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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의 통로28, ‘상처의 지우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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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1건 조회 25,499회 작성일 12-08-19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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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의 통로28, ‘상처의 지우개’

마18:21~35

2012. 8/19. 08:00 11:00

붙잡지 말고 놓아줘라.

한 제자가 스승에게 인생의 고뇌에서 영원히 벗어나는 방법은 없느냐고 물었다. 스승은 제자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더니 숲으로 걸음을 옮겼다. 숲에서 갑자기 나무를 껴안더니 ‘놔란 말이야, 이놈의 나무야. 나를 놓으란 말이다.’고 소리쳤다. 스승의 행동에 어리둥절한 제자는 나무를 붙잡고 계시면서 왜 나무에게 놔달라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 때 스승이 웃으며 나무에서 팔을 풀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고뇌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사실 세상의 고통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고통을 붙잡고 놓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고뇌는 거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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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삶에 대한 고뇌, 고민, 고통이 있고, 아픔과 슬픔이 있고, 염려와 걱정이 있고, 삶의 상처들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일이지만 이는 또한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무언가 더 이루고자 하는 의지와 갈망이 있다는 증거이다. 때문에 이런 것들을 느끼고,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죽은 사람은 아무 것도 느낄 수도 경험할 수도 없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삶이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다. 삶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스승의 이야기처럼 이런 것들이 우리를 붙잡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내려놓지 못하고, 놓아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미움이나 분노가 나를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붙잡고 내려놓지 않는 것이고, 염려나 걱정이 나를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이 문제다. 용서란 이런 모든 것들을 나에게서 떠나보내는 것이다. 모두 놓아주고, 내려놓는 것이 용서다. 용서는 헬라어(αφιημι)로 ‘자신을 풀어주다, 멀리 놓아주다, 자유하게 하다.’는 뜻이고, 히브리어(솨라흐)도 ‘내보내다. 지워버리다. 도말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저는 이 용서를 ‘지우개’라고 표현한다. 삶의 모든 문제(고뇌, 고민, 고통, 아픔, 슬픔.......), 삶의 모든 상처를 깨끗이 지워주는 지우개다. 이 시간은 복의 통로 스물여덟 번째, ‘상처의 지우개’라는 제목으로 용서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용서는 작복(作福)이다.

용서란 나에게 잘못한 일에 대하여 책임을 지을 수 있는 나의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기로 선택하는 의지적인 행위이다. 여기에 용서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용서는 나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고, 그것은 강요나 설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의지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덧붙이면 너와 나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이다. 이것이 용서가 화해와 다른 점이다. 화해는 상호적이지만 용서는 일방적이다. 용서는 사단의 접근을 차단하고 치유와 회복, 자유를 우리에게 선사한다. 그리고 모든 관계의 화해와 화평과 화목으로 나아가는 첩경이다. 성경이 신자의 삶에서 용서를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18장은 주님께서 ‘교회공동체’에게 주신 말씀이다(이런 이유로 마태복음을 ‘교회의 책’이라고 함). 교회 안에는 두 종류의 연약한 자가 있다. 하나는 ‘소자’(5~14)이고, 다른 하나는 ‘죄인’(15~35)이다. 소자에 대해서는 ‘실족’하지 않도록 하고, 죄인에 대해서는 ‘용서’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15~20절은 ‘교회 안에서의 용서문제’를 다루고 있고, 본문은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용서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의 용서는 매우 엄격하고, 제한적이고, 단호하다. 반면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용서는 전혀 다르게 말씀하고 있다. 본문은 얼마나 용서를 해야 하느냐는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주님은 대답이다.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하라’(22)고 하셨다. 이는 ‘490번’(70×7)이라고 하는 횟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제한을 두지 말고’, ‘완벽하게’ 용서하라는 뜻이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비유로 설명하신다(용서의 이유는 지난번에 다뤘기 때문에 여기선 생략). 교회적 차원의 용서와 개인적 차원의 용서를 다르게 언급한 것은 너무 당연하고 중요하다. 교회 공동체를 더럽히고 무너뜨린 사람에 대해서는 철저하고 단호해야 한다.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에 대해서는 끝까지 제한을 두지 않고 완벽하게 용서해야 한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는 그 반대로 가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와 신자가 직면한 현실이다.

 

본문에서 주님이 용서의 이유로 제시한 비유를 통하여 용서가 큰 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내용설명생략). 그래서 용서를 ‘작복’(作福)이라고 한다. 복을 만든다 뜻이다.

 

용서는 속박의 끊어준다.

본문의 일만 달란트 빚을 진 사람처럼 인간은 스스로 갚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빚을 진 존재다. 그 빚 때문에 갇히고, 그 빚에 묶인 존재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죄악의 포로다. 그리고 미움과 분노와 원망과 상처 등 온갖 감정의 포로다. 그렇지만 그것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흰두교 어떤 철학자가 한 사람의 불의가 해결되기 위해서 걸리는 시간을 계산을 했는데, 680만 번의 윤회를 거쳐야 된다고 한다. 이는 인간의 힘으로는 죄를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렇다. 죄의 속박은 우리 힘으로 벗어날 수 없다. 주님이 끊어 주시고, 풀어주시고, 해방시켜 주셔만 자유로울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의 용서를 받아들일 때 이뤄진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할 때 우리 안에 있는 앞에서 말한 수많은 감정의 속박들이 끊어진다. 그리고 이런 속박에서 벗어나면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치유와 회복이 일어난다.

