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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기쁨이 되는 삶,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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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16,716회 작성일 22-09-04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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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기쁨이 되는 삶, ‘믿음

11:5~6

2022. 9/4. 11:00

신뢰하지 못해서

어느 수도사가 눈이 많이 내린 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새들에게 모이를 주려했다. 그릇에 모이를 담아놓고 새들이 와서 먹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가 근처에 있으니까 새들이 머뭇거리며 오질 않았다. 눈이 많이 와서 먹을 것도 없는데 얼마나 배가 고프냐며 빨리 와서 먹으라고 불러도 그를 경계하면서 새들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새들이 나를 신뢰하지 않는구나. 내가 잡아가지고 죽여 버릴까봐 오지 않는구나!’ 이 생각과 함께 수도사는 큰 깨달음에 자기 무릎을 쳤다. ‘아하, 그렇구나. 내가 새들에게 모이를 주려고 해도 새들이 오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나에게 좋은 것 귀한 것 복된 것을 다 준비해놓고 기다리셔도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해서 그것들을 누리지 못한 것이구나. 신령한 은혜를 주시려고 준비해놓고 기다리셔도 내가 믿음이 없어 그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구나. 새들의 모습이 곧 나의 모습이구나!’ 이렇게 자신의 믿음 없음을 깊이 탄식하며 회개했다고 한다.

 

그렇다. 우리 역시 이 새들과 같다. 하나님께서 다 준비해 놓은, 정말 유익하고 좋은 것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다 마련해 놓으셨지만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련해 놓으신 각양 은혜의 선물과 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인간에게 가장 큰 복은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이다. 생명도 안전도 평안도 풍성함도 모두 보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믿임이 있어야 한다. 믿음의 눈이 있어야 주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것들을 볼 수가 있고, 믿음의 발이 있어야 주님께로 달려갈 수 있고, 믿음의 손이 있어야 은혜의 선물을 받을 수가 있고, 믿음의 마음이 있어야 이 모든 것을 충분히 누릴 수가 있다. 그래서 주님께 기쁨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믿음이 없는 것이다. 주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신령한 선물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없고, 주님께로 달려갈 수 있는 믿음의 발이 없고, 그 선물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의 손이 없고, 누릴 수 있는 믿음의 마음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 기쁨이 되지 못한 것이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복음서를 보면, 주님께 큰 기쁨을 드려 주님께 칭찬을 받은 사람들과 주님께 실망을 드려 꾸지람을 받은 사람들이 나온다. 8장에 나온 두 사건에서 이를 확인할 수가 있다. 첫 번째 사건은 가버나움에 주둔한 로마인 백인대장이다(5~18). 주님께서 가버나움으로 가셨을 때다. 한 로마인 백인대장이 주님을 찾아와서 자신의 하인이 중풍에 걸려 고통스러워한다며 고쳐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주님께서 흔쾌히 가서 고쳐주시겠다고 했고, 그는 주님께서 친히 자기 집에 오신 것을 감당할 수 없으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셔도 자기 하인이 낫겠다고 했다. 이와 같은 그의 고백에 주님께 감탄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하시더라.’(10). 주님께서 무엇 때문에 이토록 감탄하시며 그를 칭찬하신 것일까?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습니다.’(8)고 고백한 그의 믿음 때문이다. 그의 믿음이 이토록 주님을 감동하시게 만들었고, 주님께서 이토록 기뻐하신 것이다.

 

두 번째는 주님과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사건이다(23~27). 주님과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 주님은 피곤하여 주무시고 계셨는데, 바람이 불어 바닷물이 배에 넘쳤다. 당황한 제자들은 주무시는 주님을 깨웠다. 주님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보시고 믿음이 작은 자들’(26)이라고 꾸짖으셨다. 이 두 사건을 통해 우리는 주님이 참으로 기뻐하시는 것, 곧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 수가 있다. 그것은 믿음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성도의 존재목적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있다. 신앙생활은 주님 한 분을 기쁘시게 섬기는 생활이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 있어야 이런 일이 가능해진다.

 

에녹의 믿음

이와 같은 믿음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성경이 있다. 히브리서 11장이다. 그래서 흔히 히11장을 믿음장이라고 한다. 천지창조 사건과 더불어 아벨을 시작으로 구약시대 믿음의 선진들부터 신약시대 선진들의 믿음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그들의 믿음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본장의 특징이다. 본문은 에녹의 믿음과 함께 믿음에 대한 내용을 말하고 있다. 에녹의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5).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에녹은 육체적인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늘나라로 옮겨간 최초의 사람이다. 그가 이런 놀라운 은혜를 입었던 것은 그의 믿음 때문이다.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에녹의 믿음과 함께 믿음의 특징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6). 이는 에녹으로 하여금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옮겨가게 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당위성과 믿음의 내용이다.

