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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델링, ‘접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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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26,263회 작성일 22-08-07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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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델링, ‘접촉

8:1~4

2022. 8/7. 11:00

사랑의 언어, 접촉

미국의 뇌신경학자 데이비드 린든(David Linden)은 그의 책 터치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생후 2~3년 동안 아이를 많이 만지지 않거나 껴안지 않거나 쓰다듬어 주지 않으면 재앙이 발생한다. 접촉의 결핍은 결코 나중에 만회되지 않는다.’ 심각한 결핍장애를 겪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를 실험해 본 사람이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프레데릭 2세 황제다. 그는 원초적인 언어를 찾기 위해 갓난아기를 독방에 두고 인간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하는 상태로 키워봤다. 인간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한 상태에서 하는 말이 가장 원초적 언어라는 판단을 한 것이다.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났다. 격리해서 키운 갓난아기 모두가 얼마 못 가 죽고 말았다. 접촉의 중요성을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다. 미국 마이애미 터치 연구소는 80년대부터 신체접촉은 생존의 필수조건이라는 주제로 연구를 계속해왔다연구소는 조산아에게 매일 몸의 각 부분을 10초 동안 6번 쓰다듬어주는 마사지 치료로 큰 효과를 봤다고대부터 손을 통한 신체접촉은 치료의 중요한 요소였다.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는 의사라면 의술에 관한 모든 학리와 함께 마사지도 습득하라.’고 했다. 그만큼 터치(접촉)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접촉을 갈망한다. 인간은 접촉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설계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엄마의 품에 안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촉감은 우리가 세상에서 처음으로 느끼는 감각인 동시에 죽음의 순간까지 가져가는 감각이다. 접촉은 피부와 피부의 부딪침이 아니라 사랑, 관심, 위로, 환영의 마음을 전달하는 수단이다. 또한 접촉은 애정을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물론 지금도 진행 중이지만 우리는 코로나19라는 초유의 전염병 상황으로 접촉이 금지된 거리두기로 이 가장 중요한 감각에 심각한 결핍을 겪고 있다. 코로나는 확진자의 미각과 후각만 가져간 것이 아니라 인류의 촉감 또한 가져갔다. 촉감은 어쩌면 이 시대의 가장 큰 피해자일지 모른다. 아무튼 지금의 물리적 거리두기는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만, 사실 돌봄과 양육의 관점에서는 역효과가 아닐 수 없다.

 

 

예수님 목회의 특징

예수님의 목회는 촉감의 목회요, 접촉의 목회였다. 주님의 목회는 매우 육체적이었다. 사역의 대부분을 육체적 질병을 치료하셨고, 육적으로 필요한 먹거리를 제공하셨다. 또한 다양한 사람들과 식탁교제도 자주 가지셨다. 이는 끊임없이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접촉하기 위해서였다. 주님은 병을 고쳐주실 때 자주 병자와 접촉하셨다. 당시 사람들은 질병을 죄의 결과로 이해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병자를 만지는 것은 물론 심지어 가까이하는 것도 꺼렸다. 그런데도 주님은 환자와 접촉을 꺼리지 않으셨다. 특히 본문에 나온 나병과 같은 경우는 더욱 엄격했다. 일반 사람들과 접촉을 못하도록 격리를 시켰다. 신앙 공동체는 물론 생활 공동체에서 완전히 추방을 당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나병환자까지 접촉을 통해서 치료해 주셨다.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이르시되...’(3). 주님께서는 이렇게 접촉을 영적 진리를 전달하는 중요한 매개로 삼으신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접촉의 문화이며, 촉감의 종교다. 성경적인 영성은 따뜻한 손길이 있는접촉의 영성이다. 예배를 위한 주일성수와 같은 대면모임을 강조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본문에서와 같은 주님의 접촉사역에는 몇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위로

유행가 중에 산장의 여인이란 노래가 있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단풍잎만 채곡채곡 떨어져 쌓여있네./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몸/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나 홀로 재생의 길 찾으며 외로이 살아가네.이런 가사로 되어 있다. 깊은 산속 산장에서 투병 중에 있는 한 여인의 이야기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산장에 머물고 있지만 그녀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병보다 외로움이다. 처음엔 찾아와서 위로하고 격려도 하던 가족이나 지인의 발길이 시간이 지나면서 뜸해지자 외로움을 겪게 된 것이다. 그래서 병도 병이지만 이제는 외로움과 싸워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런 심정을 잘 표현하고 있는 노래다. 이것이 환자가 병과 함께 싸워야 하는 또 하나의 적이다. 사실은 이것이 더 무섭다. 마음을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음이 무너지면 병을 이길 수가 없다. 그래서 환자에게 중요한 것이 마음의 위로이고, 격려다. 이와 같은 위로와 격려를 일으키는 것이 사랑의 접촉이다.