 

용서와 치유가 깊은 관련성이 있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여러분, 지금 주먹을 세게 쥐고 5초 동안만 있어보라. 하나, 둘, 셋, 넷, 다섯.......’ 주먹을 쥐고 있는 상태에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입을 다물고, 팔과 등에 힘을 주게 된다. 그리고 숨도 참게 된다. 이렇게 경직되고 긴장하는 순간 의학적으로 소화기능은 느려지고, 심장박동은 빨라지고, 혈압이 상승하고, 면역기능은 정지된다고 한다. 단순히 주먹을 쥐고 있어도 우리 몸이 이렇게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데 만약 분노나 원한, 미움으로 치를 떨고 있다면 얼마나 치명적인 영향을 받게 되겠는가! 그래서 학자들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에는 화, 분노, 쓰라림, 적개심, 복수심, 모멸감, 우울함, 무가치 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쌓인다고 했다. 오사카 의과대학에서 제출한 보고서에 의하면 개 한 마리를 네 시간 동안 결박하여 때리면서 잔뜩 성이 나게 만든 후, 그 뇌수 가운데서 액을 뽑아 검사해 보니 ‘시안’이라는 독소가 다량 검출되었다. 그 양은 개 80마리를 죽일 수 있는 정도였다고 한다. 분노나 미움이 얼마나 해로운 것인가를 알 수 있다. 화를 내거나 누군가를 미워하면 피가 독소를 내고 생리적 변조를 일으켜 신체조직과 기관에 병적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보다 그 상처로 인한 그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더 치명적이라는 뜻이다.

 

용서의 수혜자는 내 자신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하신 것은 결국 ‘나 자신’을 위함이다. 즉 나를 위한 주님의 ‘배려’다. 건강한 육체, 건전한 정신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 평화(안)의 길을 걷기 위해서다. 용서는 곧 자기를 사랑하는 길이다. 용서함으로 심령의 자유, 마음의 평안, 육체의 건강을 얻기 때문이다. 증오의 화살은 다른 사람에게도 상처를 입히지만 결국 자신을 향해 되돌아오고 만다. 루이스 스미즈(Lewis B. Smedes)는 말했다. ‘용서로 치유를 받은 유일한 사람은 바로 용서를 한 사람 자신이다. 진실한 용서는 포로에게 자유를 준다. 그리고 나면 자기가 풀어준 포로가 바로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 진실한 용서는 미움의 포로, 분노의 포로, 원망의 포로, 상처의 포로 등 온갖 감정의 포로에서 자유를 준다. 루이스의 말처럼 용서를 하고 나면 자기가 풀어준 ‘포로’가 바로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용서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내가 넘겨 준 내 삶의 통제권을 다시 가져오는 것이다. 용서는 자신을 해치는 분노나 미움, 원망과 같은 마음의 독(毒)을 지우는 해독제요, 그것들을 내 삶에서 깨끗이 지워내는 지우개다. 그러니 용서의 최대 수혜자는 바로 나 자신이다. 반대로 용서하지 않을 때 최대의 피해자 역시 나 자신이다.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을 보라!

 

용서는 상생의 길이다.

용서가 죄의 악순환을 끊는 길이고, 서로가 사는 상생의 길이다. 용서만이 복수와 원한의 사슬을 끊고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권하는 것이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12:14). 용서하기 전에는 두 개의 무거운 짐이 존재한다. 한 사람은 ‘죄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고, 한 사람은 ‘원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용서는 그 두 사람을 모두 자유롭게 한다.

 

영혼의 날개는 용서하고 용서받는 삶을 통해서 자란다. 미워할수록 영혼의 키는 작아지고 용서할수록 영혼의 키가 커진다. 미움은 10년 쌓은 우정도 깨뜨리지만 용서는 10년 틀어진 관계도 복원시킨다.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의 손에 들려진 성공, 물질, 그리고 권력은 파괴하는 폭발물과 같다. 그러나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의 손에 들려진 형통, 번영, 그리고 권세는 섬김의 도구가 된다. 용서의 문이 열릴 때 축복의 문도 열린다. 누가 잘못했다고 미워하지만 사실 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는 나의 잘못이 더 크다. 물론 용서는 쉽지 않다. 때문에 용서할 때 평범함이 비범함으로 변하고, 용서는 용기를 낳고, 삶의 기적을 낳는다. 향나무는 찍혀도 향을 발한다. 예수님은 찍혀도 향을 발하셨다. 독을 향기로, 배신을 용서로,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셨다. 용서는 교회와 신자의 특권이면서 동시에 사명(의무)이다. 특권으로 ‘매고 푸는’ 권세가 있고(18), 주님으로부터 먼저 용서를 받았기에(27) 다른 사람에 대한 용서의 의무(사명)가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 용서의 특권과 사명을 잘 활용하여 복의 통로가 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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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양식 작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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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FONT-SIZE: 16px">                  </span><strong><span style="FONT-SIZE: 16px">"용서는 나를 위한 주님의 '배려'이다."</span></strong><strong><span style="FONT-SIZE: 16px"> (</span></strong><span style="FONT-SIZE: 16px"><span style="FONT-SIZE: 16px">설교 중에서)</span></sp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