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는 말이 아니라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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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0,550회 작성일 18-04-15 13:00본문
전도는 말이 아니라 삶이다.
마5:13~16
2018. 4/15. 11:00
요3:16 부인
어느 도시에 요3:16부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자선사업가가 있었다. 그 도시 고아원에 13세살쯤 되는 어린 소년이 있었는데, 독립하려고 무작정 고아원을 나와 추운 겨울 거리에서 신문을 팔았다. 그런데 신문은 안 팔리고, 배는 고프고, 날씨는 몹시 추워 도저히 견디기 어려웠다. 너무 힘든 소년은 순찰 중이던 경찰에게 도움을 청했다. 소년의 처지를 딱하게 생각한 경찰은 어떻게 도울까 생각을 하다가 손뼉을 쳤다. ‘얘야, 걱정할 것 없다. 요3:16부인 집에 가보렴. 여기서 멀지 않단다. 이 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왼쪽 골목이 나오거든 그리로 들어가거라. 그 골목의 세 번째 집이 요3:16부인 집이다. 누구냐고 묻거든 아무 소리 하지 말고 요3:16이라고 하면 반갑게 맞아줄 것이다.’ 소년은 경찰이 가르쳐 준대로 골목에 들어서서 세 번째 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하며 소리가 들렸다. 소년은 용기를 내어서 ‘요3:16’하고 암호를 대듯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문이 열렸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며 소년을 생각했다. ‘요3:16이 뭔지는 몰라도 닫힌 것을 열어주는 것과 관계가 있는 말인가 보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 부인이 소년을 반갑게 맞아주면서 벽난로에서 몸을 녹이라고 하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소년은 추위에 얼어붙은 손과 발을 녹이며 생각했다. ‘요3:16이 뭔지 모르지만 추운 사람을 따뜻하게 하는 것과 관계가 있을 거야.’ 잠시 후 부인이 내놓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소년은 또 생각했다. ‘요3:16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나처럼 배고픈 사람을 배부르게 하는 것과 관계있는 말일거야.’ 식사가 끝나고 나니까 2층에 목욕할 물이 준비되어 있으니 개운하게 목욕을 하라고 권했다. 소년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묵은 때를 씻어내면서 생각했다. ‘요3:16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나 같은 지저분한 사람을 깨끗하게 하는 것과 관계있는 말일거야.’ 기분 좋게 목욕을 마치고 나자 부인은 피곤할 테니 푹 자라며 하얀 침대보와 두툼한 이불이 말끔히 놓여있는 침실로 안내했다. 소년은 침대에 누우면서 잠들기 전에 마음속으로 이렇게 속삭였다. ‘요3:16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나처럼 피곤한 사람에게 안식을 주는 것과 관계가 있을 거야.’ 얼마나 잘 잤는지 모른다. 아침이 되었다. 아침식사가 준비되었으니 식사하라는 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식탁에 앉자 부인이 물었다. ‘얘야! 너 요3:16이 뭔지 아니?’ 소년은 대답했다. ‘글쎄요. 잘은 모르겠지만 요3:16은 닫힌 문을 열어주고, 추운 사람을 따뜻하게 해고, 배고픈 사람을 배부르게 하고, 지저분한 사람을 깨끗하게 해주고, 피곤한 사람에게 안식을 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런데 그것 말고도 한 가지가 더 있단다. 요3:16은 죄를 용서해주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 수 있도록 영원한 생명을 준단다.’ 그러면서 부인이 성경을 펴서 요3:16을 소년에게 읽어주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람들은 보고 싶어 한다.
사람들은 복음에 대한 말을 듣기보다 복음에 합당한 삶을 보고 싶어 한다. 우리가 말로 하는 것보다 삶(행동)으로 보여주기를 원한다. 오늘날 우리의 전도가 환영을 받지 못하고 결실을 맺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기를 원하는데 보여주지는 않고 듣고 싶지 않은 말만 하니까 외면을 한 것이다. 말은 가르치지만 행동은 감동을 준다. 좋은 글을 보면 머리가 끄덕여지지만 실천하는 사람을 보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따르게 된다. 주님의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이 좋은 본보기다. 주님의 성육신은 보여주는 하나님 사랑의 절정이고, 주님의 십자가는 보여주는 주님 사랑의 절정이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복음서 기자들은 주님이 누구신지, 어떤 분이신지를 말로 설명하지 않는다. 주님께서 행하신 일을 통해 그냥 주님의 삶과 사역을 보여주기만 한다. 주님께서 각종 병자를 고치시고,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시고, 세리나 창기와 같은 사람과 어울리시고, 바람과 파도를 꾸짖어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고,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5천 명을 먹이시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등 이렇게 주님의 삶과 사역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가 행하신 일을 보고 믿어라!’ 이런 점에서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다.’(마27:54)고 고백한 로마 백부장은 좋은 모델이다. 그리고 그들은 전도도 ‘와서 보라!’(요1:39,46)가 전부였다.
전도는 주님처럼 말보다 삶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감동할 때까지 묵묵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삶이 메시지가 되어야 한다. 슈바이처(A. Schweitzer)는 아프리카 오지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이유를 묻는 어떤 분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말로 사람을 감동시킬 재주가 없습니다. 그래서 행동으로 감동을 주려고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것을 전하고 싶은데 말로는 잘하지 못하니까 행동으로 표현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행동으로 표현했더니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더 큰 복을 주셨습니다. 건강을 주셨습니다. 평안을 주셨고, 행복을 주셨습니다.’ 물론 우리의 경건하고 아름다운 행동에 모두가 감동을 받고 주님을 믿겠다고 나서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삶으로 보이지 않으면 어떤 감동도 신앙적 동기부여도 없다.
소금처럼, 빛처럼
본문은 성도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교훈이다. 성도는 자신이 살고 곳에서 썩음을 방지하면서 맛을 내는 소금이고, 어두움을 밝히면서 따뜻하게 하는 빛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14) 라고 하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동사의 시제다. 소금(빛)이 될 것이라는 미래형도, 빛(소금)이 되라는 명령형도 아니다. 현재형이다. 지금 소금이고, 현재 빛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주님의 이 말씀이 당시 제자들의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시 제자들은 자기 앞 가름도 못하는 위인이었다. 이런 그들이 어떻게 세상을 위한 소금이고, 세상을 위한 빛일 수가 있겠는가? 그저 주님의 희망사항이지......그런데 주님은 현재형을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 중요한 주님의 의도가 있다. 이것은 일종의 선언으로서 제자들이 소금과 같은 삶, 빛과 같은 삶을 살아야할 당위성을 강조하신 것이다.
사실 소금과 같은, 빛과 같은 성도의 삶은 세상을 위한 마땅한 책임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신앙의 본질이다. 열매로 나무를 알듯이 살아 있는 믿음이라면 행위가 따르기 마련이다. 즉 삶으로 믿음의 진정성이 증명되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16).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섬긴다는 뜻이다. 결국 성도의 선한 행실이 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결정적인 통로(수단)가 된다는 뜻이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교회의 부흥과 관련하여 의미 있는 말씀이 나온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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