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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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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5,028회 작성일 16-02-21 13:09

본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

사58:6~11

2016. 2/21. 11:00

이벤트 영성

유대교에서는 예로부터 ‘구제와 기도와 금식’, 이 세 가지를 중요한 경건생활의 덕목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영성이 깊은 사람이라고 여겼다. 구제는 다른 사람을 향한 영성이다. 유대인은 어려서부터 어려운 이웃을 돕는 구제를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와 함께 가르쳤다. 그들은 어려운 사람들을 웃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웃으시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영성으로 경건한 유대인은 하루 3번씩 기도했다. 그리고 금식은 자신을 향한 영성이다.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고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행위가 바로 금식이다. 유대교에는 금식의 절기가 따로 정해져 있지만, 이 외에도 그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일주일에 두 번 금식을 했다. 이는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으로 올라간 날(목요일)과 내려온 날(월요일)을 기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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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예수님은 경건생활의 덕목 이 세 가지를 강하게 꾸짖으셨다(마6:1~18).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이것들을 부정하신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꾸짖으신 것은 구제, 기도, 금식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동기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경건생활이 은밀하게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벤트처럼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되었다. 주님께서 꾸짖으신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사실 이들은 철저한 ‘자기부정’(포기) 정신에 기초한 덕목이다. 구제는 자기 소유를 포기해야 가능하고, 기도는 자신의 뜻을, 그리고 금식은 자신의 육체적 신뢰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은 이렇게 자기를 부정하고 포기해야 하는 경건생활의 덕목을 오히려 자신을 드러내는 도구로 만들었다. 그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이벤트로 전락시킨 것이다. 구제도 기도도 금식도 모두 자신을 꾸미기 위한 장식품이 되고 만 것이다. 그래서 경건을 이익의 도구로 삼은 외식하는 신앙인이 된 것이다. 신앙은 보이기 위한 이벤트가 아니다. 오늘날 영성을 잃은 교회의 모습도 이와 같다. 신앙을 자꾸 이벤트화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알리고, 인정받고, 과시하기 위해 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금식에 대하여

본문은 금식(禁食)에 대한 말씀이다. 금식은 말 그대로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다. 삶에 필요한 다양한 것들을 일정기간 고의로 절제하는 것이다. 이것이 금식의 사전적 의미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금식은 이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금식을 히브리어로 ‘’(צוּם)이라고 한다. 이는 ‘(입)을 덮어씌우다.’는 뜻이다. 여기서 ‘애통하다,’, ‘슬퍼하다.’, ‘괴롭게 하다.’는 뜻이 나왔다. 또한 ‘아나 네페쉬’(אנה נפש)라고도 한다. ‘자기의 영혼을 괴롭히다.’는 뜻이다. 내적 갈등과 고민을 보여주는 ‘슬픔과 괴로움’이 이 두 단어의 공통적인 이미지다. 헬라어도 비슷하다. 금식을 헬라어로 ‘네스티스’(νηστις=νη+εσθιω)라고 한다. ‘먹지 않는다.’, ‘먹을 수 없다.’는 뜻이다. 슬픔 때문에 괴로움 때문에 먹을 수가 없는 것이다.

 

금식에 대한 구약의 언어 히브리어나 신약의 언어 헬라어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 것은 슬픔괴로움을 촉발시킨 동기가 ‘먹지 않음’(금식)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금식이 본문에서는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는’ 생명회복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6). 이를 종합해 볼 때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금식은 회개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금식이 회개를 동반하고 있는 것을 성경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레16:29~31, 삼상7:6, 삼하12:16,17, 욘3:5~8, 슥8:19 등). 금식이란 하나님께만 집중하기 위해 생존의 조건인 먹고 마시는 것까지 끊는 것이다. 먹을 수 없을 만큼 자신의 죄를 슬퍼하고 괴로워하면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과 더 깊이 만나기 위한 우리의 절박한 추구를 표현하는 성경적인 방법이다. 이렇게 간절하고 절박하니까 결박과 멍에가 끊어지는 생명의 회복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본문은 이와 같은 금식을 관계적인 차원(사회적 책임)으로까지 확장을 역설하고 있다(1요4:20, 5:1,2).

