 기도도 못하고, 바빠서 말씀도 못 읽고, 바빠서 봉사도 못하고, 심지어 바빠서 밥 먹을 시간도 없다고 한다. 이렇게 바쁘다보니 주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살아있지 못하게 되고, 말씀이 삶속에 속속들이 스며들 자리를 마련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경건한 일들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되고, 나중에는 완전히 떠나게 된다. 한자 바쁠 ‘’(忙)자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忙=心+亡).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말씀이 없으면 감사가 사라진다. 감사를 잃으면 ‘정신적/영적 사막화’가 일어난다. 심령도 가정도 교회도 사회도 사막화가 일어나게 된다. 사람들이 참지 못하고, 온유하지 못하고, 칼처럼 날카롭고 예민하게 된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마음이 사막이 되어서 그렇다.

 

환경 학자들은 환경파괴로 인한 지구의 급속한 사막화 현상을 심각하게 염려하고 있다(유엔 사막화 대책회의에 따르면 매년 600만㎢의 토지가 사막화되고 있고, 바다의 사막화도 심각한 수준이라고 함). 우리는 무엇보다도 마음의 사막화, 가정의 사막화, 교회의 사막화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과 가정과 교회 안에서 그 자리를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막도 물이 스며들면 기름진 땅이 된다. 마찬가지로 물댄 동산과 같은 심령, 가정, 교회가 되려면 말씀이 속속히 슬며들도록 해야 한다. 특히 말씀은 우리 영혼의 양식이다. 밥과 같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이 스며들도록 자리를 마려하지 않은 것은 먹고 살기 위해 일한다면서 끼니를 거르며 죽을 듯 일만하는 사람과 같다. 가족을 위해 일한다면서 자녀도 가족도 모두 뒤로하고 일에만 빠져 사는 일중독자와 같다. 밥도 안 먹고 밤새워 일하며 건강을 바라는 것은 모순이다. 가족을 돌보지도 않으면서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을 바라는 것은 모순이다. 말씀은 우리를 건강하게 살리는 생명의 양식이다. 말씀이 풍성한 가운데서 감사의 그릇이 커진다. 그리고 그 그릇에 가득히 주님의 은혜가 채워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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