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가 우선순위였던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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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0,448회 작성일 18-05-20 13:35본문
전도가 우선순위였던 부부
롬16:3~5
2018. 5/20. 11:00
왜 성경에는 실패 이야기가 많을까?
5월이 되면 안타깝고 유감스러운 것이 하나가 있다. 그것은 가정의 달이니 오늘날 우리에게 모범이 될 만한 건강하고 이상적인 가정, 경건한 부부의 모습을 성경에서 찾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아담의 가정에서부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가정, 이삭의 가정도 건강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기원이 되고 있는 야곱의 가정은 말 그대로 완전히 콩가루 가정이었다. 쭉 후대로 내려와 사사시대를 거쳐 다윗과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왕정시대에도 형편이 나아지지 않았다. 특히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상적인 왕으로 칭송을 받는 다윗의 가정 역시 왕위를 놓고 자녀들 간의 피비린내 나는 다툼이 있었다. 조선왕조 초기 태조 이성계 자녀들이 왕권을 놓고 두 번에 걸쳐 일으킨 왕자의 난을 방불케 한다. 신약시대에도 모범이 될 만한 가정이 없다. 그것은 부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왜 그럴까?’ 하고 나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왜 건강하고 이상적인 가정 이야기보다 문제가 많은 실패한 가정 이야기가 많을까? 우선은 우리로 하여금 이런 실패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성경은 성공 이야기보다 실패 이야기를 더 많이 소개하고 있다. 특히 구약의 주요 내용을 이루고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 자체가 불순종으로 인한 실패의 역사다. 이 점을 특히 강조하고 있는 책이 열왕기서다(사사기나 사무엘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실패 이야기는 지금 잘 된다고, 안전하다고 방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한순간에 실패의 심연으로 떨어질 수 있으니 늘 깨어있으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부족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은혜 주시면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라 생각한다. 정말 형편없던 야곱의 가정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니까 결국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니 이런 실패 이야기는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하심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한다. 그리고 끝으로 밖에서 모델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스스로 모델이 되라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별난 가정, 별난 부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 사는 것은 성경시대나 지금이나 성경 속의 인물이나 우리나 서로 비슷비슷하다. 하지만 은혜를 받으면 탁월해진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러니 은혜를 받아 모델이 되는 탁월한 가정을 세우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모델이 될 만한 가정대신 건강하고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을 여러 곳에서 소개하고 있다. 이런 말씀을 기초로 하여 스스로 건강하고 이상적인 가정을 세우라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모델이 되라는 것이다. 부부도 마찬가지다.
뜻밖의 부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그런데 본문은 성경에서 흔치 않는 부부를 소개하고 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인데, 이들은 우리가 모델로 삼아도 좋을 탁월한 가정이었고, 부부였다. 이들 부부에 대해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에서 단편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를 종합해 보면, 남편 아굴라는 본도 출신의 유대인이고, 아내 브리스길라는 (로마귀족 출신)로마인이다. 로마에 거주하면서 기독교인이 되었고, 클라우디오 황제가 로마에 거주하는 모든 유대인을 추방했을 때(주후 49년 ‘나사렛 칙령’) 고린도로 이주하였다. 고린도에서 사도 바울을 만났는데, 같은 일(장막 만드는 일) 때문이었다(행18:1~4). 이때부터 바울을 도와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였고(행18:11), 바울이 에베소로 갔을 때도 동행하여 바울을 도왔다(18). 이들은 바울 사역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람이다. 부부가 나란히 주님을 믿으면서 가는 곳마다 복음을 위해, 교회를 위해, 특히 당대 최고의 복음 사역자 바울을 위해 헌신했다. 이 시간에는 이들 부부의 복음을 위한 아름다운 헌신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복음의 사역자를 후원하고 세우는 사람
우선 이들은 바울을 도와 고린도와 에베소 선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바울이 사역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거처를 제공하며 후원하였다고 한다. 본문에서 바울이 이들을 매우 감동적이고 인상적으로 소개한 이유가 이 때문이다.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4). 한 마디로 목숨을 걸고 자신을 섬겼던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바울이 탁월하게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헌신적인 동역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이 이렇게 목숨을 내놓고 바울을 섬겼던 것은 이들 역시 바울처럼 복음전도가 삶의 우선순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을 섬기고 돕는 것을 복음전도를 위한 중요한 사역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부부의 인생이 배후자에 의해 결정되듯이 주의 사역은 동역자에 의해 결정된다. 목회자가 부족해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같은 좋은 동역자가 곁에 있으면 탁월하게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아브라함과 롯, 요아스와 여호야다, 마가와 바나바). 여러분이 나에게 이런 좋은 동역자가 되어주기 바란다. 이것이 곧 주님을 위하고, 주님의 복음을 위한 일이다.
