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의 통로20, ‘믿음의 생각’ > 설교말씀 기뻐하는교회 - 대한예수교장로회

본문 바로가기

설교말씀

설교말씀 HOME


복의 통로20, ‘믿음의 생각’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7,272회 작성일 12-06-24 14:25

본문

복의 통로20, ‘믿음의 생각’

잠23:7

2012. 6/24. 08:00  11:00

생각이 중요하다.

어려서 저의 아버지가 들려주었던 이야기 중에 사명대사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일본에 건너간 대사가 왜병들에게 붙잡혀 철통에 갇혔다. 왜병은 장작 위에 철통을 얹어놓고 불을 지폈고, 많은 시간이 흐른 뒤 철통의 뚜껑을 열었는데, 모두들 깜짝 놀라고 말았다. 새까맣게 타 죽었을 것으로 생각했던 대사가 타죽기는커녕 수염에는 고드름이 대롱대롱 매달려있고 추위에 벌벌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사는 뜨거운 철통 속에 갇혀 있으면서 오히려 차갑다는 생각을 줄곧 했던 것이다. 그러자 철통이 뜨거워진 것이 아니라 추워서 고드름이 열리는 일까지 생겼다. 물론 저의 아버지는 사명대사의 신통력을 강조하기 위해서 해준 이야기였다. 하지만 저는 여기서 생각의 힘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생각에는 놀라운 힘이 있다. 행복한 일을 생각하면 행복해지고, 비참한 일을 생각하면 비참해진다. 무서운 일을 생각하면 무서워진다. 질병을 생각하면 병이 들고, 실패를 생각하면 반드시 실패한다. 그러므로 자신을 세우거나 무너뜨리는 것은 타인이나 그 무엇이 아니라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의 틀’이다. 더 나아가서 그 생각의 틀을 누가 주관하느냐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아무튼 우리는 자주하는 생각, 반복적인 생각, 습관적인 생각, 지배적인 생각, 주도적인 생각이 나의 현실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에 좋은 먹이를 먹여야한다. 그래야 좋은 생각을 품게 되고, 좋은 감정, 좋은 행동을 하게 된다. 그래서 저는 요즈음 ‘모든 것이 주님 안에서 ①잘되고 있다. ②잘될 것이다. ③잘될 수밖에 없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적극적인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자기암시가 아니라 ‘믿음’(롬8:28)에 기초한 신앙적인 확신이고, 고백이다. 이 시간에는 복의 통로 스무 번째, ‘믿음의 생각’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생각이 곧 그 사람이다.

중세 어느 수도원의 원장이 바구니 안에 꽃을 담아 제자들에게 물었다. ‘이것이 무슨 바구니인가?’ 제자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꽃바구니’하고 대답했다. 원장은 꽃을 들어내고 생선을 바구니에 담고 똑같이 물었다. 제자들 역시 ‘생선바구니’하고 대답했다. 이에 원장은 이런 가르침을 주었다. ‘맞다. 똑같은 바구니이지만 꽃을 담으면 꽃바구니, 생선을 담으면 생선바구니가 된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그 안에 쓰레기가 담겨 있으면 쓰레기 같은 사람이 되고, 그 안에 향기 나는 꽃이 담겨 있으면 향기 나는 사람이 된다.’ 그 사람의 마음이 무엇을 품고 있느냐, 그 마음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됨됨이다. 그래서 본문은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23:7).

 

생각 가꾸기

생각이 곧 그 사람이라는 뜻이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부정적인 사람이 되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 긍정적인 사람이 된다. 육신의 생각을 하면 육에 속한 사람이 되고, 영의 생각을 하면 영에 속한 사람이 된다. 병이 없고 몸이 성한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 아니다. 생각이 건전하고 건강해야 건강한 사람이다. 생각이 비뚤어지고 좋지 않으면 비뚤어지고 좋지 않은 사람, 하는 생각마다 악하고 고약하면 악하고 고약한 사람이다. 음흉하고 불결한 생각을 품고 사는 사람은 음흉하고 불결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신앙적 생각, 성경적 생각, 복음적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영의 생각을 품은 영에 속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마귀와 세상과 육체와 죄를 이길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가 있다. 문제는 어떻게 우리 마음에 좋은 생각, 즉 영적인 생각을 담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을 가꾸는 것이 필요하다. 잘 정돈된 정원도 가꾸지 않으면 잡초가 무성하듯 사람의 생각 또한 마찬가지다. 사실 사람의 생각은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불허의 요소가 있다. 어제 생각이 다르고 오늘 생각이 다르다. 심지어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생각이 다르다고 한다. 그것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우리의 감정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감정의 변화에 따라 생각이 요동을 치는 것이다. 그러면 감정의 변화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좋은 생각, 믿음의 생각을 소유하려면 어떻게, 무엇으로 가꿔야 하는가?

