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그 이름, ‘임마누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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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532회 작성일 15-12-20 13:08본문
희망의 그 이름, ‘임마누엘’
사7:10~14
2015. 12/20. 08:00, 11:00(대강절 넷째 주일)
지라니 합창단(Jirani Children's Choir)
케냐 수도 나이로비 서쪽에 위치한 단도라 지역의 ‘고로고초’(스와힐리어로 ‘쓰레기’라는 뜻)라는 마을은 세계 3대 빈곤지역 중 하나다. 고로고초는 이름처럼 나이로비 사람들이 실컷 먹고 버린 매일 수십 톤씩 쏟아지는 쓰레기를 소각하거나 하치하는 곳이다. 이곳에 사는 10만 여 명의 사람들은 이 쓰레기 더미를 뒤지며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이곳에서 태어나면 굶어 죽거나, 병들어 죽거나, 술과 마약에 취해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들에 대한 대책은 세우지도 않고 방관한 채 강제철거만을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정부조차 버린 이곳을 한국인 목사 한 명과 지휘자 한 명이 찾아갔다. 그리고 태어나서 한 번도 악보를 본 적도 없고, 노래를 배운 적도 없는 아이들을 모아 합창단을 만들었다. 이것이 ‘지라니 어린이 합창단’이다(지라니는 ‘이웃’이란 뜻). 이후, 이 마을에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버림받은 절망의 땅 쓰레기 마을에 희망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꿈을 꿀 수조차 없었던 아이들이 꿈을 가지게 되었다. 하루 종일 쓰레기장을 배회하던 아이들이 하루 4시간씩 노래연습을 하고, 폭력과 마약에 노출된 채 매일 생존과 싸움하던 아이들이 세계 각 곳으로 공연을 다니며 희망을 노래하는 희망의 전도사가 되었다. 이와 같은 아이들의 아름다운 변화와 감동적인 일상을 신미식 씨가 「지라니 합창단, 희망을 노래하다」라는 제목의 포토 에세이집을 펴냈다. 글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아무도 희망을 발견할 수 없었던 곳에서, 도저히 노래가 들려올 것 같지 않은 쓰레기 더미에서 노래가 들려올 때 희망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 어떤 절망적인 곳도 희망의 샘이 솟고, 희망의 강이 흐르면 그곳은 낙토(樂土)가 된다. 즐거운 땅, 희망의 땅이 된다. 절망의 먹구름이 짙게 드리운 쓰레기 더미에서도 아름다운 희망의 꽃이 피고, 희망의 노래가 울려 퍼지게 된다. 쓰레기(고로고초) 마을의 지라니 합창단이 그 좋은 모델이다.
희망의 중요성
희망은 우리의 일상에서 더 나은 미래가 올 것이라는 시각을 심어 현재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가도록 도와주는 힘이다. 학생들이 밤늦도록 책상 앞에 앉아 공부를 하는 것도, 농부가 힘겹게 논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는 것도, 어부가 거친 파도와 싸우며 매일 새벽 바다로 나가는 것도, 기업가가 새로운 사업에 투자를 하는 것도 모두가 희망 때문이다. 그래서 희망을 생명의 싹을 틔우는 가능성의 씨앗이라고 한다. 수많은 불만족 사이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꽃이라고도 한다.
히브리어로 희망을 ‘티크바’(תקוה)라고 한다. 이는 실을 꼬아서 무거운 짐을 매달 수 있는 튼튼한 줄을 만든다는 뜻의 ‘카바’(קוה)라는 동사에서 왔다. 그래서 티크바를 ‘밧줄’(수2:18,21)이라고 한다. 이는 희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한 가닥의 줄에 의지해서 절벽을 오르는 사람, 구명줄을 붙잡고 애타게 구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을 상상하면 희망의 특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꽉 붙잡아야 할 줄과 같은 것이 희망이라는 것이다. 절벽에서 줄을 놓치면 생명이 끝장나는 것처럼 희망을 잃은 인생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의 삶에서 희망이 얼마나 절실하고 중요한지를 이 단어가 잘 보여준다. 또한 희망을 ‘야할’(יחל)이라고도 한다. 이는 ‘몸부림치는’ 희망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희망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줄을 붙잡고 집요하게 버티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꽉 붙잡고 절대로 놓지 말아야 할 줄, 우리에게 희망의 근거가 되는 줄은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그것이 종교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철학이라, 혹은 과학이라, 기술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힘이라, 지식이라, 혹은 건강이라, 재물이라고도 한다. 물론 이런 것들이 줄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가 절대로 놓쳐서는 안될 희망의 근거가 되는 줄은 아니다. 그 줄은 ‘약속의 말씀’이다(수2:21 참고).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결코 없어지지 않는’(마5:18) 하나님의 말씀, ‘세세토록 있는’(벧전1:25)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더 나아가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이시고,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이다.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끝까지 붙잡고 몸부림을 치는 사람에게 참된 희망이 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본문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것(‘썩은 동아줄’)을 붙잡고 있다가 자신과 자신의 나라를 위기로 몰아넣은 왕의 이야기다.
