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어주소서! ‘귀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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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142회 작성일 21-08-02 08:08본문
열어주소서! ‘귀Ⅱ’
행10:23~33
2021. 8/1. 11:00
들음의 중요성
예로부터 귀를 보이는 세계 너머에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로 향하는 ‘다리’로 생각했다. 듣는 것이 그만큼 신비롭고 중요하다는 뜻이다. 맛있는 음식 이야기를 들으면 침샘이 열리고, 슬픈 이야기를 들으면 눈물이 나고, 무서운 이야기를 들으면 심장이 쫄깃해진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사람의 귀 구조는 외이(外耳)와 중이(中耳), 그리고 내이(內耳)로 되어 있다. 어떤 분은 귀가 이렇게 세 부분으로 된 것은 말을 들을 때 귀가 세 개인 것처럼 들어야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①말하는 것을 ‘귀담아’ 듣고(집중), ②무슨 말을 하는지를 ‘신중히’ 가려듣고(분별), ③말하고자 하나 차마 말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아차리며’ 들어야한다는 것이다(공감과 배려). 사실 듣는 사람보다 말하는 사람이 훨씬 많은 세상에서 차분히 귀를 기울여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른다. 상대방이 말하는 것을 귀담아 듣고,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신중히 가려듣고, 차마 말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아차리는 자세야말로 잘 듣는 자세라 할 수 있다.
인생은 듣기부터 시작한다. 태아(胎兒)에게 청각기관은 오감 중 가장 빨리 발달하는 기관이고, 청각의 발달이 뇌 발달에도 영향을 준다고 한다. 임신 4개월이면 소리를 듣기 시작하여 소리에 반응하고, 5개월이면 소리 전달기관이 점점 완성되어 엄마의 목소리를 인식하고, 6개월이면 엄마 목소리와 다른 소리를 구분하고, 7개월이면 서로 다른 소리를 구분하고, 8개월이면 소리의 크기를 알고, 9개월이면 소리에 대한 감정을 안다고 한다. 태교(胎敎)는 이런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그리고 배움도 듣기부터 시작되고, 사람의 성숙도 듣기로부터 완성된다. 잘 듣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다. 한자 성인 ‘성’(聖)자를 보면 이것이 더욱 분명해 진다. 聖(성)은 귀(耳)를 크게 열고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대답하는 입(口)을 가진 사람의 옆모습을 본떠 만든 글자다. 말을 잘하는 사람보다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 그것을 으뜸으로 여기는 사람이 성인이라는 뜻이다.
신앙도 듣기부터 시작된다(롬10:17). 성숙한 성도란 위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옆으로는 사람을 포함한 주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이 들음이 그 사람을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들음은 단순히 듣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행동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듣다.’는 말은 ‘순종하다.’는 말의 관용적 표현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히브리어 경우는 ‘듣다’와 ‘순종하다’가 같은 단어다(삼상15:22). 아무튼 부모의 말을 잘 들으면 효자가 되고, 아내의 말을 잘 들으면 좋은 남편이 되고, 남편의 말을 잘 들으면 좋은 아내가 된다. 백성의 말을 잘 들으면 훌륭한 지도자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영적으로 민감하고 영성이 깊은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 아무튼 잘 듣는 열린 귀가 중요하다.
들음의 자세
심리학에 따르면, ‘사실보다 중요한 것이 태도’라고 말한다. 동일한 사건이나 사실이 어떤 사람에게는 심각한 장애물로 작용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겐 더 높이 뛰어오를 수 있는 디딤돌이 되기도 한다. 이런 차이는 사건(사실)을 대하는 태도 때문이다. 듣는 것도 마찬가지다. 태도가 들음을 결정짓는다. 본문에 나온 가이사랴에 주둔한 로마군대의 백부장 ‘고넬료’가 좋은 모범이다.
행10장은 교회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사건이다. 성경에 인상적인 성령강림사건이 두 번 기록되어 있다. 행2장과 10장이 그것이다. 2장의 성령강림이 유대인을 중심으로 일어난 것(마가의 다락방)이라면 10장은 이방인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그것도 당시 로마제국의 고넬료라는 장교가정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행15장에서 이방인 선교문제로 예루살렘에서 최초 종교회의가 열렸는데, 이 사건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래서 이 사건은 선교의 지평을 유대인 중심에서 이방인으로 활짝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이 중요한 사건이 고넬료라는 한 사람의 잘 ‘들음’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니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가 있다. 그러면 고넬료가 어떤 자세로 들었기에 이런 놀라운 복을 받은 것일까?
1. 준비하고 기다림
고넬료는 이방인이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한 사람이었다. 당시 유대교에선 경건의 척도로 두 가지를 꼽았다. 그것은 기도와 구제다. 고넬료의 경건생활은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22)과 하나님께 인정(4)을 받을 만큼 탁월했다. 이런 그가 기도 중에 욥바 시몬의 집에 머물고 있는 사도 베드로를 청하여 그에게 말씀을 들으라는 천사의 지시를 받았다(5). 그는 하인 두 명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한 명에게 기도시간에 일어난 일을 자세하게 알려주며 욥바로 보내어 베드로를 모셔오도록 했다(7~8). 그리고 그는 베드로를 영접하여 말씀을 듣기위한 준비를 하고 기다렸다.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24).
