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의 통로18, ‘아름다운 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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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526회 작성일 12-06-11 08:42본문
복의 통로18, ‘아름다운 협력’
느3:1~32
2012. 6/10. 08:00 11:00
협력의 중요성
서로 협력하는 것처럼 아름답고, 감동적이고, 강력한 것이 없다. 그래서 고용주들은 똑똑한 인재보다 협력을 잘하고, 또한 그 협력을 잘 이끌어내는 사람을 항상 곁에 두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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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는 단단하면서도 부러지지 않고, 잎도 많고 키도 크고 가늘면서도 어떤 폭풍우에도 넘어지거나 뽑히지 않는다. 그것은 대나무가 ①속이 비어있기 때문이고, ②유연하기 때문이고, ③뿌리가 서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대나무는 뿌리를 땅속으로 깊이 파고들지 않고 다른 뿌리들과 얽히면서 옆으로 뻗어간다. 대나무 숲에 들어가면 걸려 넘어질 정도로 뿌리가 흙 밖으로 나온 모습, 그러면서 서로 촘촘히 얽혀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가 있다. 이렇게 얽혀서 서로를 지지해 주고 있기에 강한 폭풍우에도 여전한 것이다. 이것이 연합의 힘이고, 협력의 중요성이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맹수의 왕 사자도 덩치 큰 코끼리도 무서워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개미다. 개미 자체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개미떼가 무서운 것이다. 코끼리도 개미떼에게 붙잡히면 그 큰 덩치가 하루만 지나면 앙상하게 뼈만 남게 된다. 그 작은 것도, 그 연약한 것도 합치면 무서운 힘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서로 협력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시간에는 복의 통로 열여덟 번째, ‘아름다운 협력’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주님은 협력이 있는 곳에 복을 주신다. 사실 협력 그 자체가 복이다.
협력을 끌어낸 지도자, 느헤미야
신앙적인 리더십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 있다. 본서의 저자 ‘느헤미야’라는 사람이다. 그는 바벨론 포로 2세대로 바벨론 제국을 물리치고 새롭게 패권을 장악한 페르시아 제국에서 출세한 유대인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직위는 왕의 ‘술 맡은 관원’(느1:11)이라는 그리 높지 않지만 항상 왕의 곁에 있다는 점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였다(이것이 곧 ‘근접성의 원리’다. 신자의 능력도 직위에 있지 않고 주님과의 거리에 있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항상 예루살렘과 그 성전에 있었다. 그러던 차에 그의 동생(‘하나니’)을 통하여 예루살렘이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공격을 받아 성벽은 허물어지고 주민들의 삶은 몹시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느1:2,3). 이 이야기를 듣고 그는 바로 금식하며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고(느1:4), 그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움직여 유대총독의 직위를 받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느2:). 여기서 사람이 어디에 있고, 거기서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생각하고,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한다. 이것이 그의 기도내용을 결정하고,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총독 느헤미야는 (도착 나흘 만에)우선 야간잠행을 통해 성벽의 형편을 살핀 다음(느2:12~15), 백성의 대표들을 만난 성벽재건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그들을 설득시켰다(느2:16~18). 이렇게 시작하여 성벽공사를 단 52일 만에 마쳤다. 이렇게 짧은 기간에 그 공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①철저한 계획과 완벽한 준비, ②백성들의 자발적인 헌신, 그리고 ③아름다운 협력, 또한 끊임없이 방해하는 반대세력에 굴복하지 않는 ④담대한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모두는 느헤미야의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믿음’과 탁월한 ‘지도력’에서 비롯되었다. 이와 같은 믿음과 지도력으로 사람들의 협력을 끌어낸 것이다.
협력의 원리
본문은 예루살렘 성벽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과 공사실행과정의 순차적 목록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느헤미야의 치밀한 공사기획과 탁월한 공사전략을 엿볼 수 있다. 본문에서 자주 반복되어 나오는 단어가 있다. ‘그 다음은’이라는 단어로 28번이나 나온다. 이는 단순히 순차(循次)만을 뜻하지 않고, 이 역사가 서로 협력을 통해 이뤄진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즉 이와 같이 백성들의 자발적인 협력이 있었기에 이 일을, 그것도 빠른 기일에 마칠 수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 몇 가지 중요한 협력의 원리가 있다.
