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어주소서! ‘입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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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30,442회 작성일 21-12-12 13:21본문
열어주소서! ‘입Ⅸ’
막7:24~30
2021. 12/12. 11:00(대림절 셋째 주일)
무릎 꿇음
어느 분의 간증이다. 그는 항상 부모의 기도소리를 들으며 자랐다고 한다. 6.25때, 학도병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부모님이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기를 바란다는 축복기도를 드리고, 그에게 이렇게 당부를 했다. ‘네가 돌아올 때까지 우리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너를 위해 기도하겠다. 어느 곳에 있든지 새벽 5시가 되면 우리가 너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라.’ 그는 전장에서 부모님이 자기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고, 그때마다 부모님의 기도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그 무서운 전쟁터에서도 나름대로 경건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졌다. 밤새 잠도 못자고 참호에서 적진을 살피고 있는데, 마침 새벽 5시였다. 부모님이 자기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었다. 힘들고 두려운 마음에 그도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다. 기도하고 있는 그 시간, 적의 공격이 또 있었다. 서 있던 사람이 여럿 죽고, 여러 사람이 다쳤다. 마침 그는 기도하기 위해 무릎 꿇고 있었기 때문에 피할 수 있었다.
이분의 간증요점은 이것다. 자신이 기도를 해서 어려운 순간을 모면했다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기도가 자기를 살렸다는 것이다. 부모의 기도가 어려운 순간 자녀로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만든 것이고, 그 무릎 꿇음이 위기를 넘어서게 한 것이다. 지난주일 주보에 ‘흉내만 내도 좋은 것들’이란 제목의 글을 올렸는데, 신앙생활에서 흉내만 내도 좋은 것이 ‘기도’다. 부모가 기도하면 자녀가 자연스럽게 따라서 흉내를 내게 되고, 부모를 따라 흉내를 내다보면 어느새 물이 들게 된다. 물이 드는 것이 곧 닮는 것이다. 이런 중에 예기치 않는 복까지 경험하게 되는 것이 기도다. 인생에서 가장 안전한 자세는 ‘무릎을 꿇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것이다. 그 무릎 꿇음이 자신과 자녀를 안전하게 지키는 비결이다. 그렇다. 기도가 사람을 살린다. 우리의 기도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하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이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이 본문이다.
찾아오신 주님
본문은 예수님께서 유다를 벗어나 이방인의 땅 두로와 시돈지방에서 있었던 사건이다. 24절을 보면 주님께서 잠시 쉬기 위해 갈릴리를 떠나 두로의 어느 집을 찾으신 것처럼 보이지만 다분히 의도된 방문이었다. 갈릴리에서 두로(약50km)와 시돈(약80km)까지가 가까운 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 사건 이후 데가볼리 지역(갈릴리 남동쪽에 위치)을 거쳐 다시 갈릴리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마치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기 위해 낮 시간에 유대인이 절대로 가지 않는 길을 잡아 사마리아를 통과한 것과 같다(요4:). 도움을 간절히 기다리는 한 영혼을 위해 그렇게 먼 길을 찾아오신 것이다. 우리 기독교와 타종교의 차이가 바로 이 점이다. 세상 모든 종교는 ‘찾아가는’종교다. 수행과 구도의 종교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는 ‘찾아오는’종교다. 즉, 은총의 종교다. 그래서 복음서를 보면 우리 주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끊임없이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돌아다니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본문도 그 중에 하나다. 그것도 먼 이방지역까지 찾아오신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주님의 찾아오심에 대한 반응이 믿음이다.
듣고 ‘곧’ 찾아옴
본문은 찾아오신 주님에 대한 올바른 반응의 좋은 모범이다. 주님은 두로 지역의 어느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려고 하셨지만 숨길 수가 없었다(24). 이는 주님이 어떤 존재인지를 잘 표현해주는 말씀이다. 주님은 빛이시기 때문이다. 빛은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가 없는 존재다. 그런데 정작 그곳에서 주님을 찾아온 사람은 달랑 한 사람이었다. ‘수로보니게’(시리아의 베니게) 여인뿐이었다. 그녀는 주님께서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즉시’(곧) 찾아왔다(25). 그래서 자신의 가슴 아픈 문제를 해결 받았다. 사실 문제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누구나 아픈 손가락 하나쯤은 다 가지고 있고, 그것을 해결 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문제를 누구에게 가지고 가야할지 모르는 사람이 많고, 그래서 그냥 체념하고 산다. 본문에서도 두로지역 사람들은 주님의 소문을 들었고, 주님께서 자기 지역에 오신 줄도 알았다. 그런데도 찾아온 사람은 수로보니게 여인뿐이었다. 그녀만이 자신의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졌고, 주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주님의 소식을 듣고 곧 바로 찾아온 것이다.
복음서에서 여성에 관한 이야기가 은근히 강조하고 있는 것이 있다. 억울한 것은 참고 넘길 것이 아니라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해결될 때까지 탄원하고 호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고대로 갈수록 여성이 낙심하는 상황에서 사는 것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여자이기에 참아야 하는 경우, 그래서 낙심하는 상황이 많았다. 성경은 이를 안타까워서 그랬을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유독 안타까운 사정을 가진 여성의 이야기가 많고, 주님은 그들의 호소를 외면하지 않고 해결해 주셨다. 본문도 그 중에 하나다. 그저 가슴에 묻어두지 않고 주님 앞으로 가지고나가 포기하지 않고 해결될 때까지 탄원하고 호소하여 주님으로부터 큰 칭찬과 더불어 응답을 받아냈다.