이 한 구절이 말씀을 듣기위한 고넬료의 태도를 압축해서 잘 보여준다. 그는 베드로가 도착하기 전에 친척과 친구들을 모아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 고넬료 자신의 준비와 기다림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런 준비와 기다림은 사모하는 마음의 표현이다. 사모함이 없이는 준비와 기다림도 없다. 말씀을 듣는 가장 중요하고 아름다운 자세는 ‘사모하는’ 마음으로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모든 이치가 그렇다. 사모하면서 준비하고 기다린 만큼 깨닫게 되고, 알게 되고, 보게 되고, 들을 수 있다.
2. 발 앞에 엎드림
고넬료는 친척과 친구들을 모아놓고 기다리고 있다가 베드로가 오자 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려 절을 하며 맞이했다.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25). 베드로를 맞이하는 그의 태도다. 마치 자신이 섬기는 사령관이나 황제를 맞이하듯, 더 나아가 신을 맞이하듯 베드로를 맞이했다. ‘발 앞에 엎드리어 절을 했다.’는 말이 이를 증거한다. 이는 발에 입을 맞추다는 뜻으로, 신이나 신적인 존재로 여겼던 사람에게 보이는 태도이다.
이런 고넬료의 태도에 깜짝 놀란 사람은 오히려 베드로였다. 베드로는 깜짝 놀라 그를 일으켜 세우며 외쳤다.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26). 그가 베드로를 하나님처럼 맞이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 들려줄 베드로에 대한 공경의 표시고, 또한 말씀에 대한 그의 태도를 보여준 것이다. 얼마나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사모했으면 그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온 사람을 하나님처럼 받들었겠는가!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 대한 태도가 이 정도라면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또 하나의 중요하고 아름다운 자세다. 말하는 사람에 대한 신뢰와 존중 없이는 경청도 없다.
3. 하나님 앞에 있음
이렇게 영접을 받은 베드로는 안으로 들어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물었고(29), 고넬료는 기도시간에 자신에게 있었던, 베드로를 청하여 들으라는 영적 체험을 소개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멋진 환영사를 했다.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33).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는 고넬료의 말은 참으로 놀라운 고백이다. 베드로가 전할 모든 말이 주님께서 ‘명하신 말씀’이라는 것이고, 말씀을 듣는 자리가 곧 ‘하나님 앞’이라는 뜻이다. 지금부터 베드로가 전할 말씀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처럼 듣겠다는 뜻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전하고 있는 사람 앞에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이고, 그가 전한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고백이고, 자세인가? 그러니 그 자리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44). 지금 우리가 예배하는 이 자리가 사람 앞이 아니라 하나님 앞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기도하는 그 자리가 하나님 앞이고, 찬양하는 그 자리가 하나님 앞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잘 듣는 것이 복이다.
어떤 분이 보내준 그림이다. 찾아보았더니 월리엄 A. 부그로가 그린 <천사들의 노래>란 성화였다.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잠들어 있는 성모 마리아와 그녀의 품에서 예수님도 잠들어 있다. 그리고 세 천사가 잠든 두 분을 위해 찬양을 하고 있는 무척 평화로운 모습이다. 그런데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다. 이 금림을 소개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아기 예수님의 ‘귀’다. 마리아와 세 천사의 귀는 가려져 보이지 않는데, 유독 예수님의 귀만 두드러지게 묘사되어 있다. 마리아는 귀가 숄로 가려져있고, 천사들도 귀가 머리카락으로 가려져있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이렇게 그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이 그림을 보고 예수님은 들을 귀를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라 생각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실 뿐 아니라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시라는 뜻이다. 사실 이 그림과 상관없이 주님은 항상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하셨고, 우리의 간구에 귀를 닫지 않으셨다. 우리에게도 주님처럼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하고 이웃의 소리에 민감한 이런 들을 귀가 있었으면 좋겠다.
‘나쁜 일은 천리까지 퍼져나가지만 좋은 일은 문밖으로 나가지 못한다.’(惡事傳千里, 好事不出門)는 말이 있다. 나쁜 일에는 사람들이 귀를 잘 기울이고, 또한 나쁜 일은 말하기를 좋아해서 순식간에 멀리까지 퍼져가지만 좋은 일은 잘 듣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기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는다는 뜻이 아닌가 싶다. 모쪼록 우리 모두는 주님께서 하신 일과 주님의 말씀, 곧 이 복된 말씀을 잘 듣는 복된 귀를 갖자. 그리고 이런 복된 귀는 고넬료가 보여준 것처럼 사모하는 마음으로 준비하며 기다리는 태도, 말하는 당사자를 존중하는 태도,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태도를 갖는 것이다. 주님은 이런 우리에게 ‘들음의 은혜와 복을 주신다. 특히 고넬료처럼, 그리고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바디매오처럼 들음의 복을 받는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잘 듣는 것이 복이고, 잘 들으면 복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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