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출정(出征) 선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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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754회 작성일 16-12-11 12:59본문
주님의 출정(出征) 선언문
눅4:16~23
2016. 12/11. 11:00(대강절Ⅲ)
너 나 보이니?
얼마 전(2016,8/27)에 소천한 코미디언 구봉서 장로의 일화다. 어느 목사님이 구봉서 장로님과 함께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고 한다. 비행기에서 이 목사님이 자꾸 조니까 구봉서 장로님이 ‘목사님 제가 성경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라고 하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뭐라고 말씀하신 줄 아십니까?’고 물었다. 목사에게 이 정도 질문은 식은 죽 먹기다. 그래서 목사님이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했다고 했더니, 아니라고 하면서 ‘너희들 나 보이니?’ 라고 하셨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함께 웃으면서 즐겁게 여행을 했다고 한다. 우스갯소리지만 그냥 웃어넘기기엔 너무 심각한 이야기인 것 같다. 당장 주님께서 나에게 ‘너 나 보이니?’, ‘너 내 말 들려?’ 라고 물으시면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여러분은 지금 주님이 보이는가?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가? 세상 것들은 놓치지 않고 속속들이 잘 보고, 잘 들으면서 생명과 영광의 주님은 보지 못하고, 그 음성은 듣지 못한 것이 지금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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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로 다케시는 현대인은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바보의 벽에 갇혔다.’고 했다. 우리 또한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바보의 벽에 갇힌 것은 아닐까? 그래서 진짜 들어야 하고, 보아야 할 것을 놓치고 있지는 않는지 모르겠다. 본문에도 눈먼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은 주님의 고향 갈릴리 나사렛 사람들이다. 그들은 주님을 자신들이 잘 알고 있는 목수 요셉의 아들로만 보았지 하나님께서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메시야로는 보지 못했다. 이유는 그들의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메시야이신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귀가 막혔기 때문이다. 이는 주님께서 가시는 사역의 길이 평탄하지 않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나사렛 사람들 뿐만 아니라 유대인 전체가 그랬다. 그래서 주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만든 것이다.
주님의 사역 출정식
요즈음 소위 촛불정국이 계속되면서 헌법 제1조를 구호처럼 외치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가와 국민의 정체성을 명쾌하게 정의하고 있는 법조항이다. 아마도 비선실세에 의한 말도 안되는 국정농단사건으로 인해 훼손된 국가와 국민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기 위한 외침이라 생각한다. 본문은 주님의 정체성과 사역의 방향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다. 즉 주님의 존재선언이고, 사역의 방향성에 대한 말씀이다. 주님에 대한 헌법 제1조와 같은 말씀이라는 뜻이다. 주님은 사역을 시작하기에 앞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눅3:21~22),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시면서 마귀에게 세 번의 시험을 받으셨다(4:1~13), 그리고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으로 사역의 시작을 선언하셨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병사들이 전쟁터로 나가기에 앞서 행하는 출정식(出征式)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본문은 출정에 앞서 선포하는 선언문과 같다.
희년을 가지고 오신 분
먼저, 본문은 주님의 존재선언이다. 주님이 누구신지, 어떤 존재이신지를 선포하셨다. 본문과 같은 내용이 마11장(2~5)과 눅7장(18~23)에도 나온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배경과 대상(마11장과 눅7장은 요한이 보낸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은 달라도 메시지는 같다. 세 곳 모두 ‘예수님이 누구시냐?’가 핵심이다. 사실 이것은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절대로 놓쳐서는 안될 질문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신자와 불신자가 바로 여기서 갈린다. 주님께서 사역을 시작하는 이 엄중한 순간에, 그리고 주님의 선구자 세례요한이 죽음을 앞에 두고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물어왔을 때, 이에 대한 대답으로 주님은 이사야의 말씀(61:1~2)을 인용하셨다. 이는 모든 유대인이 메시야에 대한 약속의 말씀으로 이해하는 대표적인 구절이다.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이 말씀을 찾아 읽으신 것이다(17,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주님은 이 말씀을 읽고 난 후, 사람들에게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21)고 하셨다. 이사야가 예언한 그분이 그들이 눈으로 보고 있는 ‘주님 자신’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야이시고, 탄생하실 때 천사들이 증언했던 ‘(만민의) 구주’(눅2:11)이신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이다. 본문의 표현대로 하면 주님은 ‘은혜의 해를 전파하신 분’, 곧 희년을 가지고 오신 분이시다(19). 이것이 ‘당신이 누구십니까?’에 대한 주님의 대답이다.
