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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339회 작성일 17-01-29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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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질문

마16:13~20

2017. 1/29. 11:00

지워진 은잔

르네상스 시대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43세가 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는 밀라노에 사는 루도빈코(Ludovinco) 공작으로부터 예수님의 최후만찬을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3년간의 작업 끝에 그는 이 그림의 초벌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친구에게 보여주면서 소감을 물었다. 이 그림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좌우에 6명씩 제자들이 앉아있고, 예수님이 오른손에 잔을 들고 계시는 명화였다. 이 때 그의 친구는 예수님의 오른손에 들려있는 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잔이 너무 인상적이고 아름다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마치 살아있는 것 같다.’ 그 때 그는 갑자기 붓을 들어 그 컵을 지워버렸다고 한다. 그러자 친구가 깜짝 놀라며 ‘왜 그러느냐?’고 물었고, 그가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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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이 그림에서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네.

 

이 짧은 일화는 기독교의 본질, 신앙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만 드러나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어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이고, 우리 신앙의 본질이다. 더 나아가 이것이 우리 성도의 삶이어야 한다. 성도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항상 주님께 초점을 두고 살아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 삶에서 주님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애틋하게 여기고, 애지중지하는 것들을 과감히 잘라내고 도려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때문에 주님이 우리의 삶에서 선명하게 드러나지 못한 것이다. 기독교는 윤리적인 교훈이나 철학이 아니다. 삶의 방식도 아니다.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영생이고, 예수님을 거절하는 것이 멸망이라고 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그러므로 예수님을 아는 것, 곧 그 분과 친밀해 지는 것이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본문은 주님을 바로 아는 것, 그래서 바른 고백을 하는 것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흔히 본문을 제자들의 대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라고 한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제자들의 마음의 고백을 듣고 싶으셨다. 부부간에 마음을 다 알면서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해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주님께서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께서 제자들의 마음을 모르실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말로 표현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항상 말과 행동으로 표현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이것은 인류를 향한 심각한 도전이 되는 주님의 위대한 질문이다. 먼저 주님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생각을 물으셨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13).

 

그러자 제자들은 들은 대로 대답했다. ‘어떤 사람들은 세례요한이라 하고,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예레미야, 또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 중에 하나라 합니다.’(14). 이는 당시 사람들이 주님에 대하여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다. 아마 그들도 주님이 평범한 분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여기에 언급된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는 우리나라에서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처럼 그들에게 큰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특히 ‘선지자 중에 하나’ 라고 한 것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뜻한다. 아무튼 당시 사람들의 주님에 대한 생각이 다양했다는 것과, 또한 주님을 뛰어난 선자자로 여겼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주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가지각색이다. 그렇지만 주님의 기대치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저주와 사망에 이르게 한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주님을 보내셨다는 사실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데 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이냐?

관계에서 중요한 것이 고백이다. 고백에 따라 관계가 형성이 된다. 10살짜리 아들을 둔 엄마가 재혼을 했다. 이럴 경우, 어느 시점에서 새 아빠가 이 아이의 진짜 아빠가 될까? 물론 법적으로는 엄마가 재혼한 순간 아빠가 된다. 하지만 이 아이가 새 아빠에게 아빠라고 부르며 자신의 아버지인 것을 고백하는 순간 진짜 아빠가 되는 것이다. 20년을 이 아이와 함께 살아도 아빠라고 고백하지 않는 한 엄마에게 남편일지는 몰라도 아이에게 아빠일 수는 없다. 그래서 고백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고백의 내용도 중요하다. 고백의 내용이 관계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아이가 고백을 했는데, 아빠가 아니라 아저씨 혹은 삼촌이라고 했다면 어떻게 될까? 이 아이와 새 아빠의 관계는 부모자식 관계가 아니라 가까운 이웃이나 친척관계가 되는 것이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본문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관계를 확인하신 말씀이다. 이렇게 주변 사람들의 생각을 들으신 주님은 이제 제자들의 생각을 물으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5).

 

독자인 우리에게는 이미 예견된 질문이지만 제자들에게는 새삼스럽고 무척 당황스러운 질문이었을 것이다. 이는 내가 너희에게 무엇이냐는 뜻이다. 주님에 대한 제자들의 고백을 요구하신 것이다. 참으로 엄숙한 순간이었다. 잠시 동안이지만 제자들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 때, 그 침묵을 깨고 제자들을 대표하여 베드로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

 

이 한 마디의 대답이 하자 많은 인생 베드로를 제자들의 대표(수제자)가 되게 했다. 여기서처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주님께서 너무 기뻐하시면서 기가 막힌 복을 베드로에게 선언하셨다(17~19). 물론 이 선언은 단지 베드로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베드로처럼 고백한 모든 사람에게 주신 것이다. 올바른 신앙고백이 얼마나 주님께 기쁨이 되는지, 그리고 우리에게 얼마나 큰 복이 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고백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삼중(三重)직을 가진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야가 곧 주님이시라는 고백이다. 이는 주님이 나의 왕이시고, 제사장이시고, 선지자시란 고백이다. 둘째는 하나님과 동등(일)한 분이시라는 고백이다. 히브리 사상에서 ‘누구의 아들’이란 말은 본질에서의 동등(동일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주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내가 행한 일이 곧 아버지의 일이고, 아버지의 일이 곧 나의 일이다. 내가 하는 일을 통해 내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란 주님이 살아 계신 하나님과 동등(일)하신 분이시라는 고백이다. 이런 완벽한 믿음의 고백에 주님께서 크게 감동하신 것이다. 또한 복을 쏟아부어주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주님의 이 위대한 질문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중요하다고 한 것이다. 아무튼 모든 인류는 주님의 이 질문을 피해 갈 수가 없고, 반드시 이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그 대답에 따라 우리의 운명이 결정이 된다. ‘나에게 있어서 주님은 무엇인가?’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스스로 답을 해보기 바란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런 질문을 했다. ‘오늘날 신자들이 천국에 가서 주님을 만나면 어떻게 인사를 할까?’ 그리고 대답도 스스로 했다. ‘주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지적 신앙의 문제점을 꼬집는 유머다. 사실 오늘날 신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성경에 대해 참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신앙으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물론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신앙은 아니다. 신앙은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믿고 순종하는 것이다. 신앙은 주님에 대해 아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다. 주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보다 주님과 얼마나 친밀한 교제를 하고 있느냐 중요하다. 그러니 말씀만 많이 듣고 아는 데만 그치지 않고 말씀이 입으로 삶으로 고백이 되고 표현이 되어야 한다. 본문은 바로 이점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20세기 인도의 성자로 불리는 썬다 싱은 힌두교의 한 종파인 시크교도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런 그가 복음을 깨닫고 기독교로 개종을 하였다. 훗날 힌두대학의 어느 비교종교학 교수가 썬다 싱에게 물었다. ‘예전에 믿던 시크교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것을 기독교에서 발견한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은 가치를 추구하는 동물이다. 때문에 더 좋은 것, 더 새로운 것, 더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하지 않고는 이전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한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것을 발견했기에 대대로 믿어오던 신앙을 포기했느냐는 것이다. 그러자 썬다 싱이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나는 그리스도를 가졌습니다. 내가 특별히 발견한 것은 그리스도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구원해 주신 구세주를 만났다는 뜻이다. 얼마나 멋진 고백인가? 여러분은 신앙생활하면서 발견한 것이 무엇인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졌는가? 성도라면 ‘내가 너에게 무엇이냐?’는 주님의 질문과 ‘네가 기독교에서 발견한 것이 무엇이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 질문에 대한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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