 

1. 생각의 틀을 변화시키는 ‘믿음’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W. James)는 ‘생각을 바꾸면 감정과 행동도 바꿀 수 있다’는 모델을 제시했다. 그는 이를 ‘TFA모델’이라고 불렀는데, 사람은 먼저 ‘생각’(thinking)하고, 그 생각의 결과로 ‘느끼고’(feel), 그 다음에 그 느낌에 근거하여 ‘행동’(action)을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생각에 변화만 주면 느낌과 행동을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무엇으로 그 생각을 변화시키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인지심리학자 앨버트 엘리스(A. Elis)는 ‘어떻게 그 생각을 바꿀 수 있을까’에 주목을 하고, 그는 여기에 ‘믿음’(belief)을 첨가했다. 그는 믿음을 ‘생각의 근원’로 생각한 것이다. ‘믿음’(belief)은 ‘생각’(thinking)을 낳고, 생각은 ‘느낌’(feel)을 낳고, 그리고 그 느낌은 ‘행동’(action)을 낳는다는 이른바 ‘BTFA모델’을 만들었다. 건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면 부정적인 생각, 느낌, 그리고 행동을 탈피해서 긍정적인 생각, 느낌을 가지고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믿음이 생각을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엘리스가 말한 믿음은 우리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이 가지고 있는 세상과 삶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이다. 신념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기독교적 믿음으로 적용할 수 있다. 사실 우리 기독교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생각뿐만 아니라 존재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 믿음이다. 그러므로 좋은 생각, 건강한 생각, 믿음의 생각을 가지려면 이 믿음을 가져야 한다. 언약의 말씀에 기초한 믿음, 주님이 함께 하시면 승리할 수밖에 없다는 승리를 확신하는 믿음, 주님이 도우시면 모든 것이 잘 될 수밖에 없다는 믿음,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믿음을 가질 때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절대긍정의 생각을 품을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사7:9)고 하신 것이다. 믿음이 있어야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니 믿음의 생각을 가져야 절대긍정의 생각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의 생각을 품을 수밖에 없고, 그 인생은 형통하고 잘되는 복된 인생이 될 수밖에 없다. 믿음은 우리에게 건강하고 올바른 생각의 틀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2. 생각의 틀을 주관하는 ‘말씀’

우리의 생각이 주님의 말씀대로 작동되도록 프로그램화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말씀을 매일 묵상하고, 그 말씀이 내 생각을 사로잡도록 하는 것이다. 인간은 타락이후 부정적인 환경에서 태어나 부정적인 환경 속에 살고 있고,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 마음에 부정적인 생각을 집어넣는다. 하와의 타락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뱀으로 위장한 사단이 하와에게 접근하여 한 일이 무엇인가?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갖도록 한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던 하와는 사단의 계책에 무너지고 말았다(창3:1~6). 우리의 삶에서 가장 치열한 전쟁터가 마음의 생각이다.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꾸지 않고 가만두면 사단의 진지로 점령당할 수밖에 없고, 온갖 더럽고 추악한 생각들을 품게 하여 우리의 삶을 무너뜨리고 만다. 인간을 무너뜨리는 것, 실패하게 하는 것이 사단의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을 선하다고 주장한 사람이나 악하다고 주장한 사람이나 공통적으로 강조한 것이 ‘교육’이다. 교육을 통해서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가꾸지 않으면 악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타고난 이기적인 마음이 본래의 악한 욕망을 따르도록 방치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나 인간의 유익을 생각하지 않고, 고상한 동기에서 벗어난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 생각은 한 번에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악할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생각의 습관을 키워야 하고, 건전한 방향에서 생각하는 훈련을 해야 하고, 악한 생각은 그 모양이라도 버려야 한다. 그래서 말씀묵상훈련이 필요하다. 말씀묵상훈련이란 매일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포맷하는 것이다. 마음속에서 돋아나고 있는 악한 자가 뿌려놓은 쓴 뿌리를 제거하는 것이다. 성경이 말씀을 ‘불과 방망이’(렘23:29)에 비유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악한 자의 계획과 악한 자가 심어놓은 모든 악한 생각들을 산산이 부서뜨리고, 그것들을 모아서 완전히 태워 없애는 것이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쁜 생각, 악한 생각, 더러운 생각, 어리석은 생각, 부끄러운 생각, 이 모든 부정적인 생각들의 뿌리를 뽑고 제거하는 방법은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다. 아울러 선한 생각, 아름다운 생각, 믿음의 생각, 긍정의 생각을 배양하는 것도 말씀이다. 믿음이 생각의 틀을 바꾸는 일이라면 말씀묵상은 생각의 틀을 주님이 지속적으로 다스리시도록 주님께 내어드리는 것이다. 정말 생각이 중요하다. ‘우리의 오늘은 어제 생각한 결과이고, 우리의 내일은 우리가 오늘 무슨 생각을 하느냐에 달려있다.’

 

생각이 삶의 차이를 만든다.

미국 심리학회가 쌍둥이의 의식흐름과 그들의 생활을 연구 발표한 고전적인 사례가 있다. 알코올 중독자이고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만 주는 인간쓰레기 취급받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쌍둥이 형제가 있었다. 그 형제를 추적해보니 형은 아버지와 꼭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동생은 훌륭한 변호사에 지역유지로, 이웃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을 각각 인터뷰하였는데. 형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그 모양인데 낸들 별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고, 동생은 ‘나는 절대 아버지처럼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이런 단순한 생각의 차이가 삶의 차이를 만든 것이다. 서양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생각이 멈춘다는 것은 사람의 존재의미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사람으로 존재하는 한 누구든지 쉬지 않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생각이 사람의 차이, 삶의 차이를 만든다. 우리는 흔히 선한 생각을 가진 사람을 선한 사람, 거룩한 생각을 가진 사람을 거룩한 사람, 경건한 생각을 가진 사람을 경건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러니 어떤 생각, 무슨 생각을 품고 사느냐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그 생각을 잘 다스리고 가꿔야하고, 그것은 주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꾸준한 말씀묵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것이 경건하고 거룩한 믿음의 생각을 가진 복된 인생이 되는 비결이다. 이런 생각을 퍼뜨리는 것이 복의 통로가 되는 길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