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어주소서! ‘귀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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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458회 작성일 21-08-16 12:21본문
열어주소서! ‘귀Ⅳ’
대하36:11~21
2021. 8/15. 11:00
귀가 막힌 사람
옛날 중국에 편작(扁鵲)이라는 전설적인 명의(名醫)가 있었다. 그가 제(齊)나라 환공(齊桓公)을 보고 병이 지금 피부에 있으니 치료하자고 했다. 그러나 그는 듣지 않았다. 다시 며칠 후 병이 혈액으로 들어갔으니 곧 치료하자고 했다. 그래도 듣지 않았다. 다시 며칠 후 와서 지금 병이 위장에까지 갔으니 당장 치료하자고 치료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독하다고 했다. 그래도 그의 말을 무시했다. 또 다시 며칠 후 와보고는 아무 말 없이 그냥가려고 했다. 이상히 여겨 물었고, 편작이 대답했다. ‘이제 병이 골수에까지 박혀 고칠 수 없습니다.’ 그는 결국 죽고 말았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점은 환공을 죽음으로 내몬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병이 아니라 막힌 그의 귀다. 속히 치료하라는 의원의 말에 귀를 막았기 때문이다. 흔히 어이없는 일을 만날 때 ‘기가 막힌다.’고 말한다.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귀가 막히면 기(氣)가 막히고, 기각 막히면 죽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지 않는 ‘귀가 막힌’ 사람이 있다. 한 마디로 ‘교만한’ 사람이다. 귀를 막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교만이기 때문이다. 교만은 모든 악의 뿌리고, 극복하기 어려운 악덕이다. 그래서 경건한 성도는 교만의 덧에 걸리지 않도록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흔히 교만은 시각, 청각, 언어장애를 일으킨다고 한다. 교만은 바벨탑과 같다. 하늘까지 닿으려는 자기 확대(장)가 교만이다. 이렇게 자기를 끝없이 확대(장)하다 보니 스스로 자기 안에 갇히고 마는 것이 또한 교만이다. 그래서 자기 이외는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된다. 봐도 자기중심적으로만 보고, 들어도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듣는, 이른바 선택적으로만 보고, 듣게 되는 것이다. 이런 보고 들음은 그대로 언어생활로 나타난다. 자기중심적으로만 보고 듣기에 다른 사람을 배려하거나 격려하는 말, 칭찬의 말에 인색할 수밖에 없다.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무례하고 거친 말, 감정적인 말로 언어폭력을 자행하게 된다. 이런 교만은 필연적으로 단절을 낳고, 단절은 절망이라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리게 만든다. 그러므로 들음의 회복은 교만을 제거하는 것이다.
들음의 실패가 곧 인생의 실패
어느 분이 서양과 동양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 것을 보았다. 서양은 ‘보는 것’(봄)을 강조하는 문화이고, 동양은 ‘듣는 것’(들음)을 강조하는 문화라고 했다. 그래서 서양문화의 한 축(軸)을 담당하는 그리스 문화를 보면 웅장한 신전이나 조각상, 그리고 회화나 연극, 운동경기가 발달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는 것, 보여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연금술을 비롯하여 명상이나 수많은 신비종교가 동양에서 발달했다. 이들은 주로 들음을 강조한다. 성경도 보는 것보다는 듣는 것, 곧 들음을 강조한다(구약에서 ‘샤마’ 115회, 신약에서 ‘아쿠오’ 430회. 여기서 파생된 단어들까지 합하면 훨씬 많다). 들음이 영성의 차이를 만들고, 들음이 하나님의 복을 결정짓는 형통의 비결이라고 말씀한다(신28:, 시1: 등).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는 들음의 중요성을 실증하고 있다.
이집트를 나온 이스라엘이 40년 만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치룬 첫 번째 전투(여리고 전투)에서 승리가 들음에 있었고, 첫 번째 패배(아이 전투)도 들음에 있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물어서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군대를 움직인 것이 원인이었다. 또 하나는 아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바쳐진 물건에 손을 댄 것이었다. 이렇게 가나안 정복전쟁 초반에 있었던 두 사건은 앞으로 가나안 정복전쟁과 이후의 삶에 대한 중요한 원리를 제공한다. 그 원리가 ‘들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면 가나안 정복 전쟁은 물론 그 이후 국가를 이루어 승승장구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민족 공동체, 혹은 국가 공동체에만 해당된 것이 아니라 개인이나 가정도 마찬가지다. 즉, 들음이 민족의 운명뿐만 아니라 개인과 가족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들음을 통해 자신과 가족을 파멸의 불구덩이에서 구원한 ‘라합’사건과 듣지 않음으로 자신과 가족을 돌무더기로 만든 ‘아간’사건을 섭입한 것이다.
이와 같은 말씀에도 불구하고 사사시대가 실패로 막을 내렸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소견대로’가 사사시대의 모토였다. 왕정시대에 들어와서도 첫 번째 왕 사울이 실패한 것도 들음 때문이고,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분열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도 들음에 있다. 솔로몬이 통치 말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음이 그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그래서 그 나라를 빼앗아 신하에게 주리라 하셨다(왕상11:11). 그리고 약 500년의 이스라엘 역사가 끝장나고, 심지어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세운 우람한 성전까지 파괴된 것도 들음 때문이다. 본문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들음의 최대 적은 ‘교만’이다.
