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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587회 작성일 16-03-13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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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대하고 거침없이

행26:24~29

2016. 3/13. 11:00

예수 마니아(mania)

다음 질문에 답을 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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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관과 소방관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소방관, 물불을 가리지 않으니까!)

소방관과 소경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소경, 눈에 보이는 것이 없으니까!)

소경과 노인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노인, 목숨을 걸고 죽기 살기로 덤비니까!)

그런데 이들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있다. 미친 사람이다.

 

맞는 말이다. 누구도 미친 듯이 목숨을 걸고 덤비는 사람을 당할 수 없다. 그러니 미친 사람이 가장 무서운 사람인 것은 당연하다. 헬라어로 ‘미쳤다’는 말이 ‘마이네’(μάίνη)이다. 흔히 우리가 사용하는, 예를 들면 독서 마니아, 등산 마니아, 낚시 마니아, 여행 마니아, 탁구 마니아, 커피 마니아 등과 같은 영어 ‘마니아’(mania)라는 단어가 여기서 왔다. 소위 어떤 사람이나 사물, 혹은 어떤 일을 미치도록 좋아하는 사람을 가리켜 ‘마니아’라고 한다.

 

신자를 영어로 ‘크리스천’(Christian)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인’, 즉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란 뜻이다. 신자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처음 부르게 된 곳은 지금 내전(內戰)으로 고통 받고 있는 시리아의 안디옥이다(행11:26). 안디옥은 스데반의 박해로 흩어진 사람들에 의해 최초로 이방인 교회가 세워진 곳이다(행11:19~21). 그리스도인이란 명칭은 이 지역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신자에게 붙여준 이름이다. 물론 부정적인 의미로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러니 ‘예수쟁이’, 혹은 ‘예수에게 미친 사람들’ 정도의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신자를 ‘예수쟁이’라고 불렀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수 마니아’인 셈이다. 이 단어는 우리에게 당시 신자들이 어떻게 주님을 믿고 따랐는가를 가늠하게 해준다. 예수에게 미친 사람들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주님을 사랑하고 섬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 곧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마니아다. 예수님을 미치도록 좋아하는 사람들, 아니 예수님에게 미친 사람들이다. 안디옥 교회 신자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였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데, 정말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을까?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을 미치도록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미치도록 좋아하고 있는가?

 

예수 마니아, 바울

오늘 본문에 죄수 바울이 나온다. 26장은 그가 유대총독 베스도와 유대왕 헤롯 아그립바 앞에서 자신을 변론하는 장면이다. 내용은 왜 자신이 이렇게 법정에까지 서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소망(예수님) 때문이라는 것이다(6,7).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이 약속과 소망의 증인이 되었는지 자신의 놀라운 체험을 중심으로 변론했다(9~23). 이것은 변론이라기보다 한 편의 감동적인 설교였다. 그리고 본문은 이와 같은 그의 변론에 대한 총독과 왕의 반응이다. 우선 총독의 반응은 한 마디로 ‘바울이 미쳤다.’는 것이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24).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로마 정치인(총독)의 눈에 바울은 지식이 지나쳐 꼭지가 돌아버린 사람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바울이 경험했다는 신비적인 체험도 그렇지만 이미 30년 전에 자신들의 법에 의해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나사렛 예수가 다시 살아나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 빛(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바울이 지식이 지나쳐 헛것을 보고, 헛것을 듣는 미치광이로 간주한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이런 주장은 틀리지 않았다. 바울은 분명히 미쳤다. 그는 예수님께 미쳤다. 그는 주님과 주님의 복음을 미치도록 사랑했다. 그는 진짜 ‘예수 마니아’였고, ‘복음 마니아’였다(행20:22~24, 21:13). 특히 그는 본문에서 법정을 교회처럼 만들어버렸고, 변론을 간증설교처럼 했다. 그리고 아그립바 왕을 복음으로 설득하였다. 총독과 왕 앞에서 자신의 무죄를 변호할 수 있는 기회를 복음전파의 기회로 삼았다. 이런 그의 모습은 그가 얼마나 주님과 주님의 복음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인지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는 평생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임할 것이라는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복음전파를 부득불해야 할 사명’(고전9:15)으로 여겼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전파에 항상 힘쓰라.’(딤후4:2)고 명령했다.

 

미쳐야 이긴다.

