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 기쁨이 되는 삶, ‘공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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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9,462회 작성일 22-10-09 14:05본문
주님께 기쁨이 되는 삶, ‘공존’
렘7:1~11
2022. 10/9. 11:00
새로운 시대 성공잣대, ‘공존지수’(NQ, Network Quotient)
’NQ’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이는 ‘Network Quotient’의 약자로 ‘공존지수’를 말한다. 우리가 잘 아는 지능지수(IQ)를 비롯해서 감성지수(EQ), 도덕지수(MQ), 역경지수(AQ), 인성지수(PQ), 창의성 지수(CQ)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대부분의 지수가 개인적 역량을 강조한 것인데, NQ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능력을 강조한다. 「NQ로 살아라.」(김영사)는 책을 보면, ‘공존지수’의 개념을 소개하고 있는데, 새로운 네트워크사회에서 함께 잘 살아가는 능력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한 마디로 ‘함께 살줄 아는 능력’이 새로운 시대 성공잣대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아느냐’(Know What)보다 ‘누구를 아느냐’(Know Who)다. 지식이나 정보보다 사람,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즉, 관계가 자산이란 뜻이다.
사실 코로나19 사태를 비롯하여 기후의 공격과 같은 환경변화는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형태와 공존방식을 되짚어보는 계기가 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이기적인 생존에 초점을 두고 살다보니 이런 끔찍한 일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하여 인간의 조건은 불평등하고,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가 없다는 사실 또한 뼈저리게 확인했다. 그래서 공생과 공존을 위해 더불어 함께 함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즉, 모두가 함께 살아갈 줄 아는 공존하는 인간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돕는 자를 돕는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성도, 혹은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교회가 되려면 공존지수가 높은 공존의 영성을 지녀야 한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주님께 기쁨이 되는 삶, 여섯 번째로 ‘공존’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도둑의 소굴이 된 성전
본문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그 유명한 ‘성전’설교다. 예레미야서는 거의 절반에 해당되는 2장부터 25장까지가 12편의 예레미야의 설교로 되어 있다. 본문은 예레미야의 세 번째 설교로,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시작한 주전 622년부터 요시야가 죽고 그의 아들 여호야김 즉위 원년 주전 609년까지 14년 동안의 침묵을 깨고(26:1), ‘여호와의 성전’ 3창(4)을 외치면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설교다. 성전이 그들에게 번영과 안정, 평안과 평화를 보장할 것이라 믿고 성전을 찾아온 사람들을 향하여 예레미야는 성전이 파괴되리라고 외쳤다. 그 근거가 예루살렘 성전보다 훨씬 유서가 깊은 ‘실로’성소의 파괴다(12).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셨던 성소가 두 군데였다. 실로와 예루살렘이다. 그런데 실로는 사사시대 이전부터 매우 중요한 성소였고, 예루살렘으로 언약궤를 모셔오기 전까지 그곳에 약 500년 동안 언약궤가 모셔졌었다. 그런데 그 유서 깊은 실로를 북왕국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파괴시켜 버리신 것이다(14). 그것이 불과 100년 전의 일이다. 그러니 예루살렘 성전 역시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이다(15).
그러면서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성전을 ‘여호와의 성전’이라 부르지 않고, 그냥 ‘이 집’이라고만 부르고(10,11), 심지어는 ‘도둑의 소굴’(11)이라고 불렀다. 집의 정체성은 집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에 의해 결정된다. 아무리 궁궐처럼 화려하고 아름다운 집도 그 집에 사기꾼이 살면 사기꾼의 집이 되고, 강도가 살면 강도의 집이 된다. 반면 오두막이라도 성인이 살면 성인의 집이 된다. 예루살렘 성전이 유서가 깊고 화려해도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으니 그곳은 그냥 집에 불과한 것이고, 도둑처럼 온갖 악행을 자행하는 자들이 모인 곳이기에 도둑의 소굴이라고 부른 것이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성전’ 삼창을 외치며 성전으로 나아온 그들의 삶을 이렇게 고발한다.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도다.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8,9). 이와 같은 그들의 생활을 십계명에 비춰보면 적어도 여섯 개의 계명을 범하고 있었다. 거짓말 혹은 거짓 맹세(9계명), 도둑질(8계명), 살인(6계명), 간음(7계명), 바알에게 분향하고 다른 신을 따르는 것(1,2계명). 1개만 범해도 심각한데, 6개의 계명을 범하고도 예배자라고 하나님 앞에 나아온 것은 가증한 일이며, 성전을 도둑의 소굴이 되게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다. 우리가 올바른 예배자가 되지 않으면 주님의 임재를 기대할 수가 없고, 주님의 임재가 없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고 인간적인 공연이나 행사에 불과하다. 그러면 예배당은 그냥 공연장이고 행사장일 뿐 더 이상 예배의 처소일 수가 없다.
성전이 되려면
그러므로 성전을 성전되게 하려면, 적어도 그들의 삶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이니라.’(5~7). 이를 정리하면 네 가지다. 우선, 하나님께 초점을 두는 삶이다.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초점을 두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여기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그래서 성전이 되는 것이다(고전3:16).
