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의 통로21, ‘겸손한 귀 기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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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8,061회 작성일 12-07-01 15:12본문
복의 통로21, ‘겸손한 귀 기울임’
행10:24~33
2012. 7/1. 08:00 11:00
들음의 중요성
예로부터 귀를 ‘보이는 세계 너머에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로 향하는 다리’로 생각했다. 듣는 것이 그만큼 신비롭고 중요하다는 뜻일 것이다. 사람의 귀는 외이(外耳)와 중이(中耳), 그리고 내이(內耳),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귀가 세 부분으로 된 것은 남의 말을 들을 때에도 귀가 세 개인 것처럼 들어야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상대방이 ①‘말하는’ 바를 귀담아듣고, ②‘무슨 말을 하는’지를 신중히 가려듣고, ③‘말하고자 하나 차마 말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가려내어 들어야한다는 것이다. 사실 듣는 사람보다 말하는 사람이 훨씬 많은 세상에서 차분히 귀를 기울여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른다. 진정 상대방이 말하는 바를 귀담아듣고,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신중히 가려내고, 말하고자 하나 차마 말하지 못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가려내는 자세야말로 경청(傾聽)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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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ml:namespace prefix = v ns = "urn:schemas-microsoft-com:vml" /><?xml:namespace prefix = w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word" />인생은 듣기부터 시작한다. 태아(胎兒) 청각은 일반화된 사실이고, 태교는 이 사실에 근거하여 실시되고 있다. 그리고 배움도 듣기부터 시작되고, 사람의 성숙도 듣기로부터 완성된다. 귀를 기울여 잘 듣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다. 한자 성인 ‘성’(聖)자를 보면 이것이 더욱 분명해 진다. 聖(성)은 귀(耳)를 크게 열고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대답하는 입(口)을 가진 사람의 옆모습을 본떠 만든 글자인데, 말을 잘하는 사람보다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 성인이라는 뜻이다(옆 그림은 ‘聖’의 상형문자). 신앙도 듣기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10:17)고 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들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성숙한 신자란 위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옆으로는 사람을 포함한 주변 환경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이 들음이 그 사람을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부모의 말을 잘 들으면 효자가 되고, 아내의 말을 잘 들으면 좋은 남편이 되고, 남편의 말을 잘 들으면 좋은 아내가 된다. 백성의 말을 잘 들으면 훌륭한 지도자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영적으로 민감하고 영성이 깊은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 아무튼 잘 듣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복의 통로 스물한 번째, ‘겸손한 귀 기울임’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들음의 자세
한자 들을 ‘청’(聽)자를 파자(破字)해 보면 들음의 자세에 대한 아주 중요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는 ‘듣는 것을 으뜸으로 하되(耳+王)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들어라(悳=直+心)’는 의미가 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사람에게 같은 말을 들었는데,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르게 반응하는 것을 본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듣는 사람의 자세 때문이다(떡과 엿). 그래서 무엇을 듣느냐보다 어떻게 듣느냐, 듣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마13:1~9)는 듣는 자세와 깊은 관련이 있는 말씀이다. 농부가 똑같은 씨앗을 밭에 뿌렸는데, 결실을 한 밭은 좋은 땅을 가진 밭뿐이었다. 주님은 이 비유 결론으로 ‘귀 있는 자는 들으라.’(9)고 하셨다. 이는 올바른 듣는 자세를 가지라는 말씀이다. 그래야 말씀의 결실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들어야할까?
본문에 나온 가이사랴에 주둔한 로마부대의 백부장 ‘고넬료’가 좋은 모범이다. 행10장 사건은 교회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내용이다. 인상적인 성령강림사건이 행2장과 10장 두 곳에 기록되어 있다. 2장의 성령강림사건이 유대인을 중심으로 일어난 것(마가의 다락방)이라면 10장은 이방인을 중심으로 일어난 사건이다(고넬료의 가정). 그리고 행15장에서 이방인 선교문제를 주제로 최초 종교회의가 예루살렘에서 열렸는데, 이 사건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고넬료라는 한 사람의 잘 ‘들음’이 가이사랴의 성령강림사건을 가져왔고, 나아가서 선교의 지평(유대인 중심에서 이방인으로)을 활짝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면 고넬료가 어떤 자세로 말씀을 경청했기에 이런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을까?
