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름과 같은 사람, ‘수로보니게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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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172회 작성일 15-05-03 12:59본문
거름과 같은 사람, ‘수로보니게 여인’
막7:24~30
2015. 5/3. 08:00, 11:00(어린이 주일)
부모는 자식의 거름이다.
➠김진호의 〈가족사진〉(동영상). 노랫말이 좋아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노래다. 들을 때마다 뭉클한 감동을 받는다. 노랫말 중에 특히 감동과 공감이 되는 부분이다.
내 젊음 어느새 기울어 갈 때 쯤
그제야 보이는 당신의 날들이
가족사진 속에 미소 띤 젊은 우리엄마
꽃피던 시절은 나에게 다시 돌아와서
나를 꽃피우기 위해 거름이 되어버렸던
그을린 그 시간들을 내가 깨끗이 모아서
당신의 웃음꽃 피우길
자식에게 있어서 부모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해 보게 하는 노래다. 노랫말처럼 부모는 자식의 인생을 꽃 피우기 위해서 ‘거름이 되어준 존재‘다. 즉 부모는 자식의 거름이다. 자식이라는 나무가 곧고 튼튼하게 자라 아름다운 꽃과 튼실한 열매를 맺도록 해주는 거름이다. 이렇게 부모의 인생을 거름삼아 자녀의 인생이 꽃을 피우는 것이다. 이 시간 저는 본문을 통해 자녀를 위해 한 줌의 거름이 되어준 한 어머니를 소개하려고 한다.
자녀를 위해 거름이 된 어머니
이스라엘 땅은 두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이방인이 거주하는 지역과 유대인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두로와 시돈은 가나안 출신 이방인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유대인은 그들을 끔찍이 싫어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지역으로 가신 것이다. 정확하게는 그 접경지역으로 가신 것이다. 그 때 그 지역에 살고 있는 한 여인이 주님을 찾아와서 엎드렸다. 귀신에 들린 딸을 고쳐달라는 것이었다. 성경은 그녀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단지 ‘헬라인이고 수로보니게 족속’(26)이라고만 말씀하고 있다. 수로보니게(syrian-phoenicia)는 ‘수로와 보니게’를 합친 단어다. 수로는 ‘수리아’를 의미하고, 보니게는 ‘베니게’를 의미한다(전승에 의하면 이 여인의 이름은 유스타‘Justa’이고, 딸의 이름은 베레니케‘Berenice’라고 함). 주님께서 밀려드는 군중을 피하여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이곳까지 오셨는데, 이 여인이 주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온 것이다. 그래서 주님을 만날 기회를 얻었고, 딸의 병까지 치료를 받았다. 이 여인은 두 가지 면에서 딸을 위해 거름이 되었다.
기도의 거름
수로보니게 여인은 병든 딸을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다. 주님께 기도하여 딸의 병을 치료받았다. 그녀는 딸의 인생에 기도의 거름을 뿌린 것이다. 비록 그녀는 유대인이 혐오하는 이방인이지만 소문을 통해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 있었고, 그 주님이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오셨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녀는 그 소문을 듣고 곧 주님을 찾아와서 그 발아래 엎드려 딸을 고쳐달라고 간구했다. 여기에 ‘곧’이라는 시간부사가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그녀의 딸이 처한 위급한 상황과 주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기도를 연상하게 하는 ‘엎드리다’, ‘간구하다’는 단어의 시제가 모두 ‘현재형’이다. 현재형에는 진행의 의미가 있다. 그러니 주님 발아래 엎드려서 ‘계속’ 고쳐달라고 기도했다는 뜻이다. 같은 사건이 마태복음에도 나온다(15:21~28). 여기에는 기도를 연상하게 하는 단어가 강조되고 있고(‘불쌍히 여기소서.’ ‘소리를 지르다.’ ‘저를 도우소서.’), 딸의 치유를 위해 기도한 모습이 매우 역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녀의 이와 같은 간절한 기도가 주님의 마음을 움직여 딸의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훌륭한 자녀 뒤에는 반드시 기도하는 부모가 있다. 강하고 영적인 지도자들 뒤에는 열심히 기도하는 경건한 부모를 발견할 수 있다. 구약에서는 모세와 사무엘이 그랬고, 신약에서는 세례요한이 그랬다. 이들의 공통점은 영향력 있는 민족의 지도자였고, 배후에는 기도하는 경건한 부모가 있다는 것이다. 자녀의 인생에 기도의 중요성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유대인이고, 우리 기독교에서는 청교도다. 이들의 자녀교육 핵심은 기도다.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마치고 있다. 왜냐하면 기도의 중요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기꺼이 기도의 거름이 되기로 결단한 것이다. 유대인에게는 ‘엄마의 아기목욕 기도문’이라는 것까지 있다. 유대인은 아기가 태어나면 하나님 말씀이 수놓인 강보에 싼다. 평생 말씀 안에 거하라는 뜻이다. 아기를 목욕시킬 때, 엄마는 먼저 아기에게 ‘목욕시켜도 될까요?’ 라고 친절하게 묻는다. 그리고 다음의 기도문을 외우며 목욕을 시킨다.
얼굴을 씻어주면서,
‘하나님, 우리 아이가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의 소망을 갖고 자라게 하소서.’
입안을 씻어주면서,
‘하나님, 우리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복음의 말이 되게 하소서.’
손을 닦아주면서,
‘하나님, 우리 아이의 손은 기도하는 손이요, 칭찬하며 나누는 손이 되게 하소서.’