 

믿음의 당위성

본문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에게 반드시 필요하고 또 중요한 것이 믿음임을 강조한다본문은 영어로 반드시~해야 한다.’는 뜻을 가진 ‘must’에 해당되는 불변동사인 데이(δει)를 사용하여 이를 강조하고 있다. 이 동사 역시 반드시~해야 한다.’는 뜻으로 필연성이나 당위성을 뜻한다헬라적 사고에서는 사람의 의지나 국가의 법률, 신적 주문 등이 필연성이나 당위성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가장 강력하고 포괄적인 당위성을 규정하는 것은 모이라(μοιρα) , 운명이었다. 그들은 운명을 인간과 역사와 우주의 당위성을 규정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우리도 어떤 일이나 사건의 당위성(필연성)을 강조할 때 운명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분문에 사용되고 있는 데이모이라와 같은 의미다. 그러나 히브리어에는 데이에 상응하는 단어가 없다. 그 이유는 당위성을 강조하는 운명이라는 헬라적 개념이 하나님의 뜻과 주권을 믿는 히브리인에게는 낯설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뜻과 주권이 운명과 같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본문은 히브리인에게는 생소한 헬라적 개념의 단어를 사용하여 믿음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다그러므로 믿음은 선택적인 것이 아니라 운명적이라는 것, 다시 말하면 반드시믿어야 하고, 당연히믿어야 하고,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삶에 있어서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의 내용

그렇다면 무엇을 반드시’ 믿어야 하고, 당연히’ 믿어야 하고, ’ 믿어야 하는가? 믿음의 당위성도 중요하지만 믿음의 내용 또한 중요하다. 본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과 관련하여 두 가지 필연적인 요구를 말씀하고 있다첫째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다여기서 그가 계시다.’(εστιν)는 의미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현재형이다. 이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지속적인 것과 믿음의 현재성을 나타낸다(초월성과 내재성). , 하나님은 존재하시되, 언제나 어디서나 살아계신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을 뜻한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만 계셨다가 지금은 자취를 감춘 것이 아니라 지금도 그 때처럼 여전히 살아계신다는 것이다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살아계실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에 구비되어야 할 첫째 요소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다. 동시에 바로 지금(Now), 여기(Here)라는 믿음의 현재성이다. 믿음은 현재형이다. 지금, 여기가 중요하다. 이와 같은 믿음의 현재성이 에녹으로 하나님과 동행하게 했고, 그것이 삶이 된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기 때문이다. 기뻐하지 않는 길을 평생 걷는 사람은 없다. 기뻐하지 않는 사람과는 동행할 수가 없다. 그래서 최초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은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을 하나님께 큰 기쁨을 드린 자라고 번역한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상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다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에 대한 보답을 반드시 해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단순히 함께만 하신 것이 아니라 수시로 우리에게 반응을 보이시는 분, 우리가 부를 때 대답을 해주시고, 우리가 물을 때 답을 주시고, 우리가 손을 내밀었을 때 붙잡아주시고, 우리가 눈물을 흘릴 때 그 눈물을 닦아주시고, 우리가 길에 지쳐서 쓰러질 때 부축해주시거나 심지어 업어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문제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다. 본장에 소개되고 있는 모든 믿음의 선진은 바로 이와 같은 믿음을 지닌 사람들이었고, 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그들의 삶이 하나님이 상주시는 이신 것을 확인해주고 있다. 당장에 에녹의 경우는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진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에 대한 보답이다. 이러한 믿음의 실제적 보상을 믿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이다.

 

부지런히 하나님을 찾아라

본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 혹은 하나님을 찾는 자란 말씀이 나오고 있다. ‘찾는 자에서 찾다에 상응하는 구약 히브리어 단어는 따라쉬(דָּרַשׁ). 이 동사에는 찾다.’, ‘구하다.’, ‘문의하다.’, ‘요구하다.’, ‘예배하다.’ 등의 뜻이 있다. 하나님을 부지런히 찾고, 문의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의미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특히 구약 역대기서는 사울과 다윗의 차이를 이 따라쉬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점점 쇠()한 이유를 그가 하나님을 따라쉬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다윗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점점 흥한 이유를 그가 하나님을 따라쉬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 사울은 하나님을 찾지도 묻지도 구하지도 않았다는 것이고, 다윗은 부지런히 하나님을 찾고 수시로 하나님께 묻고, 열심히 하나님께 구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을 따라쉬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표시가 되기에 하나님이 기뻐하심은 물론이고, 상급 또한 잊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에녹과 같은 믿음의 사람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았고, 얼마나 배웠고, 무엇을 이뤘고, 무엇을 얼마나 가졌고, 얼마나 영향력이 있느냐를 보지 않는다. 우리의 믿음을 보신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은 하나님의 존재와 상주시는 분이신 것을 믿고 따라쉬하는 것이다. 날마다 하나님을 찾고, 구하고, 묻고,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이다. 이런 믿음의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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