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의 기술, ‘양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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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231회 작성일 16-01-17 12:59본문
화해의 기술, ‘양보’
창26:12~22
2016. 1/17. 08:00, 11:00
백치 아다다
계용묵의「백치 아다다」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아다다는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벙어리이고 백치(白痴)였다. 때문에 시집을 못가고 있다가 결혼 지참금으로 논 한 섬지기를 가지고 가난한 노총각에게 시집을 간다. 그녀 덕에 잘살게 된 남편과 그의 가족은 그녀를 무척 아꼈다. 그런데 노름으로 돈을 벌어서 살만해지자 그녀를 구박하여 내쫓고, 다른 여자에게 장가를 들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녀는 친정에서마저 쫓겨난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는 수롱이를 찾아간다. 수롱은 부모형제도 없는 노총각으로 그녀를 끔찍이 사랑해 주었다. 수롱은 그녀와 함께 마을을 떠나 신미도라는 섬에 정착한다. 어느 날, 수롱은 자신이 모아둔 돈 150원을 보이며 전답을 사자고 한다. 그녀는 갑자기 두려웠다. 돈 때문에 전 남편에게서 쫓겨났는데, 수롱이에게 돈이 있다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수롱이 역시 돈을 벌면 전 남편처럼 자기를 내쫓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그 돈을 몰래가지고 나와 바다에 뿌렸다. 뒤쫓아 온 수롱이는 떠내려가는 돈을 건질 길이 없자 돈을 건져오라며 그녀를 바다로 차 넣었다. 그녀는 또 다시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 절박한 심정으로 돈을 건지려고 허우적거리다 물속에 잠기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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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중심의 삶과 정신중심의 삶, 어느 것이 소중한 행복의 근거가 될까? 작가는 물질중심의 삶(수롱)도 행복할 수 없지만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소유를 거부한 정신중심의 삶(아다다)도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다고 떡이 없이 살 수도 없는 존재다!’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돈 앞에서 참으로 나약해지기도 하고, 비겁해지도 하고, 악랄해지기도 한다. 돈에는 참 많은 매력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돈을 쫓고 있는 것이다. 그 돈이 때로는 행복을 주기도 하지만 불행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돈 때문에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돈 때문에 양심을 팔고, 돈 때문에 영혼을 팔고, 심지어는 돈 때문에 주님을 팔고, 신앙을 파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후6:8)고 하였다. 자족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본문은 소유(돈) 문제에서 비롯된 갈등을 지혜롭게 잘 극복한 좋은 본보기다.
안 되는 사람의 특징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보면 겸손하게 그것을 배우려고 하고, 단점을 보면 자기에게도 그런 점이 없나 살펴서 고치려고 한다. 심지어는 적에게까지도 그런다. 그러니까 탁월해지는 것이다. 반대로 어리석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보면 시기와 질투를 하고, 단점을 보면 무시하면서 교만하게 된다. 본문에 나온 블레셋 사람들이 어리석은 사람의 전형(典型)을 보여준다.
이삭은 그가 살던 곳에 흉년이 들자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로 가서 얹혀살았다(1).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셔서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지역 사람들보다 백배나 수확을 얻었고(12),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도 심히 많은 거부가 되었다(13,14). 그 뿐만 아니다. 그가 우물을 파는 곳마다 물이 나왔다. 이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다. 유목민에게 우물은 생명과 같고, 우물을 파는 것은 대공사였다. 도구도 없는데다 사막이라 깊이 파야 물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렇게 힘들게 파도 물이 나온다는 보장이 없다. 그런데 이삭은 우물을 파는 곳마다 물이 나왔다. 이것을 오늘날 표현으로 말하면 그가 손을 댄 일마다 성공했다는 의미다. 하지만 블레셋 사람들은 이런 이삭에게서 그가 이렇게 ‘형통한 비결’을 배우려고 하기보다 시기했다(14). 행패를 부렸다(15). 자기들을 떠나도록 했다(16). 심지어는 쫓아다니며 시비를 걸었다(18,20,21). 이것이 잘 ‘안 되는’ 사람의 특징이다. 이런 사람은 ①복 받은 사람을 ‘시기’하고, ②복 받은 사람을 ‘멀리’ 하고, ③시비를 걸어 ‘갈등’을 일으킨다.