1. 준비하고 기다림
고넬료는 기도시간에 욥바 시몬의 집에 머물고 있는 베드로를 청하라는 천사의 지시를 받았다(5). 그는 하인 두 명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한 명에게 기도시간에 일어난 일을 자세하게 알려주며 욥바로 보내어 베드로를 데려오도록 했다(7~8). 그리고 그는 베드로를 영접하여 말씀을 듣기위한 준비를 하고 기다렸다. 그 모습이 24절에 기록되어 있다.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이 한 구절이 말씀을 듣기위한 고넬료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이렇게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까지 모아 기다리고 있었던 점으로 보아 그 자신의 준비와 기다림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런 준비와 기다림은 사모하는 마음의 표현이다. 사모함이 없이는 준비와 기다림도 없다. 말씀을 듣는 가장 중요하고 아름다운 자세는 사모하는 마음으로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모든 이치가 그렇다. 준비하고 기다린 만큼 깨닫게 되고, 알게 되고, 보게 되고, 들을 수 있다.
2. 발 앞에 엎드림
고넬료는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다 모아놓고 기다리고 있다가 베드로가 오자 그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발 앞에 엎드려 절을 하며 맞이했다.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25).
여기서 ‘발 앞에 엎드리어 절을 했다’는 것은 발에 입을 맞춘다는 뜻으로, 신이나 신적인 존재로 여겼던 황제에게 보이는 태도다. 이는 고넬료의 태도에 깜짝 놀라 그를 일으켜 세우며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26)고 하는 베드로의 말을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고넬료가 베드로를 사람이 아닌 것처럼, 즉 하나님처럼 대했다는 이야기고, 그래서 베드로가 ‘나도 사람이다’고 외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 들려줄 베드로에 대한 공경의 표시고, 또한 말씀에 대한 사모함의 표현이다. 얼마나 말씀을 사모했으면 그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온 사람을 하나님처럼 받들었겠는가! 여기서 고넬료가 베드로를 존대(尊待)한 이유는 단 한 가지다. 그가 자신에게 전해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온 사람이기에 베드라는 개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로 영접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는 사람에 대한 태도가 이 정도라면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또 하나의 중요하고 아름다운 자세다. 말하는 사람에 대한 신뢰와 존중이 없이는 경청도 없다.
3. 하나님 앞에 있음
이렇게 영접을 받은 베드로는 안으로 들어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물었고(29), 고넬료는 기도시간에 자신에게 있었던, 욥바 시몬의 집에 머물고 있는 베드로를 청하라는 영적 체험을 소개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멋진 환영사를 했다.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33).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는 고넬료의 말은 참으로 놀라운 고백이다. 베드로가 전할 모든 말이 주님의 말씀이라는 것이고, 말씀을 듣고자 베드로 앞에 모여 있는 것이 곧 하나님 앞에 있다는 뜻이다. 지금부터 베드로가 전할 말씀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처럼 듣겠다는 말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전하고 있는 사람 앞에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이고, 그가 전한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자세인가? 그러니 그 자리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44).
잘 듣는 것이 복이다.
삼상1장에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기도하는 모습이 나온다. 자녀를 생산하지 못한 한나는 상한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 제사장 엘리는 한나가 술에 취하여 주정을 부린다고 생각하고 책망을 했다. 제사장이면서 간절히 기도하는 것과 술에 취한 것을 구별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제사장 엘리의 영적 상태를 보여준다. 그렇지만 뒤에 한나가 자식을 위해 기도한 줄 알고,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기를 원하노라.”(삼상1:17)고 축복했다. 그리고 한나는 영적으로 무딘 제사장의 축복의 말을 듣고 기쁘게 집으로 돌아갔고, 엘리의 축복대로 자녀를 낳았다. 그가 사무엘이다.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①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의 입에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에 책임져주신다는 것과, ②누가 말하였느냐보다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하다는 점이다. 영적 분별력이 없는 엘리의 말일지라도 한나가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니 그에게 복이 되었다. 그러므로 고넬료처럼, 한나처럼 주님의 말씀을 듣는 태도가 중요하고, 잘 듣는 것이 복이다.
‘나쁜 일은 천리까지 퍼져나가지만 좋은 일은 문밖으로 나가지 못한다.’(惡事傳千里 好事不出門)는 말이 있다. 나쁜 일에는 사람들이 귀를 잘 기울이고, 또한 나쁜 일은 말하기를 좋아해서 순식간에 멀리까지 퍼져나가지만 좋은 일은 잘 듣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기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는다는 뜻이 아닌가 싶다. 모쪼록 우리 모두는 주님께서 하신 일과 주님의 말씀을 잘 듣는 복된 귀를 갖자. 진정한 겸손은 듣는 귀다. 듣는 귀는 낮은 마음이고, 겸허한 무릎이다. 할 말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높은 마음이다. 위에 있는 마음이다. 교만한 사람은 말이 많다. 교만한 말의 마지막은 다툼이고, 원망이고, 분노다. 하나님을 듣고, 부모님을 듣고, 공동체를 듣자. 들을수록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고, 느끼지 못했던 것을 느끼게 되고,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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