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뜨겁지 않더냐!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216회 작성일 16-03-27 13:20본문
마음이 뜨겁지 않더냐!
눅24:13~35
2016. 3/27(부활주일)
엠마오 도상의 그리스도
렘브란트라는 화가가 있다. 그의 그림 중에 ‘탕자의 귀향’이란 작품이 유명한데, 그 유명한 진품(眞品)이 러시아 뻬쩨르브르그 겨울궁정에 소장되어 있다. 저는 이 그림을 세 번이나 보는 영광을 가졌다. 헨리 나우웬은 3일 동안 이 그림만 묵상한 다음 「탕자의 귀향」이란 책을 썼고,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 렘브란트는 그림을 그려 많은 돈을 벌었고,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하루아침에 그 행복이 깨지고 말았다. 이유는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이었다. 그는 그날로 붓을 꺾고, 그림을 포기한 채 절망의 나날을 보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그 절망 가운데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소망을 가지고 다시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때 그린 그림이 오늘 본문을 소제로 한 ‘엠마오 도상의 그리스도’다.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두 제자의 모습에서 절망 가운데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또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회복된 제자들의 모습에서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절망의 그림자를 떨쳐버리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이 그림의 값을 물어볼 때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아내의 죽음을 통해 주님을 만났고 생명이 무엇인지 깨달아 그린 그림이니 값을 칠 수 없다.’ 그는 풍요롭고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할 때는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 반면 아내를 잃고 허무와 좌절의 길목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 그리고 절망에서 소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화려한 부활을 했다. 오늘은 렘브란트에게 소망과 생명을 주신 주님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날이다. 부활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다. 부활은 역사적인 사건이고, 죽음이라는 실제적인 세력을 깨뜨린 능력이다. 그래서 성경은 부활을 기념이 아니라 체험해야 할 내용이라고 말씀한다. 과거에 있었던 사건으로서 기념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 내 속에서 지금도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을 체험하라는 것이다. 렘브란트처럼 지금 내 삶에서 생명으로, 소망으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부활의 주님을 경험하라는 것이다. 이 부활절에 주님의 부활이 실제적인 사건으로 우리의 삶에서 체험되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우리 안에 시들어가는 것들이 새롭게 되고, 죽어가는 것들이 다시 살아나고, 절망과 좌절과 슬픔의 그림자가 모두 사라지기를 바란다.
엠마오로 가는 길
본문에 얼굴에는 수심이, 마음엔 절망이, 몸은 피곤에 지친 두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다. 그들은 청운의 꿈을 품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는데, 너무 허망하게도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자 실의에 젖어 고향 엠마오로 돌아가고 있는 길이다. 사람들은 이 엠마오로 가는 길을 우리 인생길에 비유한다. 자신이 믿었던 것들이 일순간에 무너진 사람, 그치지 않는 상실감에 몸부림치는 사람, 직장을 잃고,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가장 절실한 건강을 잃고, 삶의 끈인 꿈을 잃고 끝없는 상실감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모인 곳, 이와 같은 생의 고비가 있는 곳이 엠마오라는 것이다. 주님의 두 제자가 답답하고 무겁고 한스러운 대화를 끝없이 이어가며 이 길을 걷고 있었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보이지 않는 동행자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난 것은 주님이 부활하신 바로 ‘그 날’(13)이었다. 주님께서 처형되신 다음 날이 안식일이라 여행을 할 수 없으니 예루살렘에 머물렀다가 안식일 다음 날, 곧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 서둘러 예루살렘을 떠난 것이다. 그들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나누며 길을 걷고 있는데(14), 불현 듯 한 사람이 나타나 함께 동행을 하게 되었다. 그 분은 부활하신 주님이셨다(15). 하지만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분이 주님인 줄 알아보지 못했다.’(16). 여기서 ‘눈이 가리어졌다.’는 것은 신령한 것과 신령한 세계를 보는 ‘영적인 눈이 어두워졌다.’는 뜻이다. 영적으로 민감하지 못하고 무뎌졌다는 뜻이다. 그래서 동행하는 분이 부활하신 주님인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깨닫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이미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목격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22~24). 그렇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25). 때문에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낙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또한 그들의 마음이 영적으로 민감하지 못하고 둔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의 눈이 가리어졌을까? ‘가리어져’(εκρατουντο) 라는 단어의 의미를 추적해 보면 알 수 있다. 이는 헬라어로 ‘크라테오’(κρατεω)라는 동사의 미완료 수동태인데, 무언가에 계속 ‘붙잡혀 있다.’, ‘고정되어 있다.’는 뜻이다. 무언가에 시선이 붙잡히거나 고정되어 있으면 봐도 건성으로 보게 된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초점주의’(focalism)라고 한다. 눈앞에서 벌어진 특정한 사건에 과도하게 집착하다보면 그것을 과대평가하게 되고, 그 밖의 사건이나 현상을 무시하는 심리를 말한다. 지금 제자들이 그랬다. 그들은 지금 주님의 죽으심에만 집착하고 있었다. 그들은 주님이 로마의 지배에서 자기 나라를 해방시키고, 주님을 따른 자신들도 영화를 누릴 것을 기대했다. 21절에, 이러한 주님에 대한 그들의 이해와 기대가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주님이 너무 무기력하고 허망하게 죽으신 것이다. 그들은 이와 같은 주님의 죽으심에만 집중하다보니 주님의 부활을 목격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자신들과 함께 길을 걷고 있는 부활의 주님도 보이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일상에서 주님이 함께 하심을 경험하는 비결이 여기에 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제자들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주님은 그들을 찾아오셨고, 그들과 동행하셨고, 그들의 말을 들으셨고, 그들에게 말씀을 풀어서 가르쳐주셨다는 사실이다. 흔히 우리는 자기 눈에 보이지 않고, 자기 귀에 들리지 않고, 자신이 깨닫지 못하면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본문은 이런 우리의 태도가 잘못됐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주님은 보이지 않아도 늘 우리와 함께하시고, 들리지 않아도 늘 말씀하시고, 깨닫지 못해도 늘 같이 계신다. 주님은 우리 인생길에서 보이지 않는 동행자시다.
