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모델링, ‘염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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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24,956회 작성일 22-08-14 12:53본문
리모델링, ‘염려’
마6:25~34
2022. 8/14. 11:00
염려의 시대
영국 옥스퍼드 의대에서 ‘웃음’에 대한 연구를 했는데, 아이들은 하루 400~500번 웃는다고 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웃음의 횟수가 줄어들고, 하루 평균 15번 정도 웃을까말까 한다고 한다. 이 정도면 항상 찡그리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잘 웃던 아이가 나이가 들면서 웃음을 잃어버린 것이다. 왜 어른이 되면 이렇게 웃지 않게 되는 것일까? 무엇이 어른들에게서 웃음을 빼앗아간 것일까? 무엇이 어른들에게서 웃음을 도적질 해간 것일까? 그 주범은 바로 ‘염려’다. 염려의 쌍둥이 자매 ‘근심’과 ‘걱정’ 때문이다. 바로 염려와 근심과 걱정이 웃음에 필요한 근육을 사라지게 하고, 표정도, 성품도 마비시켜 버린 것이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얼굴에서 웃음을 찾을 수 없고, 영원히 웃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굳어있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가 사는 세상이 활짝 얼굴을 펴고 웃을 일보다 땅이 꺼져라 한 숨을 푹푹 내쉬며 얼굴 찡그릴 일이 더 많은 것도 사실이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만 생각해도 그렇다. 코로나 발 경제위기로 세계경제가 점점 더 얼어붙고 있는데, 여기에 러시아가 일으킨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까지 겹쳐서 더욱 그렇다. 이 뿐만 아니다. 강대국의 패권경쟁으로 국제관계가 급속도록 얼어붙고 있다. 그래서 불확실성이 점점 커지다보니 염려의 수렁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 염려의 시대를 살고 있다. 염려가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고, 감정에 영향을 미치고, 육체적인 힘을 고갈시킨다. 염려는 불청객이고, 파괴적인 침입자다. 염려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공격한다. 우리는 늘 염려에 시달려왔지만 지금은 더 심해졌다. 뿐만 아니다. 염려는 치사율이 높은 ‘악성’ 바이러스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전장에서 숨진 병사를 30만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사회심리학자들은 남편이나 아들을 전쟁터에 보낸 뒤 염려하다가 심장마비나 기타 질병에 걸려 죽은 사람이 전쟁에서 숨진 30만보다 훨씬 많은 1백만으로 보고 있다.
염려에 대한 성경의 생각
그래서인지 성경도 염려를 가볍게 보지 않는 것 같다. 어떤 분에 따르면 성경에는 ‘염려(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이 365회 나온다고 한다. 우리가 매일 염려와 함께 사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성경은 우리에게 염려(걱정)하지 말라고 매일 권면하신 것이다. 주님도 산상보훈 설교에서 염려에 대한 교훈을 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염려에 대해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25). 여기서 ‘목숨’과 ‘몸’은, 곧 생존과 일상을 뜻한다. 생존과 일상을 위한 것까지도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삶에서 이 보다 더 절실하고 절박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주님은 이것까지도 염려하지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이처럼 단호하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일까? 여기에는 적어도 세 가지 뜻이 있다. 우선, 염려는 하나님께 집중할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라는 접속사로 시작하는 25절은 24절(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의 결론이면서 염려하지 말라는 교훈의 시작이다. ‘그러므로’(원문은 ‘이 때문에’δια τουτο로 되어 있음) 라는 이 접속사는 앞의 내용과 인과관계를 나타낸다. 즉,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않고 하나님만 섬기려면, 다시 말하면 제자가 하나님께 집중하려면 목숨을 위해 먹고 마시는 문제, 몸을 위해 입는 문제로 염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염려’(μεριμνα)라는 단어가 이를 암시하고 있다. 이는 ‘분열하다’(μεριμνατε)는 뜻을 가진 단어에서 온 것으로, 마음이 나뉜 것과 관계가 있다. 그래서 염려하는 것이 마음을 나뉘게 하여 하나님만 섬기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하나님이 돌보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잘 돌보아주시는 지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목숨이 음식보다 귀하고 몸이 옷보다 귀한데, 하나님이 목숨과 몸을 주신 분이시니 덜 귀한 음식이나 옷은 당연히 주실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25b). 그러면서 사람보다 덜 귀한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도 먹이고 돌보신다는 것을 예로 설명하고 있다(26,30).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것을 확신하고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염려는 무익하다는 것이다. 27절의 ‘키’(ἡελικιαν)에 해당 되는 단어에는 사람의 키 외에 ‘목숨’이란 뜻도 있다. 문맥상 ‘키’보다 ‘목숨’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 즉, 염려는 목숨에 전혀 이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염려는 우리의 몸에 여러 좋지 않는 작용을 하여 목숨을 해롭게 만든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단호하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염려를 극복하려면
그런데 문제는 주님의 이와 같은 선언적인 명령에도 우리는 염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예배하는 이 시간에도 쓸데없는 염려로 예배에 집중하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염려 때문에 오늘 예배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염려하지 않을 수 있을까? 훌륭한 강해설교가 워런 위어스비(W. Wiersbie)는 본문을 통해 염려를 이기는 ‘3F’전략을 소개하였다. 첫째는 Faith(믿음, 30), 둘째는 Father(하나님 아버지, 32), 셋째는 First(우선순위, 33)다.