여기서 희년(year of jubilee)은 레위기에 나온 50년(일곱 번째 안식년의 다음 해)을 주기로 돌아오는, 모든 것이 원상회복되는 자유와 해방의 해다(25:8~22). 잃었던 기업이 회복되고, 모든 부채가 탕감되고, 팔렸던 사람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오는 해다. 아무런 대가를 치루지 않고 그냥 주어어지기 때문에 ‘은혜의 해’라고도 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런 희년을 가지고 오신 분이고, 또한 주님 자신이 희년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믿음으로 잃었던 천국의 기업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분도 회복하고, 모든 허물과 죄로부터 자유롭게 된 것이다. 주님은 이 위대한 선언을 평소 다니시던 고향 회당에서, 고향 사람들에게 선포하셨다. 그런데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주님을 알아보지도 못했다. 오히려 화를 내면서 동네 밖으로 쫓아내서 낭떠러지로 끌고 가 밀쳐 떨어뜨리려고 했다(28,29).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그런데 본문은 이와 같은 은혜의 해(희년) 대상이 ‘가난한 자’라고 한다. “주의 성령이 네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18a). 이와 같은 주님의 선언을 두고 어떤 사람은 ‘거룩한 차별의 실천’이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이것은 차별의 실천이 아니라 사역의 ‘방향성’, 혹은 사역의 ‘우선순위’(참고, 행1:8)에 대한 말씀이다. 실제로 주님의 사역이 이런 방향으로 진행되었던 것을 복음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주님은 사역의 중심지를 수도 예루살렘이 아니라 변방 갈릴리로 삼은 것부터가 그렇다. 제자도 예루살렘 중심의 엘리트가 아니라 갈릴리 호수를 기반으로 살아가는 어부를 선택했다. 그리고 사회적 제도로부터 보호를 받은 ‘백성’(λαος)보다는 이런 제도적 장치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 ‘무리’(οχλος), 곧 본문에 나온 포로된 자, 눈 먼 자, 눌린 자를 비롯한 세리나 창기와 같은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어울렸다. 그들에게 천국의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치고 섬기셨다. 나처럼 든 것도, 아는 것도, 가진 것도 없는 별 볼일 없는 자가 희년의 복을 누리게 된 것은 이와 같은 주님의 선교 방향성 때문이다.
가난한 자란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면 왜 주님께서 사역의 방향을 그들에게 두셨는지 알 수가 있다. 여기서 ‘가난한 자’를 히브리어로 ‘아나임’(אנעים)이라고 한다. 아나임은 ①부자나 권력자의 수탈과 사회적 억압에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스스로를 구제할 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는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을 솔직히 시인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을 뜻한다. 그리고 ②삶의 여러 시련과 고통을 통해 부서지고 낮아져서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 또한 ③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열어놓은 사람을 가리킨다. 이런 사람이 아나임, 곧 ‘가난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만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은 사람,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활짝 열어놓은 수용적인 사람이 주님 사역의 우선 대상이 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라야 주님께서 가져오신 희년의 은혜를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지난주일 말씀드린 사가랴 부부를 비롯하여 누가복음에는 이렇게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특히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는 좋은 예다(눅18:9~14).
stay hungry
앞에서 요로 다케시의 ‘바보의 벽’에 대해서 잠시 언급을 했다. 인지 심리학자들은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한다. 사람은 수많은 정보가 제공되어도 결국은 자신이 좋아하고 관심을 갖는 것만 선택적으로 갖게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여러 장해요인이 발생해도 자신이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 보고 듣는다는 것이다(이를 ‘칵테일 효과’라고 함).
이것을 일상에서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뜻을 깨닫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에 적용할 수 있다. 그것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 하고, 주님의 마음(뜻)을 알고 싶어 하고, 주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향해 가난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주님의 사랑에 목마르고, 주님의 은혜에 목마르고, 무엇보다도 주님께 대한 목마름을 갖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주님의 뜻을 알 수 있고, 주님을 만날 수가 있다. 문제는 듣고 싶고, 알고 싶고,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이다. 본문은 주님이 어떤 분이시고, 주님의 사역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 것인가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동시에 주님이 가져오신 희년의 은혜를 어떤 사람이 누릴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어떻게 하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해 배척했던 주님의 고향 사람들처럼 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것은 오직 주님만 의지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은 사람,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 수용적인 태도를 가진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즉 사랑하고 사모하는 마음, 어리석고 부족한 절망적인 자기 자신을 생각하며 항상 갈망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오늘은 강림절 셋째주일이다. ‘stay hungry, stay foolish’의 태도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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