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 기쁨이 되는 삶,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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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10,265회 작성일 22-09-18 13:20본문
주님께 기쁨이 되는 삶, ‘고백’
딤후4:6~8
2022. 9/18. 11:00
어머니와 아들
한 어머니가 아들을 멀리 유학을 보내놓고 매일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그럴 때마다 아들에게서 돌아온 답장은 ‘네’가 전부였다. 아들이 공부하느라 바빠서 그런가보다 생각은 되지만 가끔은 아들의 짧은 대답이 야속해서 마음이 상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색하지 않고 매일 장문의 카톡을 보냈고, 아들 역시 여전히 ‘네’가 전부였다. 어느 가을날, 그날도 어머니는 이렇게 카톡을 보냈다. ‘아들, 여기는 가을이다. 단풍이 너무 예쁘게 물들고 있구나. 예쁜 단풍을 보니 아들 생각이 많이 나네. 사랑하다....’ 그러자 아들에게서 답장이 왔다. ‘저도 엄마가 보고 싶어요!’ 이 말에 이 어머니는 너무 기뻐서 하루 종일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항상 ‘네’가 전부였는데, 10배에 달하는 답글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무심하던 아들로부터 보고 싶다는 고백에 마음이 녹아버린 것이다.
고백의 하나님, 고백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고백이라는 것은 참으로 마법과 같은 말이다. 이 어머니처럼 듣는 사람의 마음을 행복하게 만들어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한 행복감을 갖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백을 듣고 싶어 하고, 또한 고백을 들으면 좋아한다. 누구에게 들어도 기분이 좋은 것이 고백이다. 특히 좋아하는 사이일수록 더욱 그렇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도 마찬가지다. 사실 성경은 수많은 고백으로 되어 있는 고백의 책이다. 우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고백서다. 그래서 어떤 분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고백을 담은 ‘연애편지’라고 성경을 표현하기도 한다.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고백의 말씀은 이것이다.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사46:3,4). 이런 고백의 말씀을 읽으면 마음이 꽉 채워지는 느낌,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감격에 휩싸인다. 잠시라도 걱정하고 염려했던 일이 부끄럽게 여겨진다. 그런데 성경에는 비슷한 하나님의 고백이 참으로 많이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고백에 대한 응답으로 사람들의 고백도 성경에 많이 나오고 있다. 그 고백을 집약해 놓은 대표적인 책이 ‘시편’이다. 그 중에서도 다윗의 시로 알려진 시23편이 가장 탁월하다. 신약에서도 세례요한의 고백에서 시작하여 나다나엘의 고백, 베드로, 도마, 마르다와 마리아, 소경 바디메오, 로마군 백인대장의 고백 등 많은 사람의 아름다운 고백이 나오고 있다. 이런 고백에 대해 주님께서 무척 기뻐하셨다. 구약성경에서 고백의 달인을 뽑으라면 단연 ‘다윗’일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시고 ‘내 마음에 합한 자’(행13:22)라고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고백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고백이 하나님과 우리 주님을 얼마나 기쁘시게 하는지,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알 수가 있다. 이 시간에는 주님께 기쁨이 되는 삶 세 번째로 ‘고백’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려고 한다.
바울의 고백
신약에도 다윗 못지않게 아름다운 고백을 많이 드렸던 사람이 있다. 바로 ‘바울’이다. 바울이 기록한 편지들을 보면 곳곳에 그의 아름다운 고백이 때로는 기도형식으로, 때로는 찬양형식으로, 간증이나 선언형식 등으로 나오고 있다. 본문 역시 바울의 고백이다. 본서는 바울이 동역자요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로 바울의 마지막 편지다. 이 편지를 기록한 다음 몇 달 후에 순교했다. 그러니까 바울이 순교직전에 기록한 고백적인 편지인 셈이다. 특히 본문은 본장 17,18절에 나온 고백을 제외하면 바울의 최후고백이다. 지금 바울은 로마감옥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본문은 복음을 위해 한평생을 살아온 그가 다가올 생의 마지막 순간을 예감하면서(6) 기록한 고백이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7,8).
이와 같은 고백을 바울은 3가지 동사로 표현하고 있다. 첫째는‘싸우고’ 라는 동사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바울은 지나온 자신의 삶을 전투에 비유한 것이다. 이는 바울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인생을 전투에 비유한다. 그런데 그가 여기서 싸움이란 단어 ‘선한’이란 형용사를 붙이고 있다. 아마도 자신의 인생을 주님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누어 이야기한 것 같다. 그리고 주님을 만난 후 자신의 인생을 선한 싸움이라고 한 것이다. 사실 어떤 종류의 싸움이든 싸움에 ‘선한’이란 형용사를 붙이기 힘들다. 싸움이란 어떤 종류든 좋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바울이 굳이 선한이란 형용사를 붙여 선한 싸움이라고 한 것은 주님을 위한 일, 주님을 위한 인생이 선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동시에 주님을 위한 삶, 곧 주님을 따르고 섬기는 일이 얼마나 치열한지를 보여준다. 신앙생활은 소풍이 아니라 전투다! 여기서 ‘싸우고’는 헬라어로 ‘아곤’(ἀγῶν)이라고 한다. 이는 격투기 선수가 혼신을 다 하여 싸우는 모습, 당시 죽이고 죽는 살벌한 로마원형경기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검투사의 모습을 뜻한다. 이는 바울 자신이 이와 같다는 뜻인데, 이와 같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 자신의 영달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주님의 복음을 위해,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영광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삶이 빛나는 것이고, 이런 삶에 대한 그의 고백이 아름다운 것이다.
