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죄하지 않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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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838회 작성일 16-02-28 13:05본문
정죄하지 않는 사랑
요8:1~11
2016. 2/28. 11:00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
살면서 억울한 일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처럼 억울한 경우는 흔치 않을 것이다. 그는 빵 한 조각 훔친 죄로 19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레미제라불」의 주인공 장발장이 그 사람이다. 옥살이를 하고 사회에 나왔으나 그를 반겨주는 곳이 없었다. 전과자라는 이유로 모두가 정죄의 눈초리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데 미카엘 신부만이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고, 식사와 잠자리까지 제공해주었다. 하지만 그는 은접시와 촛대를 본 순간 가난한 가족이 떠올라 그것을 훔쳐 달아났다. 은혜를 배신으로 갚은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고, 또한 우리의 모습이라 생각한다. 그는 곧바로 붙잡혔고, 이대로 수감이 되면 그는 평생을 감옥에서 보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그에게 또 다시 은혜가 주어졌다. 경찰이 그를 주교에게 끌고 가서 그가 훔친 물건을 보여주자 주교가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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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들은 그가 훔친 것이 아니라 내가 준 것이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신부의 이 한마디가 얼음장 같은 그의 마음을 녹였다. 그를 옭아매고 있던 흉악한 결박과 멍에의 줄이 끊어지고 새로운 삶을 결단하게 만들었다. 잘못을 알면서도 그것을 정죄하지 않고 그냥 덮어주는 사랑이 이렇게 만든 것이다. 그는 이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 일생 어려운 이웃을 돕게 되고, 후에는 존경받는 시장까지 되었다. 빵 한각 때문에 비참한 죄수로 살았던 그가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사랑의 사람이 되었다. 정죄는 다른 사람도 죽이고 자신도 죽게 만든다. 사람을 살리고 변화시키는 것은 용서와 사랑이다. 다윗은 용서받은 은혜를 이렇게 노래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 본문은 허물의 사함과 죄의 용서를 받고 변화된 한 사람의 이야기다.
피에 굶주린 사람들
본문의 사건은 이스라엘의 3대 명절 중 하나인 장막절 직후에 일어났다. 축제를 은혜롭게 마친 사람들은 다들 집으로 돌아갔다(요7:53). 그런데 예수님은 집 대신 ‘감람산’(1)으로 가셨다. 다들 집으로 돌아갔지만 주님만 홀로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 감람산으로 가셨다. 기도가 필요한 사람들은 쉬기 위해 집으로 가고 기도가 필요 없으신 주님은 기도하기 위해 산으로 가셨다. 그리고 아침 일찍 성전을 찾았다. 백성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2). 그저 기도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만 집중하신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바로 그 때, 한 떼의 성난 사람들이 한 여성을 끌고 와 주님 앞에 세웠다. 그들은 당시 유대교를 대표하는 바리세인과 서기관들이었고, 그들의 손에는 돌이 들려있었다. 그들이 주님께 말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4,5).
이것은 주님을 붙잡기 위한 함정(陷穽)이었다. 장막절 기간 중에 유대교 지도자들이 아랫사람들을 시켜 주님을 체포하도록 했지만 실패했다(7:45). 오히려 붙잡으러갔던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고 돌아왔다(:46). 실패한 그들은 피에 굶주려 썩은 고기를 찾아다니는 하이에나처럼 주님을 붙잡을 계책을 찾다가 음행 중에 있는 한 여인을 붙잡은 것이고(3), 그녀를 미끼삼아 주님을 무너뜨리려고 한 것이다. 여기서 종교의 본질과 타락한 종교의 모습을 보게 된다. 생명을 사랑하고 살리는 것이 종교의 본질이다. 하지만 타락한 종교는 여느 이익집단처럼 생명은 안중에도 없고, 자신의 안위와 이기적 목적만 있을 뿐이다. 본문의 유대인이 그랬다. 그들에겐 이 가련한 여성의 소중한 생명에는 관심이 없었다. 한 사람의 귀중한 생명이 그들에겐 자신들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그래서 음행의 당사자인 남성도 없이 이 여성만 끌고 와서 주님 앞에 세운 것이다. 그것도 은혜롭게 명절 축제를 마친 다음 날에 말이다. 명절의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런 피바람을 몰고 온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 주동자가 종교 지도자들이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당시 유대교가 얼마나 깊은 어둠속에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호모 네칸스(Homo Necans)
앞에서도 말했지만, 왜 그들은 간음현장에서 여성만 잡아왔을까? 간음은 쌍방 죄인데, 이 여성과 간음 상대인 남성은 어디에 있는가? 남성은 이미 도망쳤기에 놓친 것일까? 혹시 여성만 처벌하고 남성의 죄를 덮으려고 한 것은 아닐까?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종교사회학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다. 당시 유대사회와 유대교는 남성 중심이었다. 반면 여성은 무시하거나 약탈해도 되는 대상이었다. 때문에 율법에는 간음한 남녀 모두를 처형하도록(신22:22~29) 되어 있지만 여성만 잡아서 끌고 온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여성을 단죄함으로 ①관습이 부여한 자신들의 사회적, 도덕적 우월감을 확인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게다가 당시 로마제국은 유대인의 종교와 율법을 무시했다. 그래서 그들의 민족성과 정체성이 심각한 도전을 받았다. 그들은 이 가엾은 여인을 돌로 쳐 죽임으로 ②허물어진 자존심을 세우고, 나아가 ③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는 예수님까지 제거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한다.