 

하나님이 기뻐해야 좋은 것이다.

흔히 우리는 ‘좋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하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이 말이 통하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예배가 얼마나 좋고 중요한 것이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려야 그 예배가 하나님께서 받아주신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오히려 가증하게 여기시고, 하나님께 견디기 어려운 짐이 된다(사1:13).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드려야 하나님이 그 찬양을 받으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드려야 그 기도를 받으신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찬양을 하고 기도를 드려도 하나님께서 외면하여 듣지 않으신다(사1:15). 금식도 마찬가지다. 경건생활의 중요한 덕목이다. 그런데 5절을 보라! “......그의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 기도, 봉사.......금식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할 수 있을까? 본문을 통해 이를 두 가지 동사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풀어주는’(자유)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눠주는’(사랑) 것이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6).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7).

 

 

흉악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의 줄을 ‘끌러’주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라고 한다. 특히 굶주린 자에게 양식을 ‘나눠’주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라고 한다.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돌보는’ 삶이 참된 금식이라고 한다. 〈양과 염소〉비유(마25:)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헐벗었을 때 옷을 입히고, 병들었을 때 돌보고, 옥에 갇혔을 때 찾아보는’ 것이 참된 금식이다. 한 마디로 금식의 정신은 종교적인 의례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이라는 것이다.

 

가난한 자에 대한 태도는 곧 주님께 대한 태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한 편에서는 독초인지 알면서도 먹을 것이 없어서 자기 자녀에게 그 독초를 먹일 수밖에 없는 부모가 있고, 설사약 하나를 먹지 못해서 수 초(秒)마다 죽어가는 많은 아이들이 있다. 손으로 만지지도 못할 더러운 물을 마시고 기생충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들도 많다.

 

이런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것,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사랑의 손을 내미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다. 가난이라고 하는 멍에, 질병이라고 하는 사슬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여 자녀로 삼으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이웃을 어려운 처지에서 구해내는 것이다. 굶고 있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벗은 사람에게 입을 것을 주고, 아픈 사람을 찾아가 위로하는 것이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19:17)고 했다. 또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잠14:31)고 하였다. 주님께서도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고 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가난한 사람,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주님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 이들을 돌보는 것이 주님을 돌보는 것이고, 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들을 섬기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잘 보살피는 것이야말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이런 사람들을 돌아보면서 드리는 금식이라야 주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금식이다. 금식을 하되 금식의 정신이 생활 속에 배어들게 하라는 것이 본문의 핵심이다. 또한 이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이다.

 

보장된 약속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11:6).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께서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보상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는 것이다. 물론 이 세상에서 보상을 받기 위해 선행을 한다면 그것은 나쁘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보상받겠다는 것은 나쁘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믿음의 표현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보상받기 위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는 일이다. 그래서 본문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을 한 사람에게 아름다운 보장을 약속하고 있다. 8절 이하의 말씀이 그것이다.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내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8~11).

 

하나님의 복이 이렇게 무더기로 표현된 부분을 성경에서 찾기가 쉽지 않다. 금식의 정신이 생활에 베어들게 하는 사람, 즉 신앙이 생활 속에 베어들게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하늘의 보물창고를 열어두고 계신다는 뜻이다. 금식을 영어로 ‘Fast’라고 하는데, 기본적인 뜻이 ‘빠른’, ‘빨리’다. 이는 금식의 성격을 잘 반영한다. 사실 금식은 최선의 최대의 최고의 영적 폭발력이다. 특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강력한 믿음의 무기이고, 축복의 통로다. 사순절은 우리 기독교 금식의 절기다. 이 뜻 깊은 절기에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하여 약속된 주님의 복을 듬뿍 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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