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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의 장애물,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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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849회 작성일 16-01-10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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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의 장애물, ‘갈등’

왕하14:8~14

2016. 1/10. 08:00, 11:00

앵그리 사회(Angry Society)

미국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고난주간 세족식 때, ‘오른 발을 먼저 씻어야하느냐? 왼발을 먼저 씻어야하느냐?’는 문제로 의견충돌이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사소한 갈등의 불씨는 교회적 갈등을 낳았고, 급기야 교회가 갈라졌다. 오른발을 먼저 씻어야한다고 주장하는 측이 교회를 개척해 나갔다. 그들은 교회의 이름을 ‘오른발 교회’(Right foot church)라고 했다. 이 교회가 지금도 미국에 있다고 한다. 사소한 일에서 비롯되어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 갈등의 특징이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 땅에 갈등이 없는 곳이 없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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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를 수식하는 부정적인 단어들이 많다. 그 중에 ‘갈등 공화국’, 혹은 ‘앵그리 대한민국’이란 말이 있다. 지금 우리사회는 계층, 지역, 이념, 교육, 정치, 경제, 가족, SNS 등 다양한 갈등이 존재하고, 이런 갈등을 너무나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우리나라가 대표적인 ‘헝그리(hungry) 사회’에서 유례없는 ‘앵그리(angry) 사회’로 변하고 있는 것이라 말한다. 사실 요즈음 문제가 되고 있는 층간소음, 차로변경과 같은 것은 과거에는 사소한 일로 여기고 넘어갔다. 그런데 지금은 층간소음으로 인한 살인, 차로변경으로 인한 보복운전과 폭행까지 오가는 등 갈등표출의 빈도가 날로 증가하고, 그 표현방법도 끔찍해지고 있다. 지금 우리사회는 말 그대로 ‘갈등사회’다. 이런 갈등은 사회 곳곳에서 사회적 역동성을 상실하게 만들고 있다. 몇 년 전, 민간경제연구소 추산에 근거하면 갈등이 경제에 미치는 손실은 최대 246조원으로 나왔다. 이는 올해 정부 예산 386조원의 64%에 달한 엄청난 액수다. 이런 천문학적인 돈이 갈등비용으로 지불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불완전한 인간이 만든 불완전한 구조 속에서 갈등은 더욱 증폭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앞에서 소개한 대로 신자와 교회까지 사소한 것으로 갈등하고 있으니 화해는 요원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우리 총회가 화해의 사명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자는 의미에서 금년 총회 주제를 ‘주님, 우리로 화해하게 하소서!’ 라고 한 것 같다. 먼저 우리 안에서 화해를 이루고, 나아가 사회를 화해하게 만드는 도구가 되자는 뜻이다. 총회에서 발행한 구역공과 또한 이 주제에 따라 만들어졌다. 그래서 금년 설교를 되도록 여기에 맞춰서 하려고 한다.

 

분수를 잃은 유다 왕 아마샤

개인이든 공동체든 그 말기적 현상이 자기 분수를 잃어버린 것이다. 분수를 잃고 교만하게 날뛰다가 한순간에 폭삭 무너지고 만다. 그래서 성경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고,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잠16:18)고 하였다. 본문이 좋은 예다. 이스라엘이 솔로몬 이후 남과 북으로 갈라진 다음부터 항상 서로 갈등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래서 같은 민족끼리 자주 싸웠다. 본문도 그 중에 하나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남조 유다 왕 아마샤(Amaziah)가 그 갈등을 증폭시켜 도리어 큰 화를 당한 사건이다.

 

아마샤는 25세 왕이 되었는데, 집권 초기엔 그의 아버지 요아스처럼 하나님을 신실하게 잘 섬겼다(3~6). 그런 그가 선지자의 충고에 따라 하나님을 의지하여 에돔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다음 전혀 딴 사람이 되었다(7). 그는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면서 에돔 사람들이 믿은 신들을 가져와서 섬겼다(대하25:14). 이런 망령된 일에 대해 선지자가 꾸짖자 선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오히려 선지자를 핍박하였다(:15,16). 그의 아버지 아하스처럼 하나님을 떠난 것이다. 하나님을 버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북조 이스라엘에게 싸움을 걸어 전쟁까지 하게 되었다(8). 성경이 한결같이 강조하는 형통의 조건에 세 가지가 있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의 종(선지자)을 귀하게 여기고, 겸손하게 자기 분수를 아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아마샤는 이 세 가지를 모두 버렸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담했다.

 

교만이 갈등의 씨앗이다. 