사실 힘없는 대상을 희생시키는 인간의 관행은 오래된 습성이다. 인간의 내면에는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활기를 부여하기 위해 약한 대상에게 폭력을 가하고 살해함으로써 힘을 얻고자 하는 본성이 있다. 이런 것들을 신화나 민담, 고대종교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가 있다. 이를 ‘호모 네칸스’(Homo Necans)라고 한다. ‘살해하는 인간’이란 뜻이다. 이런 추악한 인간의 본성을 본문에 나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서 볼 수 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
아무튼 4,5절만 보면 주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진퇴양난(進退兩難)의 함정에 빠졌다. 겉으로 보기엔 그랬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율법대로 여인을 ‘돌로 치라.’고 하면 그동안 사랑을 전파한 주님은 위선자가 되고, ‘용서하라.’고 하면 율법을 무시한 자가 된다. 무슨 대답을 하든 걸리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 그들은 더욱 의기양양하여 속히 답을 하라고 주님을 몰아세웠다(7). 이윽고 주님이 말씀을 하셨는데, 이는 성경의 대표적인 촌철살인(寸鐵殺人)이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
아무리 인간의 지혜가 탁월해도 주님을 능가할 수는 없다. 이 말씀이 이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주님의 이 말씀은 ①율법을 어기지도 않고, ②그 동안 주님이 가르치셨던 사랑 정신도 해치지 않으면서, ③순식간에 상황을 뒤집어 놓았다. 이는 자신에게 향한 칼끝을 고발자에게 돌린 절묘한 반문(反問)이다. 이젠 공이 고발자들에게로 넘어갔고, 그들이 답을 해야 했다. 그들은 당황했다.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면 ‘나는 죄가 없다.’는 뜻으로,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있는 성경에 위반되고(시14:3).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게 된다(1요1:10). 그렇다고 용서하자고 할 수도 없다. 그러면 주님의 가르침에 승복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들이 파놓은 함정에 스스로 빠지고 만 것이다. 그러니 나이가 많은 사람으로부터 하나 둘씩 그 자리를 떠난 것이다. 본문은 그들이 ‘양심에 가책을 느껴’(9) 그렇게 했다고 한다. 주님을 죽이려던 사악한 마음이 양심을 되찾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인간적인 방법과 주님의 방법, 인간의 말과 주님의 말씀의 차이다. 인간적인 말이나 방법은 사람을 무너뜨리고 죽음으로 내몰지만 주님의 말씀과 방법은 사람을 살리고, 회복시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어느 범죄 심리학자가 말하기를 인간은 누구나 잠재적인 범죄자이고, 드러나지 않은 범죄자라고 하였다. 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에 앞서 자신을 먼저 살펴야한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리 치라.’는 주님의 말씀이 바로 이런 의미로 주어진 것이다. 이 여인을 정죄하지만 말고 너희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 손에 들린 돌을 간음 중에 붙잡힌 여성이 아닌 그들 자신에게로 향하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에게 향했던 판단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리게 한 것이다. 다른 사람과 섞여 자신의 익명성을 유지하는 군중이라는 그림자에서 나와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게 했다. 이렇게 자신을 보게 된 그들은 나이가 많은 사람부터 하나 둘씩 돌을 내려놓았다. 분노의 돌, 미움의 돌, 시기와 질투의 돌, 정죄의 돌, 심판의 돌을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가고, 그곳에는 주님과 여인만 남았다. 이 때 주님께서 이 여인에게 위대한 용서의 선언을 하셨다(용서와 권면의 말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1).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이 용서의 선언은 죄를 묵인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에게 회개의 기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는 뜻이다. 이어서 하신 말이 이를 확인해준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그녀가 죄를 지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정죄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이다. 정죄는 그 죄에 그 사람을 가둬버리는 것이다. 반면에 용서와 사랑은 그 죄에서 벗어나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래서 정죄는 그것으로 끝이지만 용서와 사랑은 새롭게 변화할 수 있는 출발이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정죄할 충분한 자격이 있으면서도 정죄보다 용서와 사랑을 택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주님은 우리가 연약하여 늘 죄악 중에 있지만 회개하여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용서와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주님의 보좌 앞에 서 있게 된 것이다. 주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이런 은혜를 받았으니 서로 그렇게 살아야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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