게다가 이들 부부는 복음 사역자를 세우는 일까지 했다. 행18:24 이하를 보면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성경지식이 출중한데다가 언변이 좋고, 전도에 대한 열정도 대단한 사람이 소개되고 있다. 아볼로다. 그는 일종의 순회 설교자였다. 유대회당을 중심으로 설교를 하며 에베소까지 오게 되었다. 어느 날 이들 부부가 회당예배에 참여했다가 그의 설교를 들었다. 그의 설교는 논리적이고 감동적이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복음이 결여된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이들은 아볼로를 모셔다가 복음을 소개하여 복음 전도자로 거듭나게 했다. 일개 천막쟁이 부부가 학문적으로 뛰어난 아볼로의 영적 스승이 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값진 일, 가장 값진 투자가 무엇인지 아는가? 사람이다. 사람을 키우고, 사람을 세우는 일이다. 특히 주님의 일꾼으로 세우는 일이다. 한 사람을 잘 키우고, 세워놓으면 일당 백, 일당 천을 감당하게 된다. 사람을 키우고 세우는 일이 전도이고, 또한 교육이다. 이런 점에 교회학교교사가 정말 중요하다. 그래서 교사로 섬기고 있는 여러분에게 당부한다. 교사는 사람을 키우고 세우는 사람이다. 주님의 일꾼을 키우고 세우는 소중한 일이 교사의 직분이다. 이 일을 작게 여기지 않기를 바란다. 아이들 앞에서 본을 보이면서 잘 가르치고 새워주는 좋은 영적 스승이 되기를 바란다. 아울러 성도 여러분은 교사를 귀하게 여기며, 아낌없는 격려와 위로를 부탁드린다. 특히 전도사님과 간사님에게 많은 관심과 사랑을 보여주기 바란다. 이들은 우리 교회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같은 분들이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바울에게는 목숨까지 내놓고 헌신한 좋은 선교 동역자였고, 아볼로에게는 온전한 복음 전도자로 서도록 이끌어준 좋은 영적 스승이었다.
교회를 세운 사람
전에 바울을 이야기하면서 바울은 만나는 사람마다 성도가 되게 하고, 머문 곳마다 교회가 되게 한 사람이라고 한 적이 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역시 바울과 같은 사람이었다. 이들이 머문 곳마다 교회가 되었다. 바울과 함께 에베소 지역에 머물 때 그곳에 있는 이들의 집이 교회였다.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고전16:19). 여기서 이들의 집에 있는 교회가 에베소 교회의 모체가 되었는지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럴 개연성이 크다. 아무튼 이들이 에베소에 머물 때 집을 교회로 제공한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던 클라우디오 황제가 죽자(주후 54년), 유대인 추방령도 해지되어 이들은 다시 로마로 돌아갔다. 그런데 로마에서도 이들은 집을 개방하여 교회로 사용하였다. “또 저희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5a). 가는 곳마다 집을 개방하여 교회가 되게 하는, 교회를 세운 부부가 되었다. 이 역시 복음전도가 우선순위가 아니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주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자!
성도라면 누구나 주님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한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을 받는 비결은 의외로 간다하다. 그것은 주님이 좋아하시는 일, 주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일을 하면 된다. 성경을 보면 주님의 마음이 있고, 주님의 관심이 있고, 주님께서 항상 마음을 두시는 곳이 나온다. 바로 교회다. 주님의 눈과 귀와 마음이 항상 교회에 있다. 교회로 향해 있다. 요한계시록에 이것이 아주 실감나도록 표현되어 있다(계2:1). 교회는 주님의 몸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몸에 얼마나 관심이 많은가? 주님도 마찬가지시다. 찬송가(208장)의 고백처럼 교회는 주님께서 ‘피 흘려 사신’ 것이고, 주님께서 ‘눈동자 같이 아끼신’ 것이다. 이런 교회를 섬기고 사랑하고 세우는 사람을 주님이 사랑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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