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의 통로19, ‘경건한 두려움’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5,912회 작성일 12-06-17 14:17본문
복의 통로19, ‘경건한 두려움’
시2:1-12
2012. 6/17. 08:00 11:00
무엇에 대한 두려움인가?
사람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큰 힘 네 가지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①두려움, ②믿음, ③소망, ④사랑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힘을 작용하는 것이 ‘두려움’이다. 특히 두려움은 사람의 행동과 삶에 영향을 준다. 그것이 행복의 원인이 될 수도 있고, 불행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사실 두려움 때문에 사업에 실패를 하고, 시험에 떨어지고, 경기에서 지기도 한다. 미신을 숭배하는 것도 모두가 두려움 때문이다. 사실 모든 종교에는 두려움 때문에 숭배하고,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숭배하는 요소가 있다. 그리고 두려워서 죽는 사람도 많다. 양차(兩次) 세계대전 후에 유럽에서 전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죽은 사람이 전쟁에서 죽은 사람보다 많다고 한다. 질병의 원인에 대해 어떤 저명한 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대부분의 신경쇠약증은 질병을 두려워하고 상상하는데서 비롯된다.’ 두려움이 곧 질병의 원인이라는 말이다. 두려워하는 자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두려움은 믿음을 사라지게 하고, 소극적이고, 자신감이 없고, 소신이 없는 사람으로 만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카멜레온이 여러 색으로 변신하는 이유를 지나친 두려움 때문이라고 했다. 두려움이 카멜레온의 몸 색깔을 바꾸듯이 믿음과 신념을 쉽게 저버리게 만든다. 그러므로 두려움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한 불신앙의 한 모습이고, 세상과 어둠의 영에 눌려있다는 징표이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하지만 두려움에는 경건한 두려움이 있다. 이를 ‘경외’(敬畏)라고 한다. 경외란 거룩하신 하나님을 우러러보고 존중하는 마음을 뜻한다. 항상 하나님의 거룩하신 눈길 앞에 자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태도다. 경외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최고의 존경의식으로 나의 철저한 깨어짐이고, 가장 진솔한 의미의 겸손이다. 그러므로 경외는 경건한 신자의 의무이자 태도다. 주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 사랑의 표현이다. 그리고 경외는 모든 복의 통로다. 그래서 이 시간 복의 통로 열아홉 번째, ‘경건한 두려움’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라!
시편 2편은 대표적인 메시야 시로 하나님께서 시온 산에 세우신 왕과 세상의 왕이 대조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과 화평한 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이는 시편 전체의 중요한 주제이기도하다. 특히 여기에 그 왕을 섬기는 태도를 언급하고 있는데,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하는 것’(11)이다.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도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 경건한 두려움과 함께 경건한 즐거움으로 섬기는 것이다. 경건한 두려움은 신자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신자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두려움이 본성으로 뿌리를 내려야한다. 그러면 왜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두려움을 가져야 하는가?
1. 하나님의 눈이 우리를 살피시기 때문이다(4).
어느 수도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원장이 제자들 중에서 한 아이를 유난히 사랑했다. 그 아이는 볼품도 없고, 지능이 뛰어나지도 않은 아이였다. 제자들이 이를 의아하게 생각하자 원장이 다음과 같은 문제를 해결하면 그 이유를 말해주겠다고 했다. 원장은 제자들에게 새를 한 마리씩 주고는 아무도 안보는 곳에서 해질 때까지 그 새를 죽여가지고 오라고 했다. 해질 녘이 되자 제자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수도원 마당에는 새의 시체가 쌓였다. 그런데 원장이 사랑하는 아이가 돌아오지 않았다. 한참 뒤에 돌아온 아이의 손에는 새가 산 채로 있었다. 그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원장님께서는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새를 죽이라고 하셨는데, 아무리 조용하고 으슥한 곳을 찾아보아도 하나님은 보고 계셨어요. 그래서 새를 죽일 수가 없었어요.’
이것이 원장이 이 아이를 특별히 사랑한 이유다. 못났지만 부족하지만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가고 있는 점이다. 하나님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치를 살피며,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이 안 보면 아무도 안 본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만 속이면 다 속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안 본다고 아무도 안 본 것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人間私語 天聽若雷 暗室欺心 神目如電). 경건한 두려움은 이런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경건한 두려움은 임재의식에 비례한다. 그래서 경건한 두려움이 복인 것이다. 항상 하나님에 대한 임재의식으로 충만하기 때문이다. 본문을 보라. 세상의 왕들이 하나님이 세우신 왕을 해하기 위해 악한 의도와 계획을 가지고 악한 일을 도모하려고 하지만 그 모두가 하나님께 들통이 나고 말았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들을 비웃고 진노했다(2~4).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감찰하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낱낱이 살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속일 수 없고, 그 앞에서 아무것도 감출 수 없다. 그래서 두려운 것이고, 또한 두려워해야 한다. 참된 신앙이란 일상에서 주님의 숨길, 눈길, 손길을 느끼는 것이고, 이런 사람은 자석이 떨면서 남북을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주님을 향하여 경건한 두려움을 갖는다.
