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알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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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251회 작성일 16-02-10 10:24본문
영혼의 알람소리
막1:14~15
2016. 2/7. 08:00, 11:00
어둠을 밝히는 횃불
실패란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넘어진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이라고 한다. 어려움을 만났을 때 주저앉지 말고 벌떡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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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인생이 어두울지라도 너희 현실이 눈동자같이 캄캄할 할지라도 결코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마라. 오히려 그 어두움을 통해서 밝은 미래를 바라볼 수 있다.’
본문의 상황과 아주 잘 어울리는 표현이다. 당시 유대인은 세례요한의 출현에 열광했다. 말라기 선지자이후 400년 동안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다가 그 침묵을 깨고 보낸 사람이 세례요한이었기 때문이다. 요한은 제사장 사가랴의 늦둥이 외아들이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금(金)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이런 기득권을 스스로 포기하고 광야로 나갔다. 거기서 낙타 털옷을 입고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6), 회개를 촉구하면서 물로 세례를 베풀었다(4).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가 생활하는 광야로 나갔고,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예수님도 그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그는 예루살렘의 기득권 세력들, 특히 유대의 왕 헤롯 안티파스의 반인륜적인 악행(동생의 아내를 빼앗은 행위)을 무섭게 꾸짖었다. 서슬 퍼런 권력에 주눅 들지 않고 담대하게 맞선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헤롯에게 붙잡혀 옥에 갇혔다가 결국 참수를 당했다. 한 마디로 유대인의 희망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은 다시 눈동자같이 짙은 어둠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바로 그 때, 그 어둠을 밝힌 횃불이 예수님이시다.
하나님의 복음
본문은 세례요한이 붙잡힌 사건을 예수님의 공생애 출발점으로 소개하고 있다. “요한이 잡힌 후”(14). 물론 복음서 간의 약간 차이가 있긴 하지만 다른 복음서들도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이는 요한의 사명이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는’(3)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요한의 퇴장에 이어 주님이 등장하신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리고 주님 사역의 중심지는 당시 종교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이 아니라 변두리 ‘갈릴리’였다.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14). 갈릴리는 버려진 도시였다. 그런데 주님은 바로 그곳을 선택하셨다. 이는 주님 사역의 특징과 성격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주님은 최초의 일성을 이렇게 외쳤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5).
이 한 마디 속에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사역의 내용이 다 들어 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14)하기 위함이고, 주님께서 전파하실 그 복음의 내용은 ①회개하라(옛 시대는 지나갔으니 과거의 모든 삶의 찌꺼기를 버리라!)와 ②복음을 믿으라(새로운 시대가 다가왔으니 믿으라, 복음 안으로 들어와라!)였다. 여기서 마가는 주님이 오신 목적을 그냥 ‘복음’이라고 해도 될 것을 굳이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하였다. 지금이야 복음이란 단어가 기독교적인 용어가 되었지만 본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일반적인 용어였다. 복음을 뜻하는 ‘유앙겔리온’(ευαγγελιον)은 당시 로마황제의 명령을 의미했다. 그래서 로마시민은 복음을 곧 황제의 명령으로 인식했다. 그들이 복음, 곧 기쁜 소식으로 인식했던 황제의 명령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식민지에 세금을 부과하라는 명령이다. 로마는 정복전쟁마다 승리를 했고, 그 때마다 식민지에 어마어마한 세금을 부과했다. 로마인의 입장에서 그것은 복음(좋은 소식)이었다. 그만큼 그들의 수입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도로를 만들라는 명령이다. 당시 도로는 주로 군사용(정복과 질서유지)이었다. 새 도로가 만들어지는 것은 곧 로마의 영토가 확장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니 로마인에게는 복음이었다. 이것이 당시 로마인이 생각하는, 로마인을 위한 복음이었다. 반대로 로마의 식민지 사람들에겐 좋지 않는 소식이었다.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복음이라는 말에 흥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본서 저자는 이런 복음과 구별하기 위해 주님께서 전하신 복음을 그냥 복음이라 하지 않고 ‘하나님의 복음’, 곧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고 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주님은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오셨는데, 그 첫 마디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이었다. 이것이 주님께서 전파하시고 가르치신 복음의 내용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이 가지고 오신 나라이고 주님이 왕이신 나라다. 그리고 주님이 전파하시고 가르치신 복음의 핵심이다. 오늘 우리가 믿어야 하고, 우리가 전파하며 가르쳐야 할 복음의 내용이 하나님의 나라다. 주님은 때가 차서 그 나라가 이미 왔고(과거 완료형), 또한 가까이 왔다(미완료형)고 말씀하셨다. ‘때가 찼고’라는 동사가 원문에서는 과거 완료형과 미완료형이 이중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주님께서 오심이 곧 하나님의 나라가 온 것이기 때문에 과거형을 쓴 것이다. 또한 그 주님을 사람들이 믿어야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에게 임하기 때문에 미완료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주님의 통치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우리가 거하는 곳에서 주님의 통치를 경험할 수 있을까?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 곧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가 그 비결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얻는 회개