둘째는, 윤리적으로 탁월한 삶이다.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는 윤리적으로 올바른 삶, 우러러볼 수 있는 탁월한 삶을 뜻한다. 믿음으로 끝이 아니라 믿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소금처럼, 빛처럼 사는 삶과 같은 의미다. 여기서 주님은 팔복에 이어 가장 먼저 하신 말이 소금처럼 빛처럼 사는 삶이였다. 이는 주변에 선한 영향을 미치는 올바른 삶, 탁월한 삶을 살라는 뜻이다. 특히 빛처럼 살라는 말씀에서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등불은 켜서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둔다. 즉, 주변을 두루 잘 비칠 수 있는 높은 곳에다 둔다. 세상을 위한 빛으로서 성도의 삶이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올바르고 탁월한 삶, 그래야 세상이 우러러볼 수 있고, 또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예배자로서의 합당한 삶이다.
셋째는, 일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는 삶이다.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그리고 넷째는,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다.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여기서 셋째와 넷째는 거의 같은 내용이다. 셋째의 결과가 넷째이기 때문이다. 정의와 공의는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기본적인 원칙이자, 이미 오신 왕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원칙이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 나라의 원칙이기도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성도가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성경이 말한 정의와 공의는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돌아보는 것이다. 특히 약자(‘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적극적으로 보살피고 변호하는 것, 곧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전을 성전되게 하려면 예배자의 삶이 하나님께 초점을 두고, 스스로 윤리적인 탁월성을 가지면서, 특히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공존의 영성
본문에서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즉, 이방인(나그네)과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 이는 신구약 성경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말씀이다. 구약에서는 약자의 상징인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의 ‘편을 드시는’ 하나님에 대한 설명이 자주 등장하고, 야고보서는 참된 경건을 고아와 과부를 환란 중에 돌아보는 것이라고 한다. 어려움 처한 사람을 돕는 것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것 중 하나이고, 아주 귀하고 값진 일이다. 하나님을 미소 짓게 하는 일이다. 더 나아가 주님 자신을 섬기는 일이다(마25:31~). 그러므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우선적으로 돌보고 사랑하는 것, 그래서 그들과 공생(존)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예배자인 성도와 교회의 사명이다. 세상은 소유가 많은 사람을 부자라고 하고, 이것이 잘된 것, 성공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진짜 부자는 이웃을 많이 가진 사람이다. 진짜 성공한 인생은 좋은 이웃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예배자의 삶이고, 또한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교회의 모습이다. 성도와 교회는 주변에, 특히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성도인 나로, 그리고 섬기는 교회로 인하여 주변이 행복하게 잘 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공존의 영성이다. 이를 실천적으로 잘 보여준 교회가 있다. 바로 초대 예루살렘 교회다(행2:44이하 참조).
함께 하는 것이 행복이다.
미국 프로농구(NBA)의 명문구단 올랜도 매직의 공동설립자이자, 수석 부사장이었던 팻 윌리엄스의 이야기다. 그는 NBA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아 명예의 전당에도 올랐고, 많은 책을 저술한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다. 이렇게 큰 성공을 거둔 그는 또한 열여덟 명의 자녀를 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렇게 많은 자녀 중에서 윌리암스 부부가 낳은 자녀는 네 명이고, 나머지 열네 명은 입양한 아이들이다. 그리고 입양한 아이들 중 상당수는 몸이 불편한 장애를 갖고 있고, 그중에 한국인 아이도 두 명이나 있다. 그는 많은 가족과 함께 자주 여행을 다니기 위해서 대형버스까지 구매했다고 한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고, 아이들을 좋아한다고 해도 쉽사리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많은 아이들을 입양하고 돌보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제가 자녀들을 많이 두고 보살피는 것은 저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저 혼자만 잘 살아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고, 행복은 나눌 줄 알아야만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아이들을 입양하는 것은 행복을 위한 저의 투자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함께 산다는 것, 곧 공존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다. 생명부지, 그것도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입양하여 가족으로 살아가는 윌리엄스를 보며, 가끔씩 마주한 이웃이나 교회지체끼리 사내 못 사내 아우성인 우리의 모습이 참으로 부끄러울 뿐이다. 아무튼 공존은 행복한 삶을 위한 값진 투자이다.
모 방송사에서 진행하는〈나는 자연인이다!〉는 프로그램이 있다. 가끔 보면 출연자마다 깊은 산속에서, 혹은 무인도에서 혼자 살며 행복하다고 한다. 물론 그럴 수 있겠지만 함께 나누고 즐거워해 줄 사람이 없는데 혼자 행복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성도와 교회는 깊은 산속이나 무인도에 홀로 사는 자연인이 아니다. 사람이 북적대는 시장 한 가운데서, 혹은 사랑의 왕래가 많은 광장에서 더불어 함께 사는 존재다. 그러므로 성도와 교회는 이기주의적 생존이 아니라 이타주의적 공존을 추구해야 한다. 즉, 당신 먼저(You First)의 삶을 실천하고, 자기 것을 먼저 내주며 베풀고, 먼저 사랑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주변 사람에게 잘하는 것이다. 이런 사소한 것이 함께 행복해지는 방식이다. 이것이 공존지수를 높이는 것이고, 또한 이타주의적 공존사회를 지향하는 공존의 영성이다. 이것이 교회를 교회되게! 성도를 성도되게 하는 길이다.
관련링크
- https://youtu.be/R2CH5dH_XxM 5229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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