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으로 물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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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0,481회 작성일 18-04-22 13:01본문
복음으로 물든 사람
행20:22~24
2018. 4/22. 11:00
인생을 결정짓는 네 개의 전치사
신학자 프리드리히 고가르텐(F. Gogarten)은 인생은 네 개의 전치사가 결정한다고 했다. ‘by, for, of, with’가 그것이다. 우선 ‘by’는 무엇에 ‘의해’ 사느냐는 것이다. 삶의 방법에 대한 문제다. ‘for’는 무엇을, 혹은 누구를 ‘위해’ 사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삶의 목적과 방향에 대한 문제다. 그리고 ‘of’는 누구에 ‘의한’ 삶이냐는 것이다. 삶의 소속감(누구에게 속한 삶이냐?)과 함께 삶의 주도권(삶의 주인이 누구냐?)에 대한 문제다. 인간은 도구와 같다. 누구의 손에 들려 있느냐가 도구의 가치를 결정한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끝으로 ‘with’는 누구와 ‘함께’ 하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만남과 관계에 대한 문제다.
삶의 방법(by), 삶의 목적과 방향(for), 삶의 소속감과 주도권(of), 그리고 삶에 있어서 만남과 관계(with)를 뜻하는 이 네 가지 전치사에 의해 인생의 질과 의미와 가치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사실 여기서 열거한 요소는 소위 말하는 성공적인 인생을 위한 중요한 것들이다. 신앙위인 중에서 가장 모델이 되는 인생을 살았던 사도 바울을 보면 이 네 가지 요소가 그의 삶에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자주 언급했다. 이것은 단순히 자신을 낮춰서 말하는 겸양의 표현이 아니다. 실제로 그는 주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종이었다. 그는 주님이 가라하면 가고, 서라하면 섰다. 주님이 죽으라하면 죽을 것도 각오했던 사람이다. 주님이 주인이고, 자신은 주인 되신 주님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는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님 안에서(ἐν Χριστός) 주님과 함께 살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주님의 복음을 위해 헌신했다. 그랬더니 만고(萬古)에 빛나는 인생이 되었다. 사실 바울의 이름 앞에는 많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위대한 신학자’, ‘위대한 선교사’, ‘위대한 목회자’, ‘위대한 사도’, ‘열정적인 복음전도자’......이 중에서 어느 하나도 그의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 없다. 주님을 주인 삼아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거룩한 삶의 방법과 삶의 목적(방향)을 가지고 살았기에 이런 빛나는 인생이 된 것이다.
붙잡힌 인생
본문은 바울이 세 번째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인데, 여기서 바울은 ‘성령에 매어 예루살렘으로 간다.’(22)고 고백하고 있다. 바울처럼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에 매어서 살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일에 매어 살고, 어떤 사람은 자식에 매어 살고, 어떤 사람은 사상이나 이념에 매어 살고, 어떤 사람은 질병에 매여 살고, 어떤 사람은 나쁜 습관에 매어 살기도 한다. 성경에 나온 거라사 지방의 광인처럼 악한 영에 매어 사는 사람도 있다. 요즈음 우리나라 대학생 10명 중 9명이 ‘스펙’ 강박증, 10~20대 여성 90%가 ‘성형 및 외모’ 강박증, 직장인의 70% 이상이 ‘자기계발’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통계자료를 보았다. 포털 사이트에 다양한 강박증 관련 질문이 넘치고 있다. 강박증이 우리 사회에 넓게 퍼져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강박증이란 일종의 심리적인 매임을 뜻한다. 오늘날 우리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심리적인 속박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수준이다. 아무튼 무언가에 매여 있고, 붙잡혀 있는 존재, 이것이 인간의 실존이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사단에게 매어 죄의 종으로 살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인간의 모든 불행이 초래되었다고 단언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것이 죽음과 그 이후에 따르는 심판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히9:27). 죽는 것도 비참한 일인데, 죽은 후에 심판이 있다니 참으로 두렵고 끔찍한 일이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다. 주님께서 오셔서 사단에게 매어 죄의 종노릇하는 인생을 해방시켜주셨다. 이 사실을 믿고 주님을 영접하면 이 효력을 누리게 된다. 죽음을 넘어 영생을 얻게 되고 심판에 이르지 않게 된다(요3:16, 5:24). 그래서 지지난 주일에 주님이 최고의 선물이고, 주님을 전하는 복음전도가 최고의 선물을 소개하는 일이라고 한 것이다.
복음의 마이다스 손
사도행전 후반부를 보면 한 가지 기막힌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울이 ‘복음의’ 마이다스 손과 같다는 사실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온 마이다스 왕은 그가 손으로 만진 것마다 황금으로 변했다. 마찬가지로 바울이 만난 사람은 성도가 되고, 그가 머문 곳은 교회가 되었다. 사도행전은 이와 같은 영향력을 드러내고 있는 바울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 역동의 현장을 행27장과 28장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어떻게 이런 삶이 가능했던 것일까? 그것은 바울이 주님으로 물들고, 주님의 복음으로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든 사람 곁에 있으면 물이 들게 되어 있다. 그래서 옛말에, ‘근주자적(近朱者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고 했다. 붉은 색을 가까이 하면 붉어지고, 검정 색을 가까이 하면 검어진다는 뜻이다. 흔한 말로 향을 싼 종이에서는 향내가 나고, 생선을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난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앞서 말한 대로 바울이 주님으로 물들고, 주님의 복음으로 물들어 있었기에 만나는 사람도 바울을 통해 주님으로 물들고, 주님의 복음으로 물이 들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복음의 역사를 일으키고,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으로 물을 들인 것이다.
복음을 위한 일사각오
바울이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다. 바울 역시 한 때는 유대종교에 매인 종교 하수인이었고, 유대교 율법에 매인 율법의 종이었다. 그래서 주님의 몸인 교회와 성도를 핍박하는데 앞잡이가 되어 주님의 원수, 복음의 원수였다. 그를 만난 사람은 죽음의 공포에 떨었고, 가는 곳마다 죽음의 냄새를 퍼뜨렸다. 그런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께 붙잡혔다. 이렇게 주님께 붙잡힌 그의 인생이 주님께 물들고, 주님의 복음으로 물이 들어 복음전도에 헌신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가 만난 사람은 성도가 되고, 그가 머문 곳은 교회가 되었다. 그야말로 사망의 냄새를 퍼뜨리던 사람이 생명의 향기를 퍼뜨리는 주님의 향기가 되었다.
본문은 바울이 주님께 붙잡힌 자기 인생에 대한 감동적인 고백이다. 지금 바울은 예루살렘을 거쳐(구제금 전달 때문) 로마로 가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다. 그래서 그 동안 전도지를 돌아보면서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데, 각 곳에서 성령이 말씀하시기를 이번 예루살렘 길이 결박과 환난의 길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를 만류하는 사람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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