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 기쁨이 되는 삶,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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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9,650회 작성일 22-10-30 12:46본문
주님께 기쁨이 되는 삶, ‘공감’
롬12:15
2022. 10/30. 11:00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준 이야기
40대 후반의 변호사가 어느 날 지인의 장례식장에 문상을 마치고 나오다가 다른 방 빈소에 놓인 어린 아이의 영정사진을 보았다. 조문객은 아무도 없었고 아이의 부모와 같은 젊은 부부만 상복을 입은 두 개의 섬처럼 적막하게 앉아 있었다. 그는 조용히 들어가 아이의 영정에 헌화하고 절을 한 뒤 상주인 부모에게 말했다. ‘지나다가 모르지만 너무 가슴 아프고 안타까워 아이의 명복이라도 빌어주려고 들어왔습니다.’ 50대 중반의 어떤 프리랜서는 자기 아내가 갑자기 긴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버렸다. 아내의 친구가 항암치료 때문에 삭발한 다음, 창피해서 외출을 못하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자 자신도 긴 머리카락을 친구처럼 빡빡 깎아버린 것이다. 그 뒤로 시장이든 백화점이든 늘 함께 다녔다. 아내가 비구니가 되는 줄 알고 좌불안석이었던 그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50대 중반의 중견 출판사 어떤 대표는 골목에서 남루한 행색의 한 사내를 보고 요기나 하라며 돈을 주려다가 멈칫했다. 돈을 불쑥 내미는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그는 사내의 등을 향해 말했다. ‘아저씨, 이거 흘렸네요!’ 바닥에 떨어진 돈을 주워 주인에게 돌려주는 척하며 돈을 주었다.
마치 톨스토이의 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한 장면처럼 이 세 사람의 따뜻한 일화는 흔할 것 같으면서도 흔하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생면부지의 빈소에 헌화했다는 이야기, 암투병중인 친구를 위해 같이 삭발했다는 이야기, 베풀되 걸인을 돈의 주인으로 만들어 명분을 세워주는 이야기는 주변에서 흔히 듣기 힘든 이야기들이다. 아이의 부모는 낯선 조문객으로 마음이 따뜻했을 것이고, 암투병 환자는 삭발한 친구로 이미 절반은 나았을 것이고, 걸인은 일부러 자신의 떨어진 자존감을 세워주는 것으로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이 세 분의 인품과 마음이 진짜 아름다운 공감이고 공감의 씨앗이다. 각박한 세상이지만 이런 사람이 있기에 세상이 아직도 살만한 곳이라고 여겨진다. 아무튼 이 씨앗이 자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거두며, 그리하여 인생이란 정원을 더욱 아름답고 풍성하게 만들 것이다. 우리와 우리 교회가 이런 미담의 주인공이 되어 공감의 씨앗을 부지런히 뿌렸으면 좋겠다. 이 시간은 주님께 기쁨이 되는 삶, 여덟 번째로 ‘공감’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려고 한다.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울라!
성경학자들은 로마서 12장을 바울이 쓴 서신 가운데 가장 논리적이지 못하고 산만하다고 지적한다. 사실 로마서는 가장 조직적이고 논리적이며 교리적인 책인데, 12장은 잠언처럼 일정한 주제 없이 나열한 것처럼 보인다. 그 이유는 어떤 신학이나 교리가 아니라 서로를 깊이 공감하고 있는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경치나 행복한 감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듯이 말이다. 본문 역시 신앙공동체에서의 관계와 공동체 생활에 대한 말씀 중에 하나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가 깊이 ‘공감하는’ 사랑이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15).
함께 즐거워하고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다. 남도 아닌 친척이 잘 되는 것을 배 아파하는 것, 이것은 우리의 부패한 본성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에게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말한다. 남이 잘 되고 성공하고 기쁜 일이 생기면 그 사람과 함께, 그 사람처럼, 그 사람이 되어서 즐거워하라는 뜻이다. 사실 이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다. 그 이유는 우리 안에 있는 시기와 질투, 경쟁심이란 나쁜 감정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행복에 마음이 상하고, 불행을 좋아하는 아주 고약한 심보다. 이것의 특징은 가까운 사람에게서 잘 드러나는 감정이다. 인류의 첫 살인사건도 바로 이 때문에 일어났다. 예일대학의 심리학 교수 살로비는 미국 범죄의 20%가 시기와 질투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했고. 맥스웰 말츠는 현대인의 심리가운데 95%는 열등감이라는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고 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공감능력을 떨어뜨려 함께 즐거워하지 못하게 만드는 주범이다.
한 연구에서 사람들에게 ‘진정한 친구에게 있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했다. 그 결과 내가 잘 되는 것을 자기 일처럼 기뻐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았다. 잘 안 됐을 때는 함께 슬퍼하다가도 막상 일이 잘 풀리고 나니 친구와 사이가 멀어졌다는 말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왜 그럴까? 우리는 늘 남과 비교하는 존재여서 가까운 사람이 잘 되면 좋기도 하지만 그만큼 ‘자존감의 위협’ 또한 크게 받기 때문이다. ‘같이 다녀도 쟤는 잘 됐는데, 나는 왜…’ 이런 생각이 비교의식으로, 시기와 질투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내 일을 자기 일처럼 기뻐해준다는 것은 일종의 희생정신을 의미한다. 자신의 자존감과 편리함보다 나의 행복을 중요하게 생각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있을 때 좋은 일이 더 아름다운 기억으로 확장이 되고, 공동체의 친밀감 또한 높아진다. 시기와 질투라는 감정 대신 행복이란 전원에 사랑의 꽃이 만발하게 된다. 그러므로 ‘즐거워하는 이들과 함께 즐거워하라.’는 이 간단한 말씀은 시기와 질투를 물리치는 확실한 방법이다. 주님께 기쁨이 되는 더불어 행복한 아름다운 신앙공동체를 만드는 비결이다. 공감능력을 키우는 비결이다.