아름다운 양보
이와 같은 블레셋 사람들의 어리석은 태도와 달리 이삭의 태도는 감동 그 자체다. 사람은 각기 다른 개성, 가치관, 삶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유감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갈등은 필연적이다. 그래서 사랑으로 맺어진 부부, 피를 나눈 부모형제, 우리 윤수와 다윤이처럼 한 부모에게서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쌍둥이에게도 갈등이 있다. 그러므로 삶의 건강함이란 갈등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지혜롭게 극복하는 것이다. 건강한 가정이란 갈등이 없는 가정이 아니다. 오히려 갈등이 없다면 그 가정은 공동묘지나 다름없다. 갈등을 어떻게 지혜롭게 해결하느냐에 있다. 그러면 갈등을 어떻게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을까? 그것은 ‘양보’다. 양보란 나의 권리나 특권을 상대방에게 기꺼이 내어주는 것이다. 이런 아름다운 양보가 있는 곳에서 갈등은 힘을 잃게 된다. 그리고 화해가 일어나게 된다. 갈등이 화해의 장애물이라면 양보는 화해의 기술이다. 이것을 이삭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본문에서 이삭이 보여준 놀라운 태도는 양보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가 사는 곳으로 찾아와 우물을 돌로 막고 흙으로 메웠다(16). 그가 조용히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힘들게 우물을 파서 물을 확보해두면 또 그들이 와서 자기 것이라며 빼었다. 그러기를 세 번이나 했다. 이렇게 그들이 계속 행패를 부렸지만 그들과 다투어 그곳을 차지하려고 하지 않고, 바보처럼 그냥 양보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또 우물을 팠다. 그랬더니 그들의 불량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다툼이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직접 찾아와서 서로 다투지 말자는 평화의 언약을 맺게 되었다(29). 이삭과 블레셋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사라지고 화해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 모두가 이삭의 양보 때문이다.
소양대득(小讓大得)
소탐대실(小貪大失)이란 말이 있다. 작은 이익을 탐하다 더 큰 것을 잃어버린다는 뜻이다. 중국 영주 땅에 사는 어떤 사람이 동전 천 냥을 허리에 차고 나룻배를 탔다. 그런데 강 가운데서 급물살에 배가 뒤집혀 배에 탔던 사람들이 모두 물에 빠졌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헤엄쳐서 뭍으로 나왔지만 이 사람은 허리에 차고 있는 돈주머니 때문에 물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사람들이 속히 돈주머니를 풀어버리라고 소리쳐도 그는 끝내 돈주머니를 버릴 수가 없었다. 결국 그 천 냥 때문에 소중한 목숨을 잃게 된 것이다. 이런 경우를 두고 소탐대실이라고 한다.
반면 작은 것을 포기하면 더 큰 것을 얻게 된다(小讓大得). 이삭이 그랬다. 자신의 권리와 특권을 양보한 그에게 하나님은 ‘르호봇’을 허락하셨다(22). 르호봇은 ‘넓다.’는 뜻이다. 더 이상 다툴 필요가 없는 넓은 장소를 허락하신 것이다. 저는 이것을 그 무엇도 그 누구도 품을 수 있는 넓은 마음으로도 해석하고 싶다. 아무튼 마음이 넓어져야 지경도 넓어지고, 마음이 커야 영향력도 커지는 것이다. 이렇게 그가 넉넉한 마음으로 자신의 권리와 특권을 기꺼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겨주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넓은 장소, 넓은 마음을 허락하셨다. 작은 것을 양보하고 더 큰 것을 얻은 셈이다. 이런 점에서 양보는 더 큰 것, 더 좋은 것으로 나아가는 문과 같은 것이다. 여기에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양보의 삶은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을 보여주는 삶이다.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런 고백을 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28). 계속 부당한 대우와 불이익을 당하면서도 다투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양보하는 이삭의 모습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됨을 보았다는 것이다(마5:9). 신자는 삶으로 하나님을 보여줄 수가 있어야 한다. 그 비결이 양보하는 생활이다. 양보하여 화평을 이루는 생활이다.
복이 쫓아다니는 사람
‘복을 쫓아다니는 사람’과 ‘복이 쫓아다니는 사람’이 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인가? 많은 사람들은 길(吉)한 날, 길한 시간, 길한 장소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사를 하거나 결혼을 할 때 길한 날을 택해서 하고,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길한 시간을 택해서 한다. 집터를 정할 때, 특히 묘를 만들 때 길한 장소를 택하려고 한다. 이름을 지을 때도 마찬가지다. 이 모두가 복을 쫓아다니는 모습이다. 그런데 이삭은 어디로 가든지 형통했다. 흉년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에게 얹혀살았지만 농사를 지어 백배나 수확하고, 가축이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은 거부가 되었다. 우물을 파는 곳마다 물이 솟아났다. 그가 복을 쫓아다닌 것이 아니라 복이 그를 쫓아다닌 것이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믿고 화평을 위해 항상 양보했기 때문이다. 양보하니까 양보한 그곳을 하나님께서 채우신 것이고, 또한 그의 손보다 하나님의 손이 더 크시니까 복이 흘러넘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양보하면 손해다.’고 생각한다. 지나친 경쟁문화의 영향이다. 물론 양보하면 당장은 손해다.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생 양보해도 백 걸음도 돌아가지 않는다.’(終身讓路 不枉百步)는 소학(小學)의 교훈처럼 그 손해는 작고, 그 기쁨과 유익은 크고 많다. 특히 양보를 통해 갈등과 다툼이 극복됐다면 그 기쁨과 가치는 헤아릴 수가 없을 것이다. 양보는 다른 사람과 주변을 행복하고 아름답게 하기 위한 작은 ‘불편’이다. 아름답고 행복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기회비용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불편이 종국에는 더 큰 복이 되어 돌아오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삭의 삶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양보의 사람이 되자! 그래서 다툼과 갈등을 극복하는 화해의 주인공이 되자! 그러면 하나님의 복이 쫓아다니는 복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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