발을 씻어주면서,
‘하나님, 우리 아이의 손과 발을 통해 민족이 먹고 살게 하소서.’
머리를 감기면서,
‘하나님, 우리 아이의 머릿속에 지혜와 지식이 가득 차게 하소서.’
가슴을 씻어주면서,
‘하나님, 우리 아이 가슴에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소서.
5대양 6대주를 가슴에 품고 살게 하소서.’
배를 씻어주면서,
‘하나님, 우리 아이의 오장육부를 건강하고 튼튼하게 자라게 하소서.’
성기를 씻어주면서,
‘하나님, 우리 아이가 자라나 결혼하는 날까지 순결을 지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정을 이루고 축복의 자녀를 준비하게 하소서.’
엉덩이를 씻어주면서,
‘하나님, 우리 아이가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자리에 앉게 하소서’
등을 씻어주면서,
‘하나님, 우리 아이가 보이는 부모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소서.’
아이는 평생 이런 기도문을 수백 번 듣고 자라게 된다. 이렇게 기도를 드린 것은 자녀를 잘 자라게 하고, 잘 되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부모가 착각한 것이 바로 이 점이다. 부모 자신이 자녀를 자라게 하고, 잘 되게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때문에 자녀를 위한 기도의 필요성을 못 갖는 것이다. 주님만이 우리 자녀를 잘 자라게, 잘 되게 하시는 분이다(고전3:6,7).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이 잘 자라고, 잘 되도록 영양분인 거름을 주는 일이다. 그것이 기도다. 자녀의 인생에 기도의 거름을 뿌려주는 부모가 되기를 바란다.
희생의 거름
거름은 식물의 성장에 없어서는 안 될 절대적인 양식(영양분)이다. 하지만 충분히 썩지 않은 거름은 오히려 식물에 해롭다. 좋은 거름은 충분히 썩은 것이다. 썩어야 거름이 된다. 그러므로 거름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썩는’ 것이다.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신의 딸을 위해 희생의 거름이 되었다.
본문에는 전과는 매우 다른 주님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지금까지 주님은 차별하지 않고 누구든지 은혜를 구하는 사람에게 기꺼이 반응해 주셨다. 주님은 그들을 마치 목자 잃은 양처럼 불쌍히 여겨 식사도 거르시며 고치시고 가르치셨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환영하며 따랐다. 어떤 때는 알아서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도 하셨다. 특히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는 유대인이 꺼려하는 사마리아 지역으로, 그것도 사람들이 출입하지 않는 정오시간에 직접 찾아가셔서 그녀의 문제를 해결해주셨다. 물론 그녀가 먼저 주님께 도움을 요청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그녀의 문제를 해결해주셨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이 수로보니게 여인이 안타까운 문제를 가지고 주님을 직접 찾아왔는데도 아주 까칠하게 대하셨다. 처음엔 그녀의 간구를 그냥 외면하시더니(마15:23), 다음엔 인종차별적인 발언까지 하시며 그녀의 요구를 거절하셨다(마15:24). 심지어는 그녀를 ‘개’라고 인격적으로 모욕까지 주었다(27). 그렇지만 이 여인은 낯 색을 바꾸지 않았다. 오히려 모욕적인 주님의 발언을 기지(奇智)를 발휘해서 재치 있게 받아넘겼다. 게다가 부스러기만으로도 만족하겠다는 겸손함까지 보여주었다(28).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어떻게 외면과 차별과 모욕을 참을 수 있었을까? 아마 자신의 문제였다면 참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녀의 문제니까 참을 수 있었던 것이다. 주님밖에 자녀의 문제를 해결해 줄 분이 없는데 어떻게 참지 않겠는가? 아마 여러분이라도 이 상황이라면 그랬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모니까! 부모는 자녀를 위한 일이라면 참지 못할 일이 없다. 이보다 더한 일도 참을 것이다. 반면에 자녀에게 해가 되는 일에 대해서는 참지 않는다. 어떻게든 막아서고, 싸우게 된다. 오늘의 저와 여러분이 있는 것은 바로 부모의 이런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희생을 거름삼아 오늘의 우리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자녀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또한 부모인 우리가 우리 자녀에게 주어야할 것도 바로 이것이다. 희생의 거름이다. 자녀의 인생에 희생의 거름을 뿌려주는 부모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면 가족사진의 노랫말처럼 그 희생의 거름을 모아서 우리 자녀의 인생에 웃음꽃이 활짝 피어나게 될 것이다.
거름과 같은 사람
땅에는 거름이 필요하다. 땅에 거름대신 화학비료를 많이 사용하면 땅이 황폐하게 죽어간다. 거름을 뿌려야 죽어가는 땅이 살아나고, 거친 땅이 기름진 땅으로 바뀌게 된다. 인생에도 거름이 필요하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줌의 거름이 되기보다 한 떨기 화사하게 핀 꽃이기를 갈망한다. 그래서 세상이 삭막하게 병들어가는 것이다. 가정이나 교회, 그리고 이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있다. 거름과 같은 사람이다. 가정에는 거름과 같은 남편, 거름과 같은 아내, 그리고 거름과 같은 부모가 있어야 한다. 교회에는 거름과 같은 신자가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가정과 교회에서 ‘기도의 거름’, ‘희생의 거름’이 되자. 이와 같은 우리의 기도와 희생이 거름이 되어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 행복하고 은혜로운 교회가 세워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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