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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몸으로서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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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376회 작성일 16-11-06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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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몸으로서의 교회

엡1:22,23

2016. 11/6. 11:00

교회는 몸이다.

폴 투르니에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 둘 있다. 하나는 결혼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고 했다. 교회의 공동체성을 강조한 말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홀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의 결국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홀로 떨어진 고고한 영혼은 홀로 타는 석탄과 같다. 그 불길은 이제 식는 일만 남았다. 더 이상 뜨거워지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개별적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적이다. 그래서 성도의 정체성(identity)은 개별적으로만이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정의된다. 성도의 공동체적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 ‘교회’(έκκλησία)이고, 교회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된 바울의 용어들 중에서 공동체적 성격을 가장 독특하게 표현하는 것이 ‘몸-교회론’이다. 그는 교회를 사람의 몸에 비유했다. 물론 이것은 바울의 독창적인 사상이라기보다 당시 그리스-로마사회의 정치연설에서 빌려온 것이다. 당시 그리스-로마사회에서 일치를 강조하는 정치연설에서 ‘몸-은유’(metaphor)가 많이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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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것으로 주전 5세기 메네니우스 아그리파(로마 원로원 회원)의 연설이다. 평민들이 귀족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말로 설득해서 반란을 평정한 사람이다. 이 때 그가 사용한 것이 몸 은유다. 일하지 않고 먹을 것만 받아먹는 배에 대해 몸의 각 부분이 분노했다. 그래서 손, 입, 이 등이 더 이상 음식이 배에 공급되지 않도록 파업을 했다. 그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몸 전체가 빈사상태에 빠졌다. 이 일로 몸의 다른 부분들은 배가 그저 빈둥거리며 논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배가 음식물을 소화해서 몸의 모든 부분들에 영양분을 골고루 공급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 은유를 통해 평민들이 귀족에 대해 분노한 것이 무엇과 같은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평민들이 보기엔 자신들만 뼈 빠지게 일하고 귀족들은 빈둥거리며 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귀족들도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고, 그래서 국가라고 하는 몸이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는 몸의 은유를 통해서 일치를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사회적 위계질서를 보전하려고 한 것이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다.

바울 역시 ‘몸 은유’를 롬12장과 고전12장에서 몸 은유를 사용하고 있다. 베커(J. C. Beker)는 여기서 바울이 몸 은유를 사용한 것은 교회의 일치가 위협당하고, 함께 하는 삶이 무시되고 있는 상황에서였다고 한다(당시 로마교회나 고린도교회의 상황). 바울은 여기서 우리 몸의 다양한 지체들이 서로 연합하여 일치를 이룬 것처럼 교회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의 몸 은유는 그리스-로마사회의 정치연설과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바울이 일치성과 다양성에 대한 교훈에만 관심이 있었다면 고전12:27을 “너희는 이제 한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끝을 맺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하면서 몸을 그리스도에게 연결시키고 있다. 교회는 단순한 ‘’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공동체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로마사회의 정치연설과 다른 점이다.

 

바울의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몸 교회론’은 그의 다메섹 체험과 관련이 깊다(행9:1~9). 스데반 집사의 순교 후, 교회에 대한 유대교의 박해가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그래서 교회는 각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었다(행8:2). 이 때 유대교에 대한 열심이 특별했고, 교회에 대한 분노가 극심했던 바울(사울)이 대제사장의 위임장까지 받아서 다메섹 지역의 각 회당으로 가던 중이었다. 그 때 하늘로부터 내려온 강력한 빛에 사로잡혀 그는 땅에 엎드러졌고, 그리고 한 소리를 들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9:4). 놀란 그가 당신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5)고 하셨다. 사실 바울은 예수님을 본적도 만난 적도 없고, 그러니 예수님을 박해한 적은 더더욱 없다. 단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과 교회를 박해했을 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말씀하셨다. 교회를 박해한 것이 곧 주님을 박해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주님은 교회와 주님 자신을 일치시키고 계신다. 교회가 곧 주님 자신이기 때문에 교회를 박해하는 것이 곧 주님을 박해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바울은 교회가 곧 주님의 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고, 그래서 주님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강조하게 된 것이다.