절실하고 간절하게
그렇다면 무엇이 그녀를 다른 사람과 차이가 나도록 하여 이런 복을 누리게 한 것일까?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마태복음(15:21~28)을 보면, 그녀가 주님을 찾아가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기까지 적지 않는 어려움이 있었다. 우선, 주님은 그녀의 부르짖음에 침묵으로 일관을 하셨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마15:23a). 그러자 제자들까지 나서서 이 여자를 옹호했다.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23b). 제자들이 보기에도 이 여자에 대한 주님의 태도가 딱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더욱 심하게 차별적이고 모욕적인 발언까지 하시며 거절의사를 분명히 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27). 그녀를 ‘개’라고 말씀을 하신 것이다. 안타까운 문제를 가지고 찾아온 사람에게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막 대하시는 경우는 없었다. 사마리아인도 기꺼이 고쳐주시고, 이미 이방인도 환영하여 그들의 필요를 다 해결해 주셨다.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메와 요단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많은 무리가 그가 하시는 큰일을 듣고자 나아오는지라....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막3:8~10). 그런데 주님은 이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만 이렇게 대하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여인에 대한 주님의 태도가 아니라 주님을 대하는 이 여인의 ‘태도’다. 주님은 이 여인을 위해 갈릴리에서 이곳까지 오셨다. 그러니 여기서 주님께서 이 여인에게 보인 태도는 결코 중요한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주님의 태도에 대한 이 여인의 태도다. 이 여인은 성경의 사람이라 불릴 만큼 말씀에 능통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조차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심지어는 주님의 능력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에게서 왔다고 폄하하는 상황에, 이방이었던 그녀는 주님을 ‘다윗의 자손’(‘메시야’라는 고백)이라고 고백했다. 주님의 태도와 말씀에 낙심하지 않고 계속 부르짖으면서 주님을 감동시켰다. 그녀의 이러한 태도는 그녀의 신앙고백이 말하듯, 주님께 대한 변함없는 신뢰와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주님만이 딸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고, 그러니 주님이 아니면 안 된다는 절박하고 절실한 마음이 그녀로 하여금 계속해서 간절히 부르짖게 만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회라는 것이 항상 있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그랬다. 때문에 주님께서 보이신 납득하기 어려운 태도의 장애물을 가볍게 넘어설 수 있었고, 주님께 감동까지 드리게 되었다. 문제의 해결은 물론 ‘믿음이 크다’는 칭찬도 받았다. 그래서 그녀는 주님을 따르는 사람의 모델이자, 기도의 좋은 모델이 되었다.
신앙생활은 기도생활이다.
지난 주일에도 말했듯이 기도에도 태도가 중요한데, 그것은 ‘간절함’이라고 했다. ‘절실함’이고, ‘꾸준함’이라고 했다. 기도의 내용보다 중요한 것이 태도라고 했고, 실제로 성경은 이점을 강조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 세 단어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동사가 ‘부르짖다.’이다. 이 ‘부르짖다’를 히브리어로 ‘짜아크’(זָעַק)라고 한다. ‘입을 크게 벌리고 부르짖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이 동사는 성경에서 기도와 거의 동의어로 자주 사용이 되고 있다. 이는 기도를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문제없는 사람이 없다. 때문에 누구에게나 주님이 필요하다. 주님의 도움을 받으려면 기도해야 하고, 그것도 입을 크게 벌리고 부르짖여야한다.
때맞추어 내리는 비처럼, 뿌리에서 올라오는 수액처럼, 등잔의 기름처럼 우리에게 날마다 주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은혜로 숨쉬고, 은혜로 자라고, 은혜로 강해지고, 은혜로 풍성해지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고, 영적인 삶이기 때문이다. 이런 은혜를 공급받는 통로가 바로 ‘기도’다. 기도할 때 은혜의 소낙비가 내리고, 기도할 때 은혜의 수액이 풍성하고, 기도할 때 은혜의 기름이 넘치게 된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곧 기도생활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기도생활에 중요한 조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간절함이다. 절실함이고, 또한 꾸준함이다. 여우가 사냥에서 토끼를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여우는 한 끼 식사를 위해 달리지만 토끼는 살아남기 위해 달리기 때문이다. 이것이 간절함이 만들어내는 차이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에 같이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드리고, 기도를 드려도 은혜를 경험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꼭 있다. 그 차이는 갈급함과 간절함에 있다. 간절함은 중요한 삶의 태도이자 영적 자산이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는 속담처럼 간절함이 주님을 찾게 만들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들고, 그 간절함이 포기하거나 낙담하지 않고 응답을 받 때까지 기도하게 만든다. 간절함이 입을 크게 열게 만들고, 또한 크게 부르짖게 만든다. 특히 주님도 간절히 기도하셨다.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22:44).
관련링크
- https://youtu.be/uMZKWvT3ON4 14120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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