2.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것(하나님 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2).
이스라엘 사사시대 말기에 ‘엘리’라는 제사장이 있었다. 그에게 홉니와 비느하스라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삼상2:12). ‘행실이 나쁘다’는 것은 경건하지 못하다는 뜻이고, ‘알지 못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 권위에 순종치도 않았다는 뜻이다. 그들은 제사장의 아들이고, 자신들 역시 제사장이면서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않고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도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제사와 제물을 더럽히고(삼상2:17), 하나님이 계시는 성소를 더럽혔다. 그러고도 살기를 바랄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의 이와 같은 태도에 대하여 하나님은 그들은 물론 자식들이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한 엘리 제사장과 그의 가문을 벌하기로 작정하셨다. 그러면서 엘리에게 주신 말씀이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2:30)고 하셨다. 그리고 이후 성경은 하나님을 멸시하고 우습게 여기는 것이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인가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삼상4:).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시대,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심지어 신자들까지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때문에 죄를 두려워하기는커녕 죄를 가볍게 여기고, 심지어 죄를 조장하고 미화하기까지 하여 죄악이 관영하는 시대가 되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어떻게 죄를 두려워하지 않고, 저주를 퍼붓고, 불결한 행위를 저지르고, 거짓 증거를 일삼고, 이웃을 속이고, 순결을 우습게 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처럼 여기고, 나타나는 하나님의 징조를 무시하고, 모략을 꾸미고, 원망과 불평을 일삼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멸시하고, 거룩한 예배를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어느 성서학자가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땅에 뿌려진 후 신자들을 죽이고 박해한 사람들의 말로(末路)를 연구했다. 삼십 명의 로마인을 대상으로 연구했는데, 그들의 최후가 놀랍게도 비참하게 된 것을 발견했다. 어떤 사람은 정신 착란증에 걸리고, 어떤 사람은 자기 아들에게 살해되고, 맹인이 되고, 물에 빠져죽고, 괴로운 고질병에 걸려죽고, 자살하고, 전쟁포로가 되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경외란 깊은 존경과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존중히 여기는 태도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업신여기는 것이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것,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이다. 이 모두가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12)는 말씀 속에 함축되어 있다. 경건하고 거룩한 삶, 건강한 신앙생활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성경에서 심판의 주인공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이고, 축복의 주인공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다. 본문말씀처럼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하는 것이 주님의 은혜 안에서 형통하고 풍성한 삶의 비결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경외하는 사람을 기뻐하시고, 귀하게 여기시고, 그에게 귀를 기울이시고,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다.
경건한 두려움은 임재의식에 비례한다.
두려움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앙의 한 모습이다. 또한 세상과 어둠의 영에 눌려있다는 표징이다. 하지만 경건한 두려움은 정체성에 대한 강한 인식과정에서 나타나는 축복의 감정이다. 존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두려움을 동반하기 때문이다(눅5:1~).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인간은 강한 두려움을 느끼는데(사6:5),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최고의 존경의식이다. 그것은 나의 철저한 깨어짐이고, 가장 진솔한 의미의 겸손이다.
우리와 늘 함께 하시며 무소부재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늘 두려움이라는 겸손의 감정을 유지해야한다. 한 영혼을 바라볼 때, 경건한 두려움으로 보아야한다. 그 영혼 속에서 그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고, 그 영혼을 위해 피 흘리신 주님의 십자가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얼굴을 스치는 작은 바람결에 대해서도 경건한 두려움을 느낄 수 있어야한다.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이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모든 곳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임재냄새 때문이다. 도처에 하나님의 옷자락이 덮여 있기 때문이다. 경건한 신자는 두려움으로 충만한 사람이다. 그 충만은 하나님 임재의식에 비례한다. 우리 모두 경건한 두려움을 가득 안고 기도를 드리고, 찬양을 드리고, 예배를 드리자. 그 두려움을 가득 안고 지체들과 교제를 나누고, 섬기고, 협력하고, 말도 행동도 그렇게 하자. 그 두려움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일을 준비하고, 그 일들을 진행하고, 또한 잠자리에 눕자.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경건하고 거룩한 신자의 모습이다. 이런 경건한 모습에 주님께서 복을 주신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