함께 울라!
또한 본문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말씀한다. 이 짧은 말씀은 하나님 백성으로서 공동체적 삶의 여러 측면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 무엇보다 남자는 절대 울어서는 안 된다는 전통적 ‘마초’ 이미지를 박살낸다. 마초란 남자다움을 과시하거나 우월하게 여기는 성향을 말한다. 이런 현상은 유교문화권에서 특히 강하다. 우리 모두는 이런 문화에서 훈련을 받아왔고, 길들여져 왔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슬픔을 표현하고 나누기를 두려워한다. 슬픔이 우리를 더욱 나약하고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 신앙에까지 잘못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래서 슬픔을 나타내거나 나타낸 사람을 ‘믿음 없음으로’ 간주하거나 그렇게 평가한다. 때문에 자신의 슬픔을 애써 감추거나 심지어는 초연한 것처럼 행동하게 만든 것이다. 아파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슬퍼도 슬프지 않은 것처럼, 마음이 문드러지는데도 괜찮은 것처럼 행동을 한다. 그것을 표현하면 믿음이 없어서 그런다고 비난을 받을까봐! 개중에는 다른 사람에게 덕이 안 되서 그런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실 성도는 깊게 슬픔을 표현하고 나눌 수 있어야 한다. 함께 슬퍼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료하시는 수단 가운데 하나이다. 사랑의 친밀함과 보호 안에서 슬픔은 우리를 하나로 연결해 줄뿐만 아니라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준다. 슬픔은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을 선사한다. 공감이야말로 내면의 변화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지표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는 어려움 중에 있는 이들에게 포용적이고, 그들이 자신의 어려움을 표출할 수 있는 안전한 환경을 제공해주어야 한다. 이런 환경에서 자신을 사랑받는 존재로 인식해 안심하고 슬퍼할 수 있다. 또한 고통 중에도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신앙 공동체가 슬퍼하는 사람에게 안전한 환경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성경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한다. 단지 제3자의 입장에서 위로하고 동정하라는 말이 아니다. 바로 그 사람과 함께, 그 사람의 입장에서 울라는 뜻이다. 이것이 공감이다. 고(故) 신영복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나온 내용이다. ‘함께 맞는 비’라는 글인데, 이런 내용이 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함께 비를 맞지 않는 위로는 따뜻하지 않습니다.’ 공감이 무엇인지를 잘 나타내는 글이라 생각한다. 누군가 비를 맞고 있을 때 우산을 펴서 비를 피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은 친절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공감은 아니다. 공감은 함께 비를 맞는 것이다. 우산을 내려놓고 비를 맞는 사람과 함께 비를 맞는 것, 이것이 ‘공감’이다. 오롯이 상대방과 같은 입장과 처지가 되어주는 것이다.
완전한 공감, 성육신
성경에서 공감의 대표적인 사건은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신 ‘성육신’사건이다. 주님은 하나님이셨지만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다. 심지어 죄인의 모습으로 오셨다. 그래서 우리가 누리는 기쁨은 물론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슬픔, 굶주림과 목마름까지도 똑같이 경험하셨다. 이와 같은 주님을 우리는 복음서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경험하셨다. 이런 주님의 모습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은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여기서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성경은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라고 되어 있으나 개역성경은 ‘체휼(體恤)하지 아니한 자가 아니요.’ 라고 되어 있다. 이 ‘체휼’(體恤)이란 곤란한 사정을 잘 살펴 돌보아주고 구해주는 일을 뜻한다. 그러니까 체휼은 동정보다는 공감에 더 가까운 단어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를 완전히 공감해 주신 유일한 분이셨다는 뜻이다.
흔히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믿음이란 주님이 이 땅에서 이루신 완전한 공감을 믿는 것이다. 바울의 고백이 이를 잘 보여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2천 년 전에 주님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아니다. 나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왜냐하면 주님이 나와 완전한 공감을 이루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는 나 홀로 사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나와 완전한 공감을 이루고 계신 주님께서 살고 계신다. 이렇게 나와 공감을 이루신 주님을 믿는 것이 참된 믿음이다. 그리고 주님처럼 주변 다른 사람과 공감하는 것이 주님을 믿는 성도의 삶이다. 요즘처럼 ‘공감’이 크게 강조되는 시대도 드물다. 그러나 대부분 먼발치에서 잠시 눈물짓고 잠시 슬퍼하는 것으로 공감을 소비해 버린다. 커피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커피 브랜드를 마시는 것과 같다. 공감은 브랜드가 아니다. 소비도 아니다. 값싼 동정은 더욱 아니다. 공감은 성육신하신 주님처럼 그 사람과 ‘함께’, 그 사람‘처럼’, 그리고 그 사람의 ‘입장’이 되는 것이다. 이런 공감이 작은 감동의 생산이고, 그 생산이 모여 감동의 연대를 이룬다. 서로의 즐거움과 슬픔을 깊이 공감하는 공동체, 깊이 공감하는 성도가 되자. 그래서 누구나 마음 놓고 기뻐하고 울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진 공감능력이 큰 성도, 서로 함께 즐거워하여 비교의식에서 비롯된 시기와 질투를 넘어서고 함께 슬퍼하므로 치유와 회복이 경험되는 공동체가 되도록 하자.
관련링크
- https://youtu.be/SJHRwMC9TXA 4880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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