둘째는 ‘마치고’ 라는 동사다.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앞에서 바울은 자신의 지나온 삶을 싸움(전투)에 비유를 했는데, 여기서는 달리기 경주에 비유하고 있다. ‘달려갈 길’이란 정해진 코스를 말한다. 선수마다 자신이 달려야할 코스가 있는 것처럼 사람마다 달려야 할 길이 있다. 이를 사명이라고 한다. 부모는 부모로서, 자녀는 자녀로서,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달려가야 할 길이 있다. 지도자의 길이 있고, 군인의 길이 있다. 성도는 성도로서 달려가야 할 길이 있다. 성도 중에도 어떤 사람은 기도의 사명이 있고, 어떤 사람은 섬김의 사명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선교의 사명이 있다. 이와 같이 사람마다 달려가야 할 길이 다르다. 바울에게서 있어서 달려가야 할 길에 대한 고백이 사도행전에 나온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그러니까 지금 바울의 고백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잘 마쳤다는 것이다. 자기 앞에 놓인 경주를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것이다. 즉, 주님이 맡기신 사명을 잘 마쳤다는 것이다. 그렇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후, 주님이 명하신 길, 주님이 원하시는 길로만 달렸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그 무엇이든지 그대로 순종했다.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변함없이 주님의 길로만 따라갔다. 그가 고백한 대로 달려온 그의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고후11:23~28). 그렇지만 그는 끝까지 충성스럽게 그 길로 달려왔다. 마라톤 경주를 보면 많은 사람이 출발선에서 동시에 출발하지만 마지막까지 전 코스를 다 달린 사람은 많지 않다. 신앙경주도 마찬가지다. 시작하는 사람은 많으나 끝까지 잘 마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화려하게 시작해서 초라하게 마치는 사람도 많다. 달려가야 할 길, 곧 맡겨진 사명의 길을 끝까지 잘 마치자! 우리 역시 바울과 같은 고백으로 주님께 기쁨이 되자!
셋째는‘지켰으니’ 라는 동사다. ‘믿음을 지켰으니’ 선한 싸움을 싸우며 달려갈 길을 잘 마쳤는데, 끝까지 믿음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고백이다. 아무리 선한 싸움을 잘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쳤어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지 못했다면 그것은 헛수고에 지나지 않는다. 성경에 믿음으로 출발하여 육신으로 마친 사람이 많이 있다. 본문 바로 뒤에 나오는 ‘데마’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10). 데마는 바울의 동역자였다(골4:14, 몬1:24). 그런 그가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과 동역하다가 포기하고 떠났다. 믿음을 끝까지 지키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믿음을 지키지 못하면 사명도 완수하지 못하게 된다. 얼마나 안타깝고, 또한 불행한 일인가? 데마 외에도 이스라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이 그랬고, 다윗의 아들 솔로몬도 그랬고, 주님의 제자였던 가룟유다도 마찬가지다. 우리 주변에도 이와 같은 사람이 많다. 교회를 개척해서 큰 부흥으로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끼쳤던 목회자가 노욕인지 물욕인지, 하여간 물의를 일으켜 본인은 물론 교회도 교계도 주님까지도 욕되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엇이든 끝까지 지킨다는 것이 참으로 귀한 일이다. 믿음은 더욱 그렇다. 요한 계시록에 일곱 교회를 향하여 ‘이기는 자는 ~할 것이다.’고 거듭 말씀하신다. 누가 이기는 자인가?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다. 운동경기에서 게임이 끝날 때까지는 누구도 이긴 자라고 장담할 수 없다. 2002년 월드컵 때 우리나라가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전/후반전을 다 뛰고, 연장전까지 뛰고도 승부가 나지를 않아 승부차기를 통해 결국 승부가 결정됐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이긴 자는 끝까지 믿음을 지킨 자다. 그러니 구원은 끝까지 믿음을 지킨 자의 몫이다. 순교를 앞둔 바울은 주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지키며 달려갈 길, 곧 사명을 잘 마쳤다는 고백한다.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고백의 삶
본문은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한 바울의 만족스러운 고백이다. ‘난 바보처럼 살았군요.’ 라는 유행가처럼 많은 사람이 자신의 지나온 삶에 만족보다는 ‘후회’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한다. 그저 억척스럽게 살기만 했지 왜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하는지도 모르고 살다보니 바보처럼 살았다고 후회와 탄식을 하게 된 것이다. 열심히 달리기는 했는데 방향도 없이, 혹은 방향이 잘 못되었기 때문이다. 믿음에서 떠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이제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했다. 그것도 믿음을 지키면서 말이다. 이는 바울의 후회없는 아름다운 인생고백이자, 주님이 기뻐하시는 향기로운 재물이 된 삶으로 드리는 고백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외친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8). 죽음을 목전에 두고 기대 만발한 모습이다. 재판장이신 주님으로부터 받을 상만 남았다는 것이다. 마치 상을 받기 위해 시상대로 오르는 사람과 같은 모습이다. 동시에 이는 자기뿐만 아니라 자기처럼 산 사람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너희도 나처럼 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주님께 기쁨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지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말씀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바울처럼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는가?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달리고 있는가? 믿음은 잘 지키고 있는가? 우리 또한 바울처럼 향기로운 제물이 되는 삶의 고백으로 주님께 기쁨이 되자! 주님은 입술의 고백도 기뻐하시만 삶의 고백은 더욱 기뻐하신다.
관련링크
- https://youtu.be/5Gw-qT2kKnw 6307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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