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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의 통로30, ‘爲信日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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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1건 조회 14,051회 작성일 12-09-02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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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의 통로30, ‘爲信日損’

전2:1~11

2012. 9/2. 08:00 11:00

그런데 왜 늘 부족할까?

길은 사고가 나도 막히지만 차가 너무 많아도 막힌다. 우리의 생활도 마찬가지다. 세탁기가 없던 시절에는 빨래를 하려면 동네 우물이나 냇가에 가서 빨래를 해오곤 했다. 그 때는 세제도 변변치 못했다. 지금은 집집마다 세탁기가 있고, 또한 세탁소가 있어서 빨래를 대신해 준다. 그런데 왜 세탁기와 세탁소에 맡겨 세탁을 하며 사는 요즈음 사람들이 더 힘들까? 이유는 옷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옛날엔 세탁기도 없었지만 빨 옷도 없었다. 지금은 세탁기는 있지만 옷이 너무 많아졌다. 넓은 평수의 집에 살면서도 집이 좁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꾸 집의 평수를 늘리려고 한다. 왜 그럴까? 식구가 많아서? 아니다. 사람이 많은 것이 아니라 물건이 많기 때문이다. 걸 곳이 없을 만큼 옷이 넘쳐나고, 신발장에 신발이 넘쳐난다. 옷과 신발뿐만이 아니다. 찬장엔 그릇이 가득하고, 냉장고에는 음식이 차고 넘쳐 빈자리가 없다. 물론 가난한 시절, 못 입고, 못 먹던 때를 생각하면 이런 모습에 즐거운 비명이라도 질러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차가 너무 많아 길이 막히듯 너무 많은 물건들 때문에 집과 우리의 삶이 포화상태가 되고 말았다. 마치 물건에 의해 집안이 정복을 당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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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넉하게 살고 깨끗하게 살려면 버려야하고, 비워야하고, 나눠야하고, 덜 사야한다. 그러면 20평도 30평처럼 될 것이다. 비우지는 않고 모으고 쌓아 두기만 하니까 30평도 20평처럼 되고 만 것이다. 그래서 자꾸 껍데기만 넓히려고 안간힘을 쏟다보니 삶이 팍팍하고 여유가 없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마음과 인생도 마찬가지다. 욕심이 가득차서 우리를 답답하게, 복잡하게, 골치 아프게, 둔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욕심을 줄이고 버리면 잘 뚫린 고속도로처럼 신나게, 기분 좋게, 빠르게 달릴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넘쳐도 모자란다고 아우성치는 욕심 때문에 늘 부족하고, 그 부족을 채우려다보니 여유가 없는 분주한 삶만 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소유를 늘리기 위하여 채우는 것보다 욕심을 줄이기 위하여 비우는 것에 집중한다. 노자는 자신의 영달을 위한 학문의 길은 ‘날마다 채워가는 것’(爲學日益)이고, 자신을 깨우치는 도의 길은 ‘날마다 비워가는 것’(爲道日損)이라 했다. 신앙의 길 역시 채움의 길이 아니라 ‘비움의 길’이다. 신앙은 자신의 영달이 목적이 아니고 자신을 깨우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간은 복의 통로 서른 번째, ‘爲信日損’(신앙은 날마다 나를 비운다는 뜻)라는 제목으로 ‘비움’에 대하여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헛된 즐거움, 헛된 성취

본문은 한 마디로 ‘채우는 삶의 헛됨’에 대한 솔로몬의 고백이다. 우선 솔로몬은 육신의 즐거움을 위하여 쾌락을 추구했다. 그는 8절에서 “은 금과 왕들이 소유한 보배와 여러 지방의 보배를 나를 위하여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들과 인생들이 기뻐하는 처첩들을 많이 두었노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쾌락이 헛되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된다(2). 그러자 그는 세속적인 성취로 눈을 돌린다(4~7). 그는 일의 성취를 위해 최선을 다했고(10下), 전무한 업적을 이루는 큰 성취를 경험했다(9). 하지만 그는 11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세속적인 즐거움, 세속적인 성취가 모두 헛되고 무익하다는 말이다. 즉 채우는 삶의 헛됨에 대한 말씀이다. 주보 글에서 소개한 모파상의 경우가 좋은 예다(주보 참조).

 

이와 같은 솔로몬의 고백이나 모파상의 삶은 오르막에서 인생의 성공을 찾고, 채우는데서 삶의 행복을 찾고, 성취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고 있는 사람들에게 심각한 도전을 준다. 노자는 ‘현란한 색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어지러운 소리는 사람의 귀를 먹게 하고, 기름진 음식은 사람의 입을 상하게 한다.’(五色令人目盲,  五音令人耳聾,  五味令人口爽)고 했다. 눈을 즐겁게 하는 것들이 눈을 멀게 하고, 귀를 즐겁게 하는 것들이 귀를 먹게 하고, 입을 즐겁게 하는 것들이 입을 상하게 한다는 뜻 아니겠는가? 한 마디로 세속적인 것들의 한계를 강조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참으로 깊이 새겨 둘 말이다. 채우는 일에만 집중하면 정말 아름다운 것, 정말 귀한 것, 정말 좋은 것을 보지도 듣지도 경험하지도 못하게 된다. 하지만 내려놓고 포기하고 비우면 아름다운 것들이 보이고 소중한 것들이 들리고 좋은 것들을 경험하게 된다. 해 아래 살고 있지만 해 위에 있는 것들을 보게 되고 듣게 되고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의 행복은 오르막과 채움과 성취에 있지 않다. 오히려 오르막보다는 내리막에서, 채움보다는 비움에, 성취보다는 성취의 과정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해 아래서 사는 인생이지만 해 위를 바라보게 되고, 이 땅의 헛된 즐거움과 헛된 성취가 아니라 주님 안에 있는 영원한 즐거움과 복을 기대하고 바라보는 복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비움의 중요성

