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위한 참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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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386회 작성일 16-11-20 13:06본문
세상을 위한 참 빛
요1:1~14
2016. 11/20. 11:00
보석도 빛이 있어야 빛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석을 좋아한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보석을 좋아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름다움’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보석 자체의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그것을 가진 사람도 아름답게 해준 것이 보석이다. 그런데 눈부시게 아름다운 보석도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는 빛날 수가 없다. 빛이 있어야 그 아름다움을 뽐낼 수가 있다. 지금까지 세상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는 1905년 남아프리카에서 캐낸 3,106캐럿(621g=0.2g×3,106c)짜리 다이아몬드라고 한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오래됐고, 값비싼 다이아몬드는 현재 영국왕실의 왕관에 세팅이 되어 있는 ‘코이누르’(Kohinoor/ mountain of light)라고 한다. 얼마나 귀한지 그 값을 매길 수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귀중한 다이아몬드도 빛이 있어야 빛이 나고, 그래야 그 가치를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꽃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빛이 없으면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지 못한다. 빛이 없으면 빛깔(색)이 없기 때문이다. 사진을 찍어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물리학이나 광학(光學)에서는 어둠을 ‘비존재’라고 한다. 빛이 없으면 존재도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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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단풍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비가 갠 다음 잠시 교회 뒷산을 다녀왔다. 말 그대로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사실 우리나라는 특히 가을이면 특별한 곳이 아니라도 아름답지 않는 곳이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특별한 선물이다. 나에게 볼 수 있는 눈이 있고, 그래서 이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했다.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눈보다 빛이 더 감사한 것이다. 눈이 있어도 빛이 없으면 이 아름다운 세상,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관광버스에서 가이드가 설악산이 처음인 외국 관광객에게 천불동 계곡의 절경에 대하여 침이 마르도록 설명을 했다. 마침내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지만 관광객은 기대했던 경치를 볼 수가 없었다. 왜 그랬을까? 버스가 도착한 시간이 어두운 밤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날이 밝아오자 눈앞에 드러나기 시작하는 경치에 관광객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때야 비로소 그들은 가이드의 말을 실감하게 되었다. 시력이 아무리 좋고, 주변 경관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빛이 없으면 볼 수가 없다. 그러니 빛이 얼마나 소중한 지 알 수 있다. 이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빛이 있으라!
창세기는 창조되기 전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창1:2). 여기에 나온 ‘혼돈’, ‘공허’, ‘흑암’, ‘깊음’이란 단어들의 전체적인 이미지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인 무질서한 상태를 뜻한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것을 빛이 없는 세상, 빛이 없는 인생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고’ 있었다. 이 또한 하나님의 다스리심 속에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운행하다’는 히브리어로 ‘락하프’(רחף)인데, ‘알을 품다’는 뜻이 있다. 알을 품는다는 것은 분명한 목적과 의지가 있는 행위를 뜻한다. 즉 새로운 역사를 탄생시키려는 하나님의 거룩한 행동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행동이 이어서 나오는 구체적인 하나님의 창조행위이다. 그리고 그 창조행위의 첫 번째가 빛의 창조다(:3). 빛의 창조와 함께 혼돈도, 공허도, 흑암도, 깊음도 사라졌다.
그런데 본문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과 깊음을 사라지게 했던 그 빛이 예수님이시라고 말씀하고 있다(4,9). 이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하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다. 창세기에서 빛의 반대로 언급했던 혼돈과 공허와 흑암과 깊음을 본문에서는 ‘어둠’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하고 있다. 성경에서 흔히 이 어둠은 ‘죄, 죽음, 절망, 악의 세력, 영적 무지’를 뜻한다. 그러므로 주님이 이 어둠을 몰라내는 빛이시라는 것은, 주님이 곧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신 ‘용서의 빛’이시라는 것이다. 아무리 사소한 죄라도 우리에게는 이것을 스스로 해결할 힘이 없다. 오직 주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용서의 빛으로 오셨다. 그리고 죽어가는 모든 것들을 다시 살아나게 하시는 ‘생명의 빛’, 모든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신 ‘소망의 빛’, 영적인 무지를 넘어 참 진리에 이르게 하는 ‘진리의 빛’이시다. 이외에도 살아 있는 동안 우리의 가장 큰 근심거리인 모든 질병을 해결해 주시는 ‘치료의 빛’이 주님이시다. 이런 빛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셨다. 그리고 우리는 세례요한처럼 그 빛을 증언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이다(6~8). 그 빛(The Light)을 위한 빛(a light)인 것이다. 이것이 성도의 사명이고, 교회의 사명인 것이다.