눈이 밝아져
해질녘이 되어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런데 주님은 길을 더 가려고 하셨다. 그들은 주님께 함께 머물기를 청했고, 주님은 그들과 함께 머물기로 하셨다. 음식을 잡수실 때 주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셨다(이를 성찬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평범한 유대인 가정의 식사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다. 하지만 주님은 더 이상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셨다. 본문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눈이 가리어진 상태에서는 주님이 함께 동행을 해도 알아보지 못했지만 눈이 밝아지자 주님을 보게 된 것이다. 이것은 영적인 시각이 열린 것을 뜻한다. 성경은 참 재밌다. 똑같이 눈이 밝아졌는데, 아담과 하와는 그 눈으로 자신들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았다. 자신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되었다. 신령한 눈이 밝아지면 주님이 보이고, 주님이 계신 천국이 보이고, 영원한 가치들이 보인다. 반대로 육신의 눈, 죄의 눈이 밝아지면 세상 것들이 보이고, 세속적인 가치들이 보인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눈이 언제 어떻게 밝아졌느냐 하는 것이다. 본문은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 떡을 가지고 축사한 다음 떼어 그들에게 주실 때 눈이 밝아졌다.’(30,31)고 했다. 여기서 ‘밝아져’는 헬라어 ‘디아노이고’(διανοιγω)라는 동사의 단순과거 수동태로, ‘누군가 혹은 어떤 힘에 의해 한순간에 눈이 열려서 보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32절,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에서 ‘풀어주다’는 단어도 ‘디아노이고’이다. 이는 그들이 주님을 통해 말씀을 들을 때 그들의 마음이 열렸다는 뜻이다. 그래서 말씀을 듣는 동안 계속해서 ‘마음이 뜨겁게 타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는 마음이 회복되었다는 뜻이다. 말씀을 들으니까 마음이 열려 마음이 회복되고, 기도하니까 눈이 열려 주님이 보이게 된 것이다. 그렇다. 마음이 열리면 눈도 열리게 된다. 때문에 주님은 말씀으로 먼저 얼어붙은 그들의 마음을 열어 뜨겁게 타오르도록 회복시킨 다음 기도로 가리어진 눈을 열어 부활의 주님을 볼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이렇게 회복된 그들은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33). 그들의 마음이 변하고, 시각이 변하고, 이제 행동까지 변했다는 뜻이다. 여기서 ‘예루살렘’은 부활의 현장, 선교의 현장, 사명의 현장이다. 그들은 실망하고 낙심하여 부활의 현장, 선교의 현장, 사명의 현상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는데, 부활의 주님을 만나 다시 회복되었다는 뜻이다. 본문의 두 제자는 우리의 모습이다.
불신의 안개를 뚫고 오신 주님
스티븐 킹이라는 유명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미스트」(The Mist)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는 미국의 롱레이크라는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마을 근처에 주둔하고 있는 군부대가 비밀실험을 하다가 실수로 다른 차원에 있는 괴물을 불러내는 대참사가 일어난다. 마을에는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자욱한 안개(미스트)가 끼고, 안개 속에서 정체불명의 괴생물체가 튀어나와 사람들을 마구 공격하고 죽인다. 주인공은 가까스로 아들과 함께 차에 올라타 탈출을 시도한다. 그러나 얼마 못가 차에 기름이 떨어지고 만다. 절망한 주인공은 권총으로 아들을 먼저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려고 한다. 바로 그 때, 안개가 걷히면서 엄청나게 많은 해병대 병력이 마을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 모습을 본 아버지는 망연자실한다. 이 영화에서 아버지는 왜 아들을 잃게 되었을까? 짙은 안개 속에서 희망을 잃었기 때문이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불신이란 안개, 절망이란 안개 속에서 믿음과 소망을 잃고 방황했다. 때문에 그들은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셨지만 알아보지 못했고, 말씀하셨지만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안개를 뚫고 오신 부활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 부활의 날에 불신의 안개가 걷히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