1. 합리성의 원리
느헤미야는 공사구역을 나누어 각자에게 맡겼다. 그런데 가급적이면 집 가까운 곳에서 일하도록 했다(21,23,24,26,28~30). 이는 그들에게 일할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소요시간을 줄이고, 대적들이 공격할 경우 일한 곳과 가족을 쉽게 지킬 수 있고, 일할 사람을 최대한 동원할 수 있는 지혜로운 전략이다. 공동체 전체와 대의를 생각하되 저마다 가까이 있는 주변의 무너진 곳부터 챙겨서 일으키게 한 것이다. 또한 1절을 보면 대제사장이 제사장들과 함께 양문(sheep gate)을 건축했다고 했다. 양문은 제물로 쓸 짐승들이 드나드는 곳이다. 제물로 쓸 짐승은 제사장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 마디로 관련자들로 그곳을 건축하도록 한 것이다. 자신들에게 의미가 있으므로 서로 협력해서 즐겁게 최선을 다할 수가 있다. 이와 같은 느헤미야의 조처는 합리성의 원리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합리성이 협력을 쉽게 끌어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명분이 있고, 뜻이 좋아도 합리성이 떨어지는 것은 사람들의 협력을 끌어내기가 어렵다. 하지만 합리성은 그 자체가 명분이 되기 때문에 사람들의 협력을 쉽게 끌어낼 수가 있다. 느헤미야의 예루살렘 성벽공사가 백성들의 협력으로 단시일에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합리성의 원리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2. 솔선수범의 원리
본문에 대제사장, 예루살렘 지방의 절반을 다스리는 사람이 건축했다(1,9,12)고 나온다. 가장 어렵고, 가장 중요한 장소에서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일을 했다. 지위가 높다고 구경만 하지 않고 솔선수범했다는 것이다. 특히 5장에 느헤미야의 헌신과 모범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부터 제 삼십이년까지 십이 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들이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이 성벽 공사에 힘을 다하며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내 모든 종자들도 모여서 일을 하였으며, 또 내 상에는 유다 사람들과 민장들 백오십 명이 있고 그 외에도 우리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 중에서 우리에게 나아온 자들이 있었는데, 매일 나를 위하여 소 한 마리와 살진 양 다섯 마리를 준비하며 닭도 많이 준비하고 열흘에 한 번씩은 각종 포도주를 갖추었나니 비록 이같이 하였을지라도 내가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아니하였음은 이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었더라.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14~19).
지식이 많다고 지성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부(富)가 선진국과 후진국을 구별하는 기준이 아니다. 이것은 돈 많은 중동지역 국가들을 선진국이라고 하지 않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사람들의 의식수준과 도덕적 책임감이 중요하다. 특히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솔선수범하며 책임감 있게 행동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래야 일반 사람들이 이들을 삶을 닮게 되고, 결국은 사회 전체가 성숙하게 되는 것이다. 협력도 마찬가지다.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솔선수범이 협력의 중요한 동기가 된다. 이것이 솔선수범의 원리다. 성벽공사가 백성들의 협력으로 단시일에 완성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느헤미야를 비롯한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솔선수범이 있었기 때문이다.