 

우린 바울이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우는데 왜 목숨을 걸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있다. 왜 그토록 바울이 교회문제에 마음을 태우며 매달렸는지를 이해할 수가 있다. 신약성서에서 바울이 기록한 책이 가장 많다. 그런데 이 모든 책들이 선교여행 중이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기록된 것들이다. 자신의 한 몸 건사하기 힘든 상황에서 편지로서 교회들의 문제에 일일이 답을 하고, 때로는 책망을 하기도 하고, 위로와 권면을 하고, 그리고 교훈을 했다. 모두가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랬던 것이다. 그토록 바울이 교회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은 이유를 우리는 알 수가 있다. 그것은 교회가 주님의 몸이기 때문이다. 교회를 세우는 것이 주님의 몸을 세우는 것이고,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주님의 몸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고, 교회를 섬겨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교회는 머리되신 주님의 몸이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를 ‘쌍둥이 서신’이라고 한다. 그만큼 내용에 있어서 두 서신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교회론도 마찬가지다. 로마서와 고린도전서에서는 단순히 ‘’에서 ‘주님의 몸’으로 발전시켰는데,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는 ‘머리되신 주님의 몸’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고, 그 몸의 머리는 주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중심적인 교회론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머리’(κεφαλη)는 여러 가지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원천’ 혹은 ‘근원’, 그리고 ‘권위’의 상징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고 한 것은 주님이 교회의 ‘생명의 원천’(근원)이시고, 교회의 ‘주인’이시라는 것이다. 물론 지상에 있는 교회들이 많은 한계와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교회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인가를 잘 보여준다.

 

또한 고린도 전서에서는 머리를 몸의 여러 지체들 중의 한 지체로 나타내고 있는데(12;21), 본문에서는 머리를 그리스도(22)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일 뿐만 아니라 몸(인 교회)의 구원자라고 했다(5:23). 머리를 몸의 한 지체, 곧 몸의 한 부분에 포함시킨 것이 아니라 몸의 구원자로, 몸의 주인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렇게 한 이유는 교회가 철저히 그리스도에게만 속한다는 것(배타적인 소속성), 교회는 머리이신 주님께 철저하게 의존된 존재라는 것(의존성)을 강조하기 위해다. 아울러 머리와 몸의 관계처럼 주님과 교회의 친밀감을 강조한 것이기도 하다(친밀성). 세상에 존재하는 관계 가운데 머리와 몸만큼 친밀하고 민감한 결합이 없다. 어떤 한 사람을 머리와 몸으로 구분을 해서 다르게 보는 경우는 없다. 그러므로 머리 없는 몸이 존재할 수 없듯이 주님이 없는 교회는 존재할 수가 없다. 그리고 몸이 머리의 지배를 받고 의존되어 있는 것처럼 교회 또한 주님의 지배를 받으며, 주님께 의존된 존재인 것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사랑, 주님사랑

미국의 어느 신자 이야기다. 비행기를 탔는데, 옆 자리에 앉은 사람이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었다. 자신도 신자라 반가워서 그 사람의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기도가 끝나자 말을 건넸다. ‘교회를 다니신 모양이죠? 열심히 기도드리는 모습이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아니요. 저는 교회를 다니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그렇게 기도를 드린 것입니까?’ ‘제가 믿는 사단에게 이번 한 주간동안 기독교회 30곳이 혼란에 빠지거나 무너지도록 기도드렸습니다.’ 그는 그 사람이 교회의 파괴를 위해 사단에게 정말 진지하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모습에 놀랐다고 한다.

 

참으로 섬뜩한 이야기다. 사실 사단의 지배하에 있는 세상은 교회에 대하여 호의적이지 않다. 사단은 교회의 비밀을 알기에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거나 무너뜨리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다(우리 사회에서도 보라!). 먹잇감을 찾고 있는 굶주린 사자처럼 사단은 무너뜨릴 교회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해야겠는가? 공격이 최선의 수비라고 했다. 바울처럼 교회의 본질을 알고, 교회를 뜨겁게 사랑하고, 세우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주님이 머리시고, 주님의 몸인 이 영광스러운 교회의 지체인 것을 기억하며 이 생명 다하기까지 늘 사랑하고, 늘 봉사하고, 늘 섬겨야 할 것이다. 교회 사랑이 주님 사랑이고, 주님 사랑은 교회 사랑으로 드러난다.

 

내 손과 혀가 굳어도 내 몸의 피가 식어도

나 영영 잊지 못할 곳 은혜의 보좌 주의 전

                                            -찬송가 209장 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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