요즈음 일본에서는 덜 필요한 것을 차단하고, 쌓아둔 것을 정리하여 보다 여유로운 삶을 살자는 ‘단사리 열풍’이 한창이라고 한다. ‘단사리’란 끊고(斷), 버리고(捨), 떼어놓다(離)는 뜻으로 집착을 버리고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는 요가수행법에서 유래한 말이다. 단사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역시 ‘비움’이다. 소유에 대한 욕심과 집착이 마음을 어지럽히고 불행을 부르는 주범이다. 채움으로 지치고 피곤한 마음, 비움으로 쉼과 평안을 경험할 수 있다. 이것은 일상뿐만 아니라 영적인 삶에도 마찬가지다.

 

비움은 채워짐을 위한 준비이다.

잡동사니를 처분하게 되면 기분이 좋아진다. 처분한 만큼 새로운 공간이 마련되고, 그 공간으로 새로운 물건, 새로운 가치나 에너지, 사람이 들어오게 되기 때문이다.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비움은 창조력을 자극한다. 낡은 생각을 떨쳐 낼 때 새로운 생각이 순환될 공간이 마련된다. 그래서 비움을 이렇게 정의한 사람이 있다. ‘비움은 채움의 반대말이 아니라 채워질 공간의 기다림이다. 내 삶을 채울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일이다.’ 그렇다. 비움은 올바른 채움, 새로운 채움을 위한 공간 확보다. 내 삶을 채워줄 누군가를 위해 방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 나아가서 새로움에의 도전이 비움이다.

 

빈 공간이 있어야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있다. 세속적인 욕심을 비울 때 주님의 새로운 은혜가 임하게 되고, 자기 의를 버릴 때 주님의 의가 주어진다. 자기 능력을 포기할 때 주님의 능력이 주어지고, 세속적인 땅의 지혜를 비울 때 하늘에 속한 신령한 영적 지혜로 채워지게 된다. 그러니 비움은 새로운 가치를 끌어들이기 위한 준비이고, 기대/기다림이고, 도전이다. 이것이 비움의 중요성이다. 이는 비운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이미 채워진 곳은 채움을 위한 준비도 없고, 기대나 기다림도 없고, 새로운 것으로 채울 수도 없다. 비움이 있는 곳에 준비가 있고, 기대와 기다림이 있고, 갈망이 있고, 간절함과 사모함이 있다. 이러한 심령과 영혼, 장소에 주님이 임하시고, 주의 성령, 은혜, 능력, 사랑이 임한다. 이것이 신자의 자세, 특히 예배자의 자세다.

 

비움은 기독교 영성의 시작이다.

기독교의 영성은 비움에서 시작된다. 이는 주님께서 친히 모범을 보이신 일이다. 주님은 하늘을 비우셨고, 권능의 보좌를 비우셨고, 생명까지 비우셨다.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비우셨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주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이는 일생 비움의 삶을 사셨던 주님에 대한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다. 주님은 자신이 그렇게 사셨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그런 삶을 요구하셨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고 하셨다. 세상을 움켜잡고는 주님을 따를 수 없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끊임없는 자기부인의 길이기 때문이다. 헌신을 위해 자기를 부인한 사람만이 주님을 따를 수 있고, 섬길 수 있고, 닮을 수 있고, 거기에 새로운 가득함이 있다. 결코 속지 말아야 한다. 사단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은 우리에게 소유가 미덕이고, 그것이 삶의 스펙이라고 속삭인다. 그래서 채우는 일에만 우리의 삶을 집중하고 집착하게 만든다. 그러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는가?

 

신앙은 비움이다.

비움은 채우기 위함이고, 채움은 또 다른 헌신을 위한 비움이다. 비움은 회개다. 회개는 변화다. 겸손으로 낮아짐으로 종으로 십자가로 죽음으로의 변화다. 그러므로 신앙은 비움이다. 욕심, 교만, 미움, 분노, 시기, 불신, 원망과 불평, 나아가서 자기의 의, 지혜, 열심, 경험을 버리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다. 주님의 복과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은 빈 손이 되어야하고, 빈 마음이 되어야한다. 바로 그 빈 곳에 주님의 복과 은혜가 부어지게 된다. 믿음의 사람은 무엇인가를 움켜쥠으로 위대해 지는 사람이 아니다. 비우고 버리고 떠남으로 주님의 영성을 채워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7~9上).

 

주님으로,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주님의 사랑으로, 주님이 주시는 평강과 기쁨으로 충만하기 위하여 세속적인 모든 것을 해로운 배설물로 여기며 비워냈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울이 오직 주님으로만 충만한 인생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이다. 우리 모두 이런 아름다운 포기, 이런 거룩한 비움의 삶을 살자. 이런 사람에게, 또한 이런 곳에 주님의 복이 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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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FONT-SIZE: 14px">금주의 명언</span>


 


              <span style="FONT-SIZE: 16px"><strong>"비움은 올바른 채움, 새로운 채움을 위한 공간 확보이다."</strong></sp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