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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본받아, ‘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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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0,457회 작성일 18-06-10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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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본받아, ‘전도

1:35~39

2018. 6/10. 11:00

모범이 아니라 구세주

금세기 위대한 기독교 저술가이자 변증가였던 C.S. 루이스에 대한 일화다. 그가 캠브리지 채플에서 예수의 구주되심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했다. 설교가 끝난 뒤, 한 학생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교수님께서 예수는 본받아야 할 위대한 스승이라고 말했다면 우리 모두는 교수님에게 박수를 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는 예수는 구세주다는 케케묵은 기독교 교리를 이야기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이 말을 들은 루이스는 그 학생에게 이렇게 반문했다. ‘자네는 정말 예수가 완벽한 모델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럼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지요.라고 학생이 대답했다. ‘그러면 이 완벽한 모델이신 예수를 따라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믿는가?’ ‘그럼요.’ ‘그렇다면 자네에게 묻겠네. 자네는 완벽한 모델이신 예수를 자네가 완전히 따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학생은 한참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완전하게 따라갈 수는 없겠지요!’ ‘그것은 자네 스스로 도덕적 실패를 인정하는 셈인데, 그렇다면 자네의 삶속에서 실수가 있었고, 죄가 있었다는 사실은 인정하는가?’ ‘물론 인정합니다.그러자 루이스가 그 학생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자네에게 필요한 것은 도덕적인 모델로서의 예수가 아니네. 자네의 도덕적인 실패와 죄로부터 자네를 구원할 수 있는 구원자이신 예수가 먼저 필요하네. 죄인에게는 도덕적인 모델로서의 예수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죄 가운데서 구원해 주실 구원자로서의 예수가 필요하다네. 십자가에서 인류를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는 인생의 모범을 보여주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 보좌를 뒤로하고 이 땅에 오셔서 온갖 고난을 당하신 것일세. 그러므로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에 비로소 그분은 자네에게 도덕적인 모델이 될 수가 있다네.

 

이 이야기는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을 그저 역사상에 존재했던 훌륭한 위인정도로, 혹은 훌륭한 스승정도로 생각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도전이다. 사실 인간은 이 학생처럼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자신이 어떤 존재이고,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인간이기에 앞서 하나님이시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도덕적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여 영생을 선물로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도덕적인 모범이기 전에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신 구세주로서 반드시 믿어야 할 대상, 섬겨야 할 대상, 믿고 따라야 할 대상이시다. 하지만 주님은 동시에 참된 인간이셨다. 그래서 인간으로서의 삶 또한 완벽하셨기에 도덕적으로 모범이 되시는 분이시기도하다. 때문에 주님은 믿고 따라야 대상이시면서 또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신앙생활을 포함한 인생의 모범이시다. 오늘부터는 인생의 모범으로서 주님을 본받는’(遵主聖範) 생활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 이 시간에는 지금까지의 복음전도 설교와 연관하여 주님의 전도생활을 본받도록 살펴보기를 원한다.

 

펭귄효과(Penguin effect)

펭귄효과라는 말이 있다. 펭귄은 먹이를 구하기 위해 바닷물 속으로 뛰어들어야 하지만 천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선뜻 뛰어들지 못하고 망설인다. 그 때 한 마리가 물속으로 뛰어들면 다른 펭귄도 따라서 뛰어든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고장난 신호등 앞에서 건널까 말까를 망설이고 있는데, 어느 누군가 건너면 망설이고 있던 사람들도 따라서 건너간다. 물건을 살 때도 누군가 한 사람이 구매하면 덩달아 구매에 나선다. 여행을 가보면 확연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것을 펭귄효과’(Penguin effect)라고 한다. 여기서 가장 먼저 물에 뛰어드는 펭귄을 퍼스트 펭귄이라 부른다. 경제에서는 선두구매자라 부르고, 긍정적인 의미로 말하면 첫 도전으로 조직에 영향을 주는 사람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의미로는 일종의 바람잡이.

 

여기서 생각해 보고 싶은 점은 우리 인생이 이런 바람잡이와 같은 주변 환경이나 사람에 의해 자주 휘둘린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자의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삶에 대한 목적이 분명하지 못하거나 그 목적을 잊고 살기 때문이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 ‘남이 장에 가니 거름지고 따라간다.는 속담이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한 평생을 살고도 헛살았다고 한탄한다. 마치 여행을 다녀와서 여행 가방을 열어놓고 내게 필요한 것보다는 다른 사람이 사니까 따라서 샀다가 후회하는 것과 같은 격이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33년이라는 짧은 생애, 그것도 활동은 3년 밖에 하시지 않았지만 돌아가시면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 이루었다!”(19:30). 이는 승리의외침이고, ‘사명완수의외침이다. 이 외침에는 그리니 족하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뜻이다. 어떻게 그 짧은 생애를, 그것도 비참하게 십자가의 처형으로 마치면서 이렇게 말씀하실 수가 있었을까? 그것은 목적에 충실한 삶을 사셨기 때문이다

 

목적에 충실한 생애

앞에서 이미 말씀드렸지만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영혼구원이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한다는 의미를 가진 예수라는 주님의 이름부터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주님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첫 말씀이,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15)는 복음전파였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주님 오른 편에 달린 강도가 구원을 요청했을 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23:43)고 다정하게 받아주셨다. 이와 같이 주님의 생애는 복음전도로 시작하여 복음전도로 마무리를 지었다. 주님은 복음전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매일의 양식으로 삼고 사셨다(4:34). 복음전도가 하나님의 뜻이고, 그 뜻을 이루는 복음전도가 주님의 양식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목적에 충실한 삶을 사셨기에 33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사셨으면서도 다 이루었다고 외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본문은 주님의 하루일과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목적에 충실한 삶을 가능하게 해준 비결에 대한 말씀이다. 주님은 아침 일찍 일어나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새벽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셨다(35). 주님에게 있어서 기도가 하루를 여는 열쇠였고, 하루를 살아가는 능력의 원천이었다. 목적에 충실한 삶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 기도였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주변 마을로 다니시며 복음을 전파하시며 귀신을 쫓아내주셨다(36,39). 복음전도와 복음전도를 위한 봉사가 주님의 주요일과였다. 여기서 주님은 복음전도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라고 분명히 강조하셨다,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38b). 그리고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 주님의 계획이나 일정이 좌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37,38a, 11:3,6). 주님은 사람에게 끌려 다니지 않고 사람이 따라 다니도록 했다. 목적과 계획이 분명하지 못한 사람은 평생 일에 끌려 다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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