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어주소서! ‘눈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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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25,189회 작성일 21-07-19 10:47본문
열어주소서! ‘눈Ⅻ’
막7:31~37
2021. 7/18. 11:00
마음이 닫히면 인생도 닫힌다.
토니 캄폴로(Tony Campolo)라는 목사 이야기다. 하와이로 휴가여행을 갔을 때 일이다. 한 밤중에 하와이에 도착했는데, 시차로 잠도 오지 않고 배가 고파 새벽 2시경에 해변을 걷다가 유일하게 그 시각에 문이 열려있는 한 식당에 들어갔다. 지저분하고 분위기도 그렇고 그런 식당이었다. 간단한 음식과 커피를 주문하여 식사를 하고 있는데, 7~8명의 여성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더니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갑자기 ‘야, 내일이 내 생일이다. 벌써 서른아홉 살이나 먹었다.’고 했다. 그러자 당장 다른 사람들이 구박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네 생일을 축하라도 해주고, 케이크라도 사달란 말이냐. 네 신세에 무슨 생일타령이냐!’ 이 말에 이 사람이 울부짖었다. ‘내가 언제 너희에게 생일파티 해달라고 그랬냐. 내일이 내 생일이란 말도 못하냐. 너희들 왜 나를 무시하냐!’ 그러면서 이들 사이엔 욕설이 오가고 싸움판이 벌어졌다. 한순간에 분위기가 함악해졌다. 참으로 황당한 일이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그는, 그냥 ‘축하해!’ 한 마디면 될 상황이 무엇 때문에 싸움으로 번졌을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결론은 단순했다. ‘생일 축하한다.’는 단순한 말 한 마디도 하기 어려울 만큼 그들의 마음이 ‘닫혀’있었기 때문이다. 시끌벅적하게 저녁마다 함께 어울려 다니긴 해도 서로에게 마음이 꽉 닫혀 있었던 것이다. 마음이 닫혀버리면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들을 수도 없다. 다른 사람의 불행도, 기쁨도, 고통도, 즐거움도 볼 수가 없다. 보지 못하니까 공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축하한다는 그 흔한 말도 못하고, 이와 같은 황당한 일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자! ‘축하한다.’ ‘축복한다.’ ‘감사하다.’ ‘고맙다’ ‘사랑한다.’는 말을 얼마나 자주 하고 있는지, 언제 했는지..... 지금 우리 사회는 여러 면에서 열린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 열린사회의 한 구석에서 여전히 마음을 열지 못하고 외롭고 답답한 인생을 사는 닫힌 마음, 닫힌 인생이 많다. 우리 중에도 이런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사람이 있다면 오늘 이 예배를 통해 열리는 복과 열리는 은혜가 임하기를 바라고, 이미 열린 사람은 열어주는 삶을 결단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열어주신 주님
본문에 귀먹고 말이 어눌하고 마음이 닫힌 사람이 나온다. 그런데 다행스러웠던 것은 이런 그가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통해 열린 인생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이점에 있어선 우리도 마찬가지다. 34절에 보면, 주님께서는 이 사람을 보시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사용된 ‘탄식’이란 단어는 단지 동정에서 비롯된 단순한 탄식이 아니라 ‘깊은 탄식’(A deep sigh)이라는 뜻이다. 고통 받는 존재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공감(共感)어린 탄식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주님께서는 이 사람의 고통을 온 몸으로 함께 느끼고 계셨다는 뜻이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주님은 바로 이런 분이시다. 내가 주님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주님은 나의 아픔도 걱정도 염려도 탄식도 기쁨도 기대도 소망도 다 아시기 때문이다. 다른 부분에서는 주님께서 고통 받는 사람을 보실 때 ‘불쌍히 여기셨다.’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막1:41, 6:34). 여기서 ‘불쌍히 여기다.’는 영어로 ‘moved with compassion’이다. ‘연민으로 그의 마음이 들끓다.’는 뜻이다. ‘compassion(공감)=com(함께)+passion(고통)’ 두 글자의 합성어다. 그러니까 함께 고통을 받는 것이 공감이란 뜻이다. 주님은 그의 외로움을 자신의 외로움처럼, 그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그의 답답함을 자신의 답답함처럼 느끼셨다는 뜻이다. 이것이 어려운 이웃을 대하신 주님의 마음이고, 어려운 이웃을 보시는 주님의 눈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주님의 마음과 눈이 어려운 이웃을 향해 항상 활짝 열려있었다는 뜻이다.