믿음(Faith)이다(30).
기독교 실존주의 철학자 키엘케고르는 절망의 반대는 희망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했다. 그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는데, 이 병은 그저 막연히 잘 될 것이라는 단순한 희망으로는 치료할 수 없고, 믿음이 바로 그 치료약이라는 것이다.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말해준다. 그래서 절망의 반대가 믿음이라고 한 것이다. 믿음이 없으면 죽음에 이르는 절망이라는 병에 걸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도의 사람 조지 뮐러도 비슷한 말을 했다. ‘염려의 시작은 믿음의 끝이고, 믿음의 시작은 염려의 끝이다.’ 믿음의 횃불이 밝혀진 곳에는 절망이라는 어둠, 염려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주님께서도 비록 생존을 위한 것일지라도 염려를 믿음과 연관 지어 말씀하고 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30). 그리고 이어서 염려는 이방인의 태도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32). 여기서 ‘이방인들’이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물질을 숭배하는 우상숭배자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염려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물질을 숭배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증거인 것이다. 그러니 성도가 꼭 극복해야 할 문제다. 그 비결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신다는 믿음,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신다는 믿음이다. 믿음을 흔히 ‘맡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맡기면 책임을 지고 보살펴주기 때문에 염려하지 않고 잊어버릴 수 있다. 그래서 믿음을 염려의 끝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Father)다(32).
지난 7월에 사기사건에 연루되어 5명이 연쇄 자살한 사건이 우리 지역에 발생했다. 믿고 돈을 맡겼다가 돈을 모두 잃게 되자 이런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 것이다. 한 마디로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힌 것이다. 그러니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구를 믿느냐? 곧 ‘믿음의 대상’이 더 중요하다. 대상이 잘 못되면 함께 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이 심심하게 경고한 내용이 바로 이 점이다. 사람 믿지 마라. 세상 믿지 마라. 도울 힘도 없는 우상 믿지 마라. 그래서 두 번째가 ‘Father’ 즉, 하나님 아버지다. 본문에 나온 대로 우리의 형편을 다 보시고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 심지어 공중의 새와 들풀까지 돌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사랑하는 자녀를 끝까지 책임지시는 사랑의 하나님, 이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따르는 것이 염려를 이기는 또 하나의 비결이다.
우선순위(First)다(33).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보는 방법 중에 그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면 알 수가 있다. 그것이 그 사람의 중요하게 여기는 것, 곧 가치관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논어에 군자와 소인을 이렇게 구분하고 있다. ‘군자는 유어의(君子喩於義)하고, 소인은 유어이(小人喩於利)이니라.’ 군자는 항상 대의(大義)를 생각하면서 살고, 소인은 항상 자신의 소소한 이익만 생각하고 그것을 추구하며 산다는 것이다. 결국 이는 우선순위 문제로 군자의 우선순위는 의로움에 있고, 소인의 우선순위는 자기 이익에 있다는 것이다. 성도에게 있어서 신앙의 질과 태도를 결정하는 것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무엇에 우선순위를 두고 사느냐다. 본문은 이점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33). 성도의 우선순위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이고, 여기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면 다른 문제는 채워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면 생존과 일상에 대해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어느 나라 왕이 다른 나라에 사신을 보내 중요한 일을 처리하려고 했다. 적임자를 찾던 중 딱 한 사람이 생각났다. 그를 불러 자초지종을 말하며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그 사람이 기간이 얼마나 걸린 지를 물었고 1년 정도 걸린다고 하자 난색을 표했다. 자기가 중요한 일을 시작했는데, 1년을 비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왕이 그 일이 무엇인지를 묻고, 왕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했다. 왕이 책임지겠다고 하자 그 사람은 마음 놓고 사신의 길을 떠났다. 왕이 자기 일을 책임지겠다는데 무슨 염려가 있겠는가? 우리 찬송가(486장) 가사처럼 이 세상은 근심된 일, 곤고한 일, 죄악된 일이 많아 죽을 일만 날로 쌓여가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도 염려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두 종류일 것이다. 현실인식이 부족한 바보거나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사모하여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이다. 흔히 믿음이 깊은 사람을 가리켜 ‘거룩한 바보’라고 부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죽을 일만 쌓여가는 세상에서도 염려하지 않고 살아가니까 이런 별명을 붙여준 것이다. 우리 또한 ‘염려’를 잘 리모델링하여주님께 대한 철저한 믿음, 특히 모든 것을 책임져주시는 주님에 대한 깊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사는 거룩한 바보가 되자! 그래서 ‘염려하지 않는’(ἀμέλιμνος)우리 모두가 되자!
관련링크
- https://youtu.be/_JURYYrPiLc 14530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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