눈이 먼 물고기미국 테네시 주에는 ‘로스트 씨’(lost sea)라는 유명한 관광명소가 있다. ‘잃어버린 바다’라는 뜻이다. 잃어버린 바다는 미국 최대의 지하호수인데, 300피트(92m) 정도 지하로 내려가야 볼 수 있다. 좁은 동굴의 입구를 따라 한참을 내려가면 깊은 굴 안에서 큰 호수가 나타난다. 깊은 땅속에 큰 호수가 있는 것도 신기하지만 더 신기한 것은 그 호수 속에 살고 있는 물고기들이다. 그 물고들이 모두 ‘눈이 멀었다는 것’이다. 빛이 없는 캄캄한 동굴의 호수에서 살다보니 눈이 점점 퇴화되어 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비극이 잃어버린 바다의 물고기들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도 영적인 눈이 점점 퇴화되어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본문이 이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4~5).
빛이 어두움에 비추었지만 어두움이 빛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빛에 대해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두움 속에 너무 오래 노출이 되다보니 영적인 눈이 그 기능을 상실해서 버린 것이다. 그래서 영적으로 눈이 먼 것이다. 그러니까 빛이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고, 심지어 주님을 거부했다. 그래서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마13:13)이라고 하셨다. 자신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어둠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이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 그리고 진정으로 찾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것이 가장 소중한 것인지 알지 못하고, 그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이런 것들만 쫓아 바쁘게 살고 있는 사람은 지하 동굴 속 캄캄한 호수에서 헤엄치며 살고 있는 눈먼 물고기와 같다. 아무리 오래 교회를 다녔어도, 아무리 오랫동안 믿었어도, 빛이신 주님이 마음속에 함께 사는 경험이 없다면, 주님의 그 환한 빛에 자신을 비추어보지 못했다면, 그리고 그 빛 속에서 즐거워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빛이 일으키는 변화를 체험하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종교생활에만 안주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빛을 가지지 못한 영적으로 눈이 먼 사람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위해 오셨다는 사실이다.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하시려’(요9:39)고 오셨다. 퇴화된 눈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려고 오셨다. 눈을 떴지만 소경인 사람들, 눈으로 보지만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진정한 눈을 뜨게 해주시려고 오셨다. 그래서 본문은 빛이신 주님을 영접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2).
주광성(走光性) 성도가 되자!
‘주광성’이란 말이 있다. 빛을 향해서 행동하는 성질을 말한다. 대부분의 식물과 나방류는 주광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빛을 향한 그들의 성향은 참으로 놀랍다. 주광성을 가진 식물은 햇볕을 향해 이파리를 향하고 가지를 굽힌다. 아무리 큰 바위 밑이나 돌밭에 깔려있어도 빛을 향해 뻗어간다. 나방도 밤에 불을 켜두면 멀리서도 불빛으로 몰려든다. 4Km나 되는 먼 거리에서도 불빛을 감지하고 그 불빛을 향해 달려온다고 한다. 심지어는 불속으로 자신의 몸을 던져버리는 놈들도 있다.
사람에게도 빛을 찾는 염원(念願)이 있다. 빛을 향하는 이런 마음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이……사람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3:11).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곧 빛을 찾는 염원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이 아름다운 염원이 ‘재물이라는, 명예라는, 부귀라는, 쾌락이라는’ 세속의 먼지로 너무 두껍게 쌓여 무디어져버린 것이다. 그래서 눈이 멀어버린 물고기들처럼, 먼지에 덮여 방전되어버린 배터리처럼 빛을 찾는 염원도 사라져버린 것이다. 신앙생활은 이런 세속의 먼지를 털어내는 일이다. 주님의 말씀으로, 기도로, 찬송으로, 예배로 닦아내고, 씻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빛이 우리 영혼 깊숙이 비추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영적 주광성 성도가 되는 것이다. 주님은 빛이시다. 주님은 우리의 빛이시다. 사랑의 햇살로 다가오시는 주님의 빛은 우리의 가슴을 치료하고도 남을 만큼 따뜻하게 흘러넘친다. 진리의 빛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의 빛은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을 만큼 힘이 있다. 생명의 빛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의 빛은 우리의 속사람을 완전하게 하여 빛 속에서 계속 자라나도록 한다. 소망의 빛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의 빛은 우리의 모든 절망을 가능성으로 바꾸신다. 우리 가슴속에 들어온 주님의 빛은 우리를 치유하여 빛의 사람으로 만들고, 입을 열어도 빛의 소리, 손을 벌려도 빛의 행동이 나와 영혼을 살리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빛이신 주님을 향해 돌격(突擊)하는 성도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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