본문은 아마샤가 이렇게 된 이유를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입을 통해서 말하고 있다. “네가 에돔을 쳐서 파하였으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니 스스로 영광을 삼아 왕궁에나 네 집으로 돌아가라. 어찌하여 화를 자취하여 너와 유다가 함께 망하고자 하느냐.”(10). ‘네가 지금 에돔을 이겼다고 기고만장해진 모양인데, 그렇게 영광을 얻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라. 괜히 나에게 덤볐다가 망한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그의 교만과 무모함을 조롱하는 말이다. 그렇다. 교만이 문제였다. 한 번의 승리가 그를 교만하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교만을 성공의 독, 성공의 복수라고 한다. 물론 승리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이 그로 이기게 하셨다. 그런데 승리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자신이 가로챘다. 전쟁에서 이기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오히려 교만의 도구로 삼은 것이다. 그러다보니 스스로 승리감에 도취되어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고, 그것은 그대로 이스라엘에 대한 무모한 도발로 이어지게 되었다. 교만이 이 모든 것의 원인이었다. 이런 점에서 교만은 ‘잘났다’는 말의 동의어가 아니라 ‘가장 어리석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이솝우화에 나온 이야기다. 어느 날, 신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자기의 짝을 찾는 제비뽑기를 했다. 이 모임에서 한 쌍의 부부가 탄생했다. 그것은 교만’과 ‘싸움’의 신 부부다. 싸움의 신이 교만의 신을 맞이하면서, ‘나는 그대를 사랑하오. 나는 어디든지 그대를 따라 다니겠소!’ 라고 하였다. 그 후 교만의 여신이 가는 곳은 싸움의 신이 따라다니며 일을 거들게 되었다. 그래서 이들 부부는 가는 곳마다 무서운 위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교만이 싸움의 원인, 갈등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교만을 헬라어로 ‘휘페레파노스’(ὑπερήφανος)라고 한다. ‘남보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여기는’ 것으로, 자기 이외의 사람에 대해서 멸시하는 마음을 품는 것을 뜻한다. 소위 극도의 ‘자기 확장’, 혹은 ‘자기 확대’가 교만인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자기과다증’(multi-ego)라고 한다. 이렇게 다른 사람을 내려다보고, 다른 사람 위에 자기를 올려놓은 사람은 어디에 있든지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교만은 탁월한 ‘이간쟁이’(trouble maker)다. 아마샤가 이 교만의 덫에 걸린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고, 이스라엘과의 갈등을 증폭시켜 자신과 자신의 나라를 위험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특히 본문은 교만에서 비롯된 갈등이 얼마나 참담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아마샤가 북조 이스라엘 왕에게 벧세메스에서 사로잡혀 예루살렘까지 끌려왔고(13상), 예루살렘 성벽이 400규빗이나 헐리고(13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금은과 기명들이 탈취당하고(14상), 또한 사람들이 볼모로 잡혀갔다(14하). 그리고 ⑤통치 말년에 반역이 일어나 반역자들에게 쫓기다가 라기스에서 살해를 당했다(19). 아마샤의 교만이 갈등을 일으켰고. 갈등의 끝이 이런 비참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라인홀트 니버는 교만에는 지적인 교만, 도덕적인 교만, 권력적인 교만, 영적인 교만이 있다고 했다. 여러분 속에는 어떤 교만이 자리를 하고 있는가? 바로 이것이 우리로 자신과 가정과 교회, 그리고 우리가 함께 하는 모든 곳에서 갈등의 주범이 되게 만든다. 이 갈등의 실체를 헤아려보고 그것들을 제거하기 바란다. 이것이 평안한 삶, 화해를 이루는 삶의 비결이고, 또한 하나님의 자녀됨을 드러내는 비결이다(마5:9).

 

갈등을 잠재우는 비결

성 프란시스가 어느 날 우물에서 물 긷고 있는 여인을 보았다. 여인은 물통에 물을 가득 채운 다음 작은 나뭇조각을 물 위에 띄우고, 물통을 어깨에 메고 가는 것이었다. 물 위에 나뭇조각을 띄우는 것이 궁금한 그는 그 여인에게 물었다. ‘왜 물 위에 나뭇조각을 띄운 겁니까?’ 그러자 여인이 대답했다.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고 계시군요? 물 위에 나뭇조각을 띄운 것은 물통이 흔들려도 물이 넘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말에 그는 큰 깨달음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마음의 동요가 일어날 때, 삶 속에 갈등이 있고, 관계 속에서 갈등이 생길 때,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띄우면 되겠다는 것이다.

 

지난 송구영신 예배 때,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인생길에서 만나는 마라를 극복하는 비결이라고 했다. 그렇다. 갈등이라고 하는 인생의 마라를 극복하고 치유하는 방법 역시 막힌 담을 허시고 만물을 하나 되게 하신 주님의 십자가뿐이다. 주님은 평화의 터전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셨다. 그러므로 십자가 정신이 갈등의 해결책, 곧 화해의 길이다. 이것은 여러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던 고린도 교회에게 사도 바울이 내린 처방이기도 하다. 십자가의 정신이란 자신의 권리나 특권을 모두 내려놓고 포기하는 것,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낮추고,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다. 이렇게 내려놓고 비우고 낮아지고 희생하는 곳에 화해의 방해꾼 교만은 그 설 자리를 잃게 되는 것이다. 갈등사회를 치유할 수 있는 대안은 주님의 십자가뿐이다. 그리고 십자가의 능력을 경험한 신자와 교회가 화해의 사도로서 그 사명에 충실할 때 가능할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는 신자와 교회가 갈등의 주범이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지만 이제부터는 십자가의 정신을 살아내어 화해의 사자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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