앞에서 교만은 청각장애를 일으킨다고 했다. 교만은 자기 확장이고, 자기 확대이기에 스스로 자기 안에 갇혀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들어도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선택적으로 듣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이 듣는데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유다의 최후를 보여주고 있는 본문을 보면 더욱 분명해 진다. 본문은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와 그 시대를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일러도 그 앞에서 겸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한 느부갓네살 왕이 그를 그의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게 하였으나 그가 왕을 배반하고 목을 곧게 하며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과 그 거하시는 곳을 아끼사 부지런히 그의 사신들을 그 백성에게 보내어 이르셨으나 그의 백성이 하나님의 사신들을 비웃고 그의 말씀을 멸시하며 그의 선지자를 욕하며 여호와의 진노를 그의 백성에게 미치게 하여 회복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12,13,15,16).
이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유다가 망하게 된 원인에 대한 말씀이다. 시드기야와 그의 백성(유다인)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지 않고 목을 곧게 하고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 예레미야를 비롯한 많은 선지자들을 비웃고, 욕하고, 그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했기 때문이다. ‘목을 곧게 하고 마음을 완악하게 했다.’는 것은 교만의 다른 표현이고, ‘비웃고 멸시하고 욕했다.’는 것은 교만한 태도를 뜻한다. 결국 그들이 교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닫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곧 나라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잠18:12). 말씀이 생명이고, 형통의 원리인데 교만은 그 말씀에 귀를 막아버리니까 멸망의 앞잡이(지름길)가 된 것이고, 겸손은 말씀에 귀를 활짝 열고 있으니까 존귀의 길잡이(인도자)가 된 것이다.
어떤 분이 들음을 ‘정신의 문’이라고 했다. 나는 이를 ‘영혼의 문’이라고 고쳐서 부르고 싶다. 들음에서 ‘믿음’이 나기 때문이다(롬10:17). 정신의 문이 활짝 열려 있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계속 성장하게 된다. 항상 겸손하게 듣고 배우기 때문이다. 공자는 나이 60을 이순(耳順)이라고 했지만 괴테는 마흔이 넘으면 이전에 습득한 많은 것들 때문에 정신의 문이 닫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고 했다. 나는 괴테의 말이 훨씬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공자처럼 위대한 정신을 지닌 사람은 평생 정신의 문을 활짝 열고 산다. 그래서 인류역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위인이 된 것이다. 신앙생활도 다르지 않다. 영혼의 문을 활짝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신앙이 성숙하게 되고, 하나님의 복이 임하여 형통하게 되는 것이다. 영혼의 문을 활짝 열어 겸손하게 듣는 우리가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신앙의 세계, 영적인 세계에서 공자처럼 위대한 영적 거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또한 이렇게 영혼의 문이 열려야 하나님을 향한 중심을 품고 세상과 교통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품고 시대와 교통하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 시대를 맡기신 주님의 뜻이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귀밝이술
’귀밝이술‘이란 것이 있다. 음력 정월 보름날 새벽에 귀가 밝아지라고 마시는 술이다. 명이주(明耳酒), 이명주(耳明酒), 총이주(聰耳酒), 치롱주(治聾酒)라고도 한다. 잘 듣고 현명하게 판단을 할 수 있도록 귀를 밝게 해야 한다는 일종의 세시풍속이다. 흔히 잘 듣는 귀를 리더의 조건 중 하나라고 한다. 리더 뿐이겠는가? 이는 건강한 신앙, 건강한 관계의 필수다. 주님께 귀(貴)하게 대접받으려면 귀(耳)를 기울여야 한다. 사람도 귀를 기울여 잘 들어주는 사람을 귀하게 여긴다. 겸손하게 내려놓고 귀를 기울인다고 해서 내가 기울어지는 것은 아니다. 주님을 높이고, 다른 사람을 높여주는 것이 더불어 높아지는 비결이다. 세상은 말 잘하는 입담의 달인보다 귀를 기울여 잘 듣는 경청의 달인이 이끌어간다.
매순간 우리는 거울을 보고 자신의 흐트러짐을 바로 잡는다. 그러나 거울은 우리의 겉모습만 비춰줄 뿐이다. 말씀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러니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자신을 강건하게 하는 길이 될 것이다. 귀가 막힌 사람을 보면 기가 막힌다. 말이 많은 사람이 되기보다 ‘말이 통하는 사람이 되자. 말이 통하면 ‘서로의 차이’가 ‘멋진 하모니’를 만든다. 무지개는 각기 다른 색들의 어울림이다. 잘 들음이 무지개 같은 삶, 무지개 같은 가정, 무지개 같은 교회를 만드는 조건이다. ‘많이 아는 사람’보다 ‘많이 알려고 하는 사람’이 성공한다. ‘좋은 입’보다 ‘좋은 귀’가 중요한다. 현대를 단절의 시대라고 한다. 말은 많은데 대화는 적고, 말하는 사람은 많은데 듣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들을 줄 모르면 감격할 줄도 모른다. ‘듣는 귀’가 없으면 축복도 없다. 영혼의 무서운 저주는 ‘들음’이 없는 것이다. 귀가 열리면 영혼이 열리고 범사가 열리게 된다. 이런 복이 저와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 그리고 우리 교회에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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