캄보디아어로 ‘쏨또’라는 말이 있다. ‘미안하다.’ ‘죄송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많은 캄보디아 사람들은 잘못한 일에 대해서 ‘쏨또’라는 말을 잘하지 않고, 핑계를 댄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운전을 하다 문제가 생기면 큰 소리부터 치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그들이 교양이 없고 심성이 못돼서가 아니라 아픈 역사 때문이라고 한다. 폴 포트가 이끈 공산주의 정권 크메르주가 지배할 때다. 폴 포트는 농촌중심 공산주의 이상사회로 만들기 위해 모든 지식인, 공무원, 종교인, 군인, 심지어는 안경을 쓴 사람과 그의 가족까지 모조리 처형을 했다. 이 때 크메루즈 앞에 붙잡혀 온 사람들이 ‘쏨또, 즉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면 죄송할 일을 왜 했냐며 죽였다. 농민인데 안경을 써서 잡혀왔다. 왜 안경을 썼느냐고 묻는다. 두려워서 ‘쏨또’하면 처형했다. 이렇게 마구잡이로 처형된 사람이 캄보디아 인구 700만 중에서 150만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쏨또’는 예의를 나타내는 관용적인 표현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죽음의 말이 된 것이다. 이런 험한 세상을 살다보니 아무리 잘못했어도 잘못을 시인하는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벌써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들은 잘못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죽음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라는 말은 더불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아름다운 언어다. 특히 신앙적으로는 회개의 언어다. 이 말이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올 때 진정한 회개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자신의 죄를 스스로 ‘인정’하고 입술로 ‘고백’하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으로 인정하고 입으로 고백해야 ‘행동’으로 결단하게 된다(‘인정-고백-행동’, 이것이 회개의 3단계다.). 신앙생활의 ‘회복’(Restoration)과 ‘부흥’(Revival)은 ‘회개’(Repent)에 있다(이 3R이 신앙생활에서 중요). 그런데 이 회개가 쉽지 않다. 회개한다는 것, 곧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한다는 것은 캄보디아 사람들이 경험했던 것처럼 자신의 죽음을 무릅쓴 결단이기 때문이다.
회개의 기본적인 의미는 ①‘돌아서는 것’과 그래서 ②‘새로운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선 악랄한 포주처럼 사단이 지배하고 있는 죄악된 세상과 그 생활로부터 돌아서야 한다. 달콤한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길들여진 과거의 잘못된 습관들로부터, 사단의 통로가 되고 있는 정과 욕심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이다. 이런 것들로부터 돌아서기 위해서는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죽을 각오를 하지 않고는 이런 것들을 우리 삶에서 끊어낼 수도 없고, 돌아설 수도 없다. 그래서 회개를 ‘영적 수술’이라, ‘거룩한 파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돌아섰으면 이제 새로운 길로 나아가야 한다. 주님을 향해 나아가야 하고, 주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 나라의 시민답게 생각(가치관)이나 말, 그리고 행동(삶의 태도와 방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회개다. 그래서 주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회개를 요구하신 것이다. 그래야 주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고, 그 나라를 살아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영적 알람소리에 민감하자.
현대 과학문명이 우리에게 준 가장 큰 혜택은 ‘편리함’이다. 그런데 이 편리함 뒤에는 커다란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 자동차가 참으로 편리한 도구이지만 항상 심각한 사고의 위험이 잠재되어 있다. 그래서 현대문명의 이기들에는 한 가지 장치가 내장이 되어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위험을 알리는 ‘경보장치’다. 이 경보장치에 귀를 기울이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심각한 위험에 빠지게 된다. 영적인 생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우리 생활 곳곳에 영적 경보장치를 준비해 두셨다. 그것은 우리 몸에도 있고, 마음에도 있다. 자연에도 있고, 일상생활에도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이다. 그래서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갈 때 돌아서도록 알람소리를 보낸다. 이 소리를 듣고 돌아서는 사람은 구원을 얻고 생명을 얻는다.
영적 거인들을 보면 그 공통점이 하나님께서 여러 경보장치를 통해 보내신 알람소리에 민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눈은 항상 회개의 눈물에 젖어 있었고, 그들의 무릎은 회개의 생활로 닳았다. 마치 경기(驚氣)가 있는 아이처럼 작은 영적 알람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살았다. 성경에서 대표적인 인물이 다윗이다. 다윗은 회개의 사람이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34:18).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가까이 하시느냐? 누구를 구원하시느냐? 자신의 죄를 슬퍼하는 사람, 진심으로 회개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하나님의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고,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제물은 회개하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우리 여기서 하나님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누구에게 향해 있는지를 알 수가 있다. 바로 회개하는 사람이다. 충심으로 자신으로 죄를 슬퍼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되려면 영혼의 알람소리에 민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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