3. 헌신의 원리
본문은 성벽공사에 신분과 지역과 계층을 초월한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했음을 알려준다. 정치 지도자들(9~12,14~19)을 비롯하여 제사장(1), 레위인(17), 금세공업자(8,31,32), 향품을 만드는 사람(8), 상인(31,32), 성전의 종들(26), 어떤 가문은 딸들(12)까지도 성벽공사에 참여했고, 할당받은 몫 이상을 감당한 사람도 있었다(20). 그리고 이들 중에는 예루살렘 밖 여리고(2), 드고아(5,27), 기브온(7), 미스바(7) 등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다. 먼저, 건축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함께 했다는 점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제사를 집례하고 성전을 관리하는 사람들로 건축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 역시 팔을 걷어붙이고 성벽공사에 동참했다. 그리고 금을 세공하고, 향품을 만드는 사람들도 건축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특히 이들은 손으로 예민한 일을 다루는 사람들이기에 손을 다치면 안 되는 사람들이다.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성벽공사에 동참했다. 또한 여성들도 건축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그런데 살룸의 딸들이 성벽공사에 동참했다(12). 다음은, 예루살렘 성벽과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 함께 했다는 점이다. 기브온 사람 믈라댜와 메로놋 사람 야돈이 기브온과 미스바 사람들과 함께 성벽공사에 참여했다(7). 이들은 강 서쪽 총독관할의 사람들이다. 즉 예루살렘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이런 그들도 성벽공사에 참여했다. 또한, 자신이 할당받은 못 이상을 건축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20절에 삽베의 아들 ‘바룩’이 그 사람이다. 그는 제사장으로 제사장에게 할당된 몫만 해도 되지만 별도로 한 부분을 더 할당받아 공사를 했다. 그래서 성경은 그의 사역에 ‘힘써’라는 단어를 첨가하여 다른 사람들과 그를 구별하고 있다.
쉽고 즐거운 일, 자신이 잘 할 수 있거나 자기에게 관련이 있어 유익이 되는 일은 함께 하기 쉽지만, 어렵고 힘든 일, 잘 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와는 관련도 유익도 없는 일은 함께 하기 어렵다. 그런데 건축과는 거리가 멀고, 예루살렘 성벽과 직접적인 관련도 없는 각양의 사람들이 각지에서 참여하고, 자신에게 할당된 것 이상을 감당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위한, 그리고 예루살렘을 위한 ‘헌신’ 때문이다. 이 헌신이 자신의 삶과는 거리가 멀고, 직접적인 관련도 없고, 자신의 의무이상의 일에 협력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협력의 가장 중요한 최고의 원리는 ‘헌신’이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뜻 있는 일들에는 이 헌신의 원리가 작용한다.
주님은 기억하신다.
만장일치, 100%의 협력이란 쉽지 않다. 사람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생각이 다르고, 관점이 다르고, 경험이 다르고,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른 주장, 다른 행동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이 아름다운 일에 협력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드고아 지역의 귀족들이다.
“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하였으나 그 귀족들은 그들의 주인들의 공사를 분담하지 아니하였으며”(5).
드고아 지역 일반 사람들은 성벽공사에 참여했지만 그 귀족들은 불참했다. 그들은 공사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라를 세우고 살리는 일에 협력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들이 유다의 부흥을 싫어하여 성벽공사를 방해하고 느헤미야를 위협했던 산발랏과 도비야(느2:19) 일당과 결부되었기 때문으로 본다. 누구라도 악한 자와 짝하면 거룩한 일에 협력할 수가 없다. 성경은 그들 역시 하나님 나라의 일에 수고한 사람들의 명단에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협력하지 않은 인물들로 불명예스럽게 기록하였다. 이를 보면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일을 하나도 빼지 않고 기억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자는 사람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야 하고, 일을 해야 한다.
여기에 세 부류의 사람이 나온다. ①함께 하자는 말을 듣고 기쁨으로 협력하는 사람, ②함께 하지 않아도 되지만 협력해서 뜻밖의 즐거움을 주는 사람, ③협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데, 그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 주님의 나라를 만들어가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함에 있어 우리는 어떤 부류에 속하는 사람인가? 함께 하자는 말을 듣고 기쁨으로 협력하는 사람인가? 또는 굳이 내가 함께 하지 않아도 되지만 협력해서 뜻밖의 즐거움을 주는 사람인가? 아니면 드고아의 귀족들처럼 협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데, 그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인가? 어떤 모습을 가진 사람으로 우리의 이름이 기록되어야 할까? 모쪼록 협력해서 함께 행복을 누린 사람, 협력해서 사람들에게 뜻밖의 기쁨을 주는 사람으로 기록되었으면 좋겠다. 주님은 이런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주님의 복은 이런 사람을 따라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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