 

주님께서 자주 환자를 만나면 먼저 접촉을 하시고, 치료해 주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오랜 질병으로 무너진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다. 본문에서도 주님은 찾아와 병을 고쳐달라고 호소하는 나병환자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대셨다.’ 사실 주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손을 대지 않고 말씀만으로도 그를 고칠 수가 있었다. 그런데도 율법의 금지를 어기면서까지 손을 대서 치료를 하신 것이다. 그 이유는 사랑의 접촉(touch) 때문이다. 절망적인 질병으로 무너진 그의 마음을 위로하시기 위해 따뜻한 사랑의 손길로 접촉을 하신 것이다. 주님과의 이 접촉은 건강한 삶과의 접속, 일상적인 생활과의 접속, 더 나아가 영적인 삶과의 접속으로 이어졌다. 현대문명은 거대한 사막과 같고, 그 속에서 현대인이 살고 있다. 북적대는 사람들 속에 살고 있지만 접촉이 없어 고독한 외톨이가 많다.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친구가 없기 때문이다. 가족도 불화와 갈등으로, 혹은 멀리 떨어져 살다보니 남남과 같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불안장애 환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통계가 있다. 또한 은둔족’(隱遁族)이니 외톨이 증후군’(loner syndrome)이니 하는 말들이 심심치 않게 회자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의 나병환자처럼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까지 만지시는 주님의 따스한 손길, 사랑의 접촉이 절실하다. 우리가 사막과 같은 이 세상을 성공적으로 잘 살아가기 위해선 주님과의 과도한 접촉이 요구된다. 그 비결이 찬양이고, 기도이고, 예배이다. 일상에서 묵상생활이다. 이와 같은 경건활동이 직접적인 접촉의 동기가 되거나 접촉면적을 넓히는 작용을 한다.

 

 

치유와 회복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3). 주님이 만져주시며 말씀하시자 즉시그동안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을 주었던 나병이 사라졌다. 고통스러운 질병으로부터 놓임을 받은 것이다. 주님은 공생애 동안 이와 같은 치유사역을 많이 하셨다. 8장과 9장을 보면, 치유사건의 사례가 많이 기록되어 있다. 사랑의 접촉을 통해 주님은 환자의 마음뿐만 아니라 몸도 깨끗하게 치료해주신 것이다. 주님의 사역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주님은 나병환자를 고쳐주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4). 이것은 일종의 일상회복을 위한 조치다. 병을 고쳐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회복을 위한 조치까지 알려주신 것이다. 끝까지 책임지시는 모습이다. 이것이 사랑의 특징이다. 사랑은 끝까지 책임을 지는 것이다.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이는 레14장에 나온 율법의 규정에 따라 하신 말씀이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나병과 같은 질병의 완치판정을 제사장이 했다. 유대사회는 중교중심 사회였고, 모든 일상생활은 신앙활동과 연결이 되기 때문에 종교의식을 담당하는 제사장이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병증이 나타났을 때 그것을 진단하고 격리를 시키는 것도, 치료에 대한 판단과 공동체 복귀도 제사장의 권한이었다. 그러므로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그들에게 입증하라는 것은 제사장을 통해 공적으로 판결을 받고, 가족에게, 사회로 돌아가 일상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주님은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고, 병만 고쳐주신 것으로 끝내지 않으셨다.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하도록 도와주신 것이다. 치료에 이어 회복까지 책임을 지신 것이다.

 

 

영적 미다스의 손(Midas touch)

하는 일마다 크게 성공을 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한 사람을 가리켜 부르는 말이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미다스의 손’(Midas touch)을 가졌다. 미다스는 헬라신화에 나오는 프리기아의 왕이다. 우연한 기회에 길을 잃은 실레노스를 잘 대접했다. 그런데 실레노스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아버지였다. 디오니소는 자기 아버지를 극진히 대접한 대가로 미다스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러자 욕심 많은 미다스는 자기 손으로 만지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하게 해달라고 청했고, 디오니소스는 그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미다스가 그의 요청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손이 닿으면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하자 처음에는 너무 신이 났을 것이다. 꼴도 보기 싫은 신하도 그의 손길이 닿자 황금 덩어리가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음식도 황금으로, 술잔과 술도 황금으로, 사랑하는 왕비도 그의 손이 닿자 황금이 되었다. 심지어는 그가 그토록 아끼고 사랑했던 딸도 황금으로 변했다. 비로소 미다스는 그의 손이 축복의 손이 아니라 저주의 손이라는 것을 알았다. 세상 모든 것이 그렇다. 축배인줄 알고 앞뒤 가리지 않고 추구했는데, 막상 독배로 드러나는 경우가 왕왕 있다. 특히 이 신화는 재물이란 우리의 양심을 마비시키고, 신앙도 왜곡시키고, 우리가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멀어지게 하는 것이라는 교훈을 주는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 예수님의 손은 진정한 영적’ 미다스의 손이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는 능력의 손이고, 모든 불행을 잠재우는 축복의 손이다.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살리시는 생명의 손이다. 시들한 영혼에 활력을 불어넣으시는 위로의 손이고, 낙심한 자에게 힘을 주시는 격려의 손이다. 모든 질병을 치료하는 치유의 손이고, 온전하게 회복시키시는 회복의 손이다. 주님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생명의 역사, 위로와 격려의 역사, 치료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났다. 또한 주님을 만지고, 주님과 함께 있기만 해도 이런 역사가 일어났다. 이와 같은 주님의 손길이 이 시간 우리의 몸을 만지고, 우리의 마음을 만지고, 우리의 영혼까지 만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와 우리 교회가 이러한 주님을 손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손이 닿는 곳마다 살리는 역사, 위로의 역사, 격려의 역사, 치료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고, 우리교회를 드나드는 사람마다 이런 역사가 경험이 되어야 한다. 미래학자 존 나이스비트는 하이테크’(Hi-Tech) 시대일수록 하이터치’(Hi-Touch)를 요구한다고 했다. 하이테크 시대에 하이터치 문화를 선도하고 확산시키는 주체가 성도이고 교회여야 한다. 우리의 접촉을 리모델링하여 주님이 강조하신 접촉의 문화, 곧 하이터치 문화를 실현하고, 하이터치 문화를 확산시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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