희망이 없는 나라
본문은 유다의 왕 아하스 시대(주전 735~720년)에 주어진 말씀이다. 아하스 시대는 정치적 종교적으로 매우 암울한 시대, 희망이 사라진 시대였다. 신흥 강대국 앗수르가 그 세력을 확장하여 남쪽의 바벨론을 점령하고 나서 서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이스라엘과 아람이 벌벌 떨었다. 그래서 그들은 앗수르를 막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유다도 그 동맹에 참여하도록 했다. 그러나 아하스가 이를 거절하자 이스라엘과 아람 연합군이 유다를 공격하였다(1). 그래서 12만 명이 살육을 당하고, 약 20만 명이 포로로 잡혀갔다(대하28:6,8). 상황이 이렇다보니, 왕(아하스)의 마음과 백성의 마음이 바람에 흔들리는 숲처럼 요동을 쳤다(2). 극심한 두려움에 떨었다는 것이다. 아하스는 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사자(선지자 이사야)를 찾지 않고 앗수르 왕(디글랏 빌레셋 3세)을 찾아갔다. 그에게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모든 은금을 바치면서 충성을 맹세하고 도움을 청했다(왕하16:8). 그리고 앗수르가 섬기는 신을 수입하여 섬기고, 그 제단을 예루살렘 성전 앞에다 세우고, 거기에 분향을 하였다(왕하16:10~14). 심지어는 자기 아들을 제물로 드리기까지 하는 악행을 저질렀다(왕하16:3). 외세를 막기 위해 외세를 의지하고, 그들이 섬기는 신까지 섬기게 된 것이다. 이것이 아하스 시대의 모습이다.
이런 아하스에게 선지자 이사야는 두 가지를 말했다. ①그가 두려워하는 이스라엘과 아람의 연합군은 결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4)고 하였다. 한 마디로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 안에 있지 아니하면 문제가 항상 크게 보인다. 그래서 그 문제가 우리를 압도하여 두렵게 하고 낙심하게 한다. 그렇지만 믿음 안에 굳게 서면 문제가 문제 되지를 않는다.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②하나님을 굳게 믿고 의지하라는 것이다.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9). 이스라엘과 아람 연합군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앗수르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하스는 이사야의 이 충고를 듣지 않고 앗수르를 의지하였다. 그것이 썩은 동아줄인줄도 모르고 자신이 붙잡아야 할 희망의 줄로 여긴 것이다.
앞에서 희망을 밧줄이라고 했다. 그 줄을 붙잡고 집요하게 버티는 것이 희망이라고 했다. 그리고 집요하게 붙잡고 버텨야할 줄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다. 이것이 참된 희망의 근거라고 했다. 그런데 아하스는 참된 희망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다. 대신 썩은 동아줄과 같은 앗수르와 그들이 섬기는 신을 붙잡았다. 이렇게 한 나라의 지도자인 왕이 썩은 줄을 붙잡았으니 그 나라에 어떻게 희망이 있고, 그 나라가 어떻게 든든히 서겠는가? 그러니 당시 유다는 ‘헬’(Hell)유다가 되었고, 아하스 자신 역시 부끄러운 최후를 맞았다. 유다 왕 최초로 왕들의 묘(종묘)에 묻히지 못하는 수치를 당했다(대하28:27). 이는 그가 16년 동안 왕으로 살았지만 죽어서 왕의 대접을 받지 못했다는 뜻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희망의 근거로 붙잡고 있는 줄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바란다. 혹시 아하스처럼 썩은 동아줄을 붙잡고 있지는 않는가?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런데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희망이 없는 왕, 희망이 없는 나라에 희망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14).
여기에 희망의 핵심이자 근거가 있다. 그것은 ‘임마누엘’이다. 하나님이 떠난 것 같은 하나님 부재(不在)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알리는 희망이 임마누엘이다. 집요하게 붙잡고 버텨야 할 줄이 임마누엘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보다 더 큰 희망은 없다. 어떤 상황에 처해있더라도 그 자리가 임마누엘이면, 하나님이 우리(나)와 함께 계시면, 바로 그 자리가 희망이 되는 것이다. 임마누엘은 희망의 또 다른 이름이다. 유다 왕 아하스와 유다 백성들이 이스라엘과 아람 연합군의 침략에 바람 앞에 흔들리는 숲처럼 요동을 쳤던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성전과 왕궁의 은금을 가져다 바치면서 앗수르를 의지했던 것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복음서 저자 마태는 2천 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이 ‘임마누엘’이라고 했다(마1:23). 예수님이 세상의 희망으로, 인류의 희망으로, 우리의 희망으로 오셨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곧 희망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예수님이 우리가 집요하게 붙잡고 끝까지 버텨야 할 희망의 줄이라는 것이다.
희망의 ‘점’ 하나
점 하나에 삶이 바뀐다. 어느 때는 점 하나 때문에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 어느 때는 점 하나 때문에 행복과 불행이 교차되기도 한다. 치료가 어려운 고질병에 점하나 찍으면 치료가 가능한 ‘고칠병’이 되고, 삶을 힘들고 고단하게 하는 빚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찍으면 앞길을 환하게 비추는 희망의 ‘빛’이 된다. 두려움의 대상인 벌도 점 하나를 찍으면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 ‘별’이 되고, 모든 나쁜 것을 대변하는 악도 점하나만 찍으면 우리를 유익하게 하는 ‘약’이 된다. 무겁고 힘든 짐도 점하나만 찍으면 안식과 쉼을 주는 ‘잠’이 된다. 불가능이란 뜻의 Impossible이라는 단어에 점 하나를 찍으면 ‘I'm possible’(나는 할 수 있다)이 된다.
이렇게 부정적인 것에 희망의 점을 찍었더니 긍정적인 것이 되었다. 불가능한 것도 희망의 점 하나면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되고, 절망도 희망으로 바뀐다. 그 희망의 점이 임마누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분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놓으신 희망의 점이 되셨다. 그리고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저와 여러분이 바로 그 희망의 점이 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 가정에서, 교회에서, 세상에서, 그리고 모든 만남과 관계에서 희망의 점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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