본문에 나온 이 사람을 보라! ‘귀먹고 말더듬는 사람’이었다. 잘 듣고 유창하게 말을 잘 해도 살아내기 힘든 세상이다. 그런데 이런 이중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힘든 세월이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더욱 안타깝고 불행한 것은 이렇게 육체적으로 힘들면 자연히 마음도 닫히게 된다. 사람은 몸과 마음이 항상 함께 가기 때문이다.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이 무기력해 진다. 몸이 힘들면 마음도 힘들게 되고,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아프게 된다.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도 닫히게 된다. 이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주님은 이 사람의 육체적 장애를 치료하기에 앞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다. 먼저 공감어린 깊은 탄식을 하신 것이다. 그동안 이 사람이 겪은 깊은 마음의 상처와 아픔, 답답함을 진심으로 공감하신 것이다. 그래서 먼저 마음을 치유하여 닫힌 마음을 열게 하신 것이다. 마음이 열려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열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열린다. 나아가 자신의 문제를 치료하시는 주님을 향한 눈도 열리게 되는 것이다. 주님을 똑바로 볼 수 있도록 눈이 열려야 회복의 은혜가 임하게 된다. 즉, 샬롬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열어주는 사람
본문의 귀먹고 말더듬는 사람은 이 시대의 영적 상태, 혹은 우리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우리 사회가 열린사회를 지향해도 여전히 닫힌 마음으로 닫힌 인생을 사는 사람이 많다. 영적으로는 더욱 그렇다. 이런 것을 질병학에서는 ‘자폐증’(自閉症)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자폐증 환자가 많다는 것이다. 자폐증이 무엇인가? 자기를 닫고 사는 것이다. 이웃과 거의 눈 맞춤을 하지 못한 사람이다. 말을 걸어도 반응이 없고, 얼굴에 감정표현이 보이지 않는다. 자기가 관심을 갖는 일 외에는 전혀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즉, 자기의 세계에 갇혀 사는 사람이다. 영적으로도 이런 심각한 영적 자폐증 환자가 많다. 주님께서 이 땅에 사시며 이런 사람의 마음을 열어주고, 눈을 열어주고, 귀를 열어주고, 말문을 열어주셨다. 본문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고, 이런 주님의 삶을 요약한 단어가 ‘에바다!’이다. 주님은 ‘열어주시는’ 분이다. 특히 죄와 질병으로 닫힌 우리 인생, 닫힌 우리의 삶,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셨다. 우리의 눈, 우리의 귀, 우리의 입을 열어주셨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주신 분이 주님이시다. 은혜의 문, 치료와 회복의 문, 축복의 문을 열어주시는 분이 주님이시다. 우리 또한 이런 삶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 우선 우리의 마음이 열리고, 눈이 열리는 것이 중요하지만 주님처럼 열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열한 번에 거쳐 ‘눈을 열어주소서’ 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열 번은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가치(믿음의 눈을 비롯하여 천국의 가치, 섬김, 가정, 잃어버린 영혼, 예배, 말씀, 찬양, 사명, 감사)에 대한 것이었고, 마지막은 이 모든 가치를 참된 가치로 알아볼 수는 선한 눈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시간에는 이런 가치에 눈이 열린 사람으로서 주변의 다른 사람도 이런 가치에 눈이 열리도록 ‘열어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 비결은 본문에서 주님이 보여주신 것처럼 공감어린 눈과 마음을 갖는 것이다. 공감어린 태도를 갖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닫힌 문이 아니라 열린 문이 되어야 한다. 우리게 오면 막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열리게 해주어야 한다. 우리를 만나면 답답해지는 것이 아니라 시원해 져야 한다. 누구든 우리를 만나면 보는 눈이 열리고, 깨닫는 마음이 열리고, 듣는 귀가 열리고, 하는 일이 열리고, 인생이 열려야 한다. 무엇보다도 영적인 세계가 열리고, 신앙생활이 열려야 한다. 이렇게 열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축제다.
나는 설교를 토니 캄폴로 목사 이야기로 시작했다. 그 후 이야기를 마저 소개하겠다. 식당주인의 만류로 여인들의 소란이 끝나고 이들이 자리를 뜬 다음, 그는 식당주인에게 그들이 자주 오냐고 물었고, 매일 이 시각에 오는 단골이긴 하나 골치 아픈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는 식당주인에게 자신이 내일 새벽에 생일을 맞은 그 여인의 생일잔치를 준비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식당주인 아내가 내일 생일인 여인의 이름은 아그네스이고, 마음은 착한데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하며 좋은 아이디어라고 동의했다. 그래서 다음 날 새벽에 이 식당에서 아그네스의 생일잔치가 열렸다. 식당주인 아내가 미리 몇몇에게 이 소식을 알려 거리 여인들이 식당을 빼곡히 채운 가운데 아그네스가 들어왔고, 그녀가 들어서자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며 환영했다. 그러자 뜻하지 않는 축하에 아그네스는 식당입구에 서서 엉엉 울었다. 축하노래를 부른 다른 사람들도 함께 울었다.
이제 케이크를 자르라고 재촉하자 아그네스는 이 케이크를 집에 가지고 가서 얼마동안 간직하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그러자 모두들 그 마음을 이해하고 흔쾌히 허락했다. 그녀는 케이크를 집에 갖다놓고 곧 돌아오겠다면서 무슨 거룩한 성물인양 케이크를 가지고 식당을 나섰다. 그녀의 모습을 사람들은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식당은 갑자기 깊은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그 순간 캄폴로 목사는 일어서서 제안을 했다. ‘제가 아그네스와 여러분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모두들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날 밤 가장 교회 같지 않은 곳에서 가장 경건한 감동의 기도가 이뤄졌고, 사람들의 눈은 퉁퉁 부어올랐다. 캄폴로는 그날 거기서 상하고 닫힌 마음이 활짝 열리는 치유의 기적을 보았고, 이 엉성한 식당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보았다고 고백했다. 이것이 성도의 사명, 교회의 사명이고, 예배의 현장에서 반드시 경험되어져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한권의 책을 썼는데, 그 제목은 이렇다. 「하나님의 나라는 파티입니다.」 그렇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하는 축제에 참여하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주님과 함께 하는 축제의 연속이다. 우리가 마음 문을 여는 순간 이 축제는 시작된다. 우리의 사명은 이 축제를 볼 수 있도록 사람들의 눈을 열리게 하고, 이 축제에 참여하도록 마음이 열리게 하는 일이다. 우리 모두 ‘에바다’의 사명을 잘 감당하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을 볼 수 있도록, 주님의 구원을 볼 수 있도록, 주님의 영광과 능력을 볼 수 있도록, 주님의 영광스러운 나라를 볼 수 있도록 ‘열어주는’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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