사람들이 어떤 일에 실패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지식이 없고,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다. 경험이 부족하고, 자본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두려움 때문이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두려움이 우리를 염려하게 만들고, 두려움이 낙심하여 무너지게 만든다. 두려움이 비겁한 겁쟁이로 만들고, 두려움이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실패자로 만든다. 두려움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콜레라가 한창 유행하던 중세시대에 한 농부가 마차를 몰고 성을 향해 가고 있었다. 갑자기 한 부인이 나타나 농부에게 성까지 태워달라고 부탁했다. 농부는 그 부인을 마차에 태웠다. 그런데 한참을 가다가 느낌이 이상해서 농부가 부인의 정체를 물었다. 그러자 부인은 자신이 ‘콜레라’라고 했다. 그러면서 성에 있는 사람들을 죽이러간다고 했다. 놀란 농부는 태우고 갈 수 없으니 당장 내리라고 했다. 부인 역시 자신을 태워주지 않으면 당장 죽이겠다는 위협으로 맞섰다. 그래서 농부는 부인에게 타협을 제시했다. ‘그러면 한 가지 약속해주시오. 당신을 성까지 태워줄 테니 꼭 다섯 명만 죽이시오.’ 부인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그들이 성에 도착했을 때 이미 천여 명이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죽어있었다. 이를 본 농부는 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냐고 화를 냈다. 그러자 콜레라 부인이 말했다. ‘난 아직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소. 이들은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지레 겁을 먹고 죽은 사람들이오.’ 콜레라보다 더 무서운 것이 콜레라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로마에서 사도바울의 일상을 소개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고 거침없이 가르치더라.”(28:31). 여기에 주님과 주님의 복음에 대한 바울의 태도가 잘 나타나고 있다.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로마까지 끌려와서 제판을 기다리는 동안 셋집에 구금되어 있었다. 물론 사람을 자유롭게 만날 수는 있었지만 재판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미래가 불확실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찾아온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고 거침없이’ 가르쳤다. 주님과 주님의 복음 때문에 이런 곤경에 처해 있으면서도 여전히 담대하고 거침없이 이를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본문에서도 마찬가지다. 주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붙잡혀서 예루살렘과 가이사랴를 오가면서 재판을 받고 있고, 유대인의 모함과, 심지어는 그를 죽이기 전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겠다고 맹세한 40명의 암살단이 활동하고 있는 상황인데도 법정에서까지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29절은 담대하고 거침없는 그의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총독과 왕, 그리고 법정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묶인 상황도, 총독도, 왕도, 죽이겠다고 날뛰고 있는 사람들도 그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주님에 대한 미친 사랑, 복음에 대한 미친 열정이 그에게서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고 그를 담대하고 거침없이 만든 것이다. ‘지치면 지고, 미쳐야 이긴다.’는 말이 있다. 참으로 멋진 말이다. 미쳐야 이긴다. 주님께 미쳐야, 주님의 복음에 미쳐야 세상을 이기고, 환경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자기 자신을 이길 수 있다. 이기적인 욕심을 이기고, 영적 방향을 잃게 하는 분주함을 이길 수 있다. 영적 게으름을 이길 수 있다. 환난도, 핍박도, 곤고도, 시험도, 권세도,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저와 여러분이 이런 멋진 신자가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어디서나 어느 때나 누구에게나 담대하고 거침없이 주님과 주님의 복음을 위해 힘쓸 수 있기를 바란다.

 

식물(植物)신앙, 식물(植物)신자

철학자 하이데거는 일상성에 갇혀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지 못한 사람을 ‘일반적인 인간’(Das Mann)이라고 했다. 이들에게는 특징이 있는데, 첫째는 말하기를 좋아하고, 둘째는 모든 일에 호기심이 많고, 셋째는 애매하고 모호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 중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세 번째, ‘애매하고 모호하게 살아가는 존재’라는 말이다. 이 말은 어떤 진리나 확고한 인생관, 삶의 목표가 없이 하루하루를 그냥 살아간다는 뜻이다. 과연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이 보람도 없이 산다. 의미도 긍지도 느끼지 못하고, 성취감도 없이 살아가고 있다. 사실 이것은 식물인간처럼 숨만 쉬고 있을 뿐 산 것이 아니다. 신자들 중에도 이런 사람이 많다. 신자인지 아닌지 가늠이 매우 어려운 애매하고 모호한 신자가 많다. 이런 신자가 곧 ‘식물’신자다. 그러므로 이런 인생, 이런 신앙을 극복하려면 부를 수 있는 노래, 흔들 수 있는 깃발, 목숨을 걸 수 있는 목표가 있어야 한다. 바울처럼 주님과 주님의 복음이 부를 수 있는 노래, 흔들 수 있는 깃발, 목숨을 걸 수 있는 목표가 되기를 바란다. 이것이 식물신앙, 식물신자에서 깨어나는 비결이다.

 

지금은 실패한 사상이 되었지만 공산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이다. 공산주의에 미친 한 청년이 공산주의 운동에 헌신하기 위해 애인에게 헤어지자고 편지를 보냈다. 이 시간 그 편지를 소개하고 설교를 마치려고 한다. 신자로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사망률이 높습니다. 총에 맞고 교수형을 당하고 조롱당하고 직업을 잃고 있습니다. 우리 중 상당한 수는 이미 죽었거나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가난하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집, 좋은 자동차를 가질 여유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의 모든 시간, 모든 재산, 모든 재능을 아낌없이 당을 위해 바칩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가리켜 광신자라고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광신자입니다. 우리의 삶은 오직 하나의 목적, 세계 공산화의 노력에 의해 지배되고 있습니다. 내가 죽도록 갈망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공산주의가 실현된 세상입니다. 그것은 이제 내 삶이요, 내 사업이요, 내 종교요, 내 취미요, 내 연인이요, 내 아내요, 내 애인이요, 내 빵이요, 내 고기입니다. 나는 낮에 그 일을 하고, 밤에는 그것을 꿈꿉니다. 나에게 이제 이 비전을 떠나서는 나의 어떤 다른 인생도, 우정도, 사랑도, 대화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이 이상을 위해 감옥에 갇힐 준비가 되어있고 필요하다면 사형대에 갈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허무한 이데올로기 사상을 위해서도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가난해질 각오, 고난 받을 각오, 죽을 각오를 하고 미치도록 추종하는 사람이 있는데, 우리를 위해 피 한 방울 물 한 방울 남김없이 다 쏟으시고 구원해 주신 주님을 위해 우리가 포기한 것이 무엇인가? 어떤 각오를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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