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업은 어린 나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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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162회 작성일 15-03-29 13:03본문
주님을 업은 어린 나귀
막11:1~11
2015. 3/29. 08:00, 11:00(종려주일)
종려주일(Palm Sunday)
오늘은 예수님의 지상생애 마지막 한 주간(고난주간)의 첫날이다. 교회력에서는 ‘종려주일’(Palm Sunday)이라고 부른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어린 새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자랑스럽게 들어가실 때 환영하는 뜻으로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흔든 데서 유래되었다. 한때는 ‘호산나주일’(Dominica Hosanna)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것도 주님께서 예루살렘 입성 당시 환영하는 사람들이 ‘호산나’라고 외친 데서 유래된 것이다. 이외에도 ‘꽃의 날’이란 뜻에서 Dominica Florum으로 불려졌다.
종려주일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것을 알리는 날이다. 주님의 이 영광스러운 입성은 고난과 죽음의 전주곡이라는 사실이다. 사실 주님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고 있지만 모진 고통의 길을 향해 이를 악물고 전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스리기 위해 권좌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죽음의 잔을 마시기 위해 죽음의 자리 골고다를 향해 나아가고 계신 것이다. 이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군림하여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 아니라 섬기고 자신을 화목제물로 주시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의 연약함과 완악함을 생각하게 하는 날이다. 주님의 입성을 그토록 열열이 환호하며 환영하던 사람들이 단 며칠 만에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폭도로 돌변하였다.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흔들어대던 그 손으로 주님을 삿대질을 하며 정죄하고, 호산나를 외치던 그 입으로 주님을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매년 어김없이 찾아오는 이 종려주일에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완악함을 보면서 주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나귀와 나
사실 만왕의 왕이신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소박하다 못해 초라했다. 말이 영광스러운 입성이지 말(馬)도 아닌 어린 새끼 나귀를 타고, 단 한 사람의 호위병사도 없이 입성하셨다. 이것이 어찌 왕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스가랴의 예언대로 주님이 겸손의 왕(슥9:9), 평화의 왕이신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아무튼 이 시간에는 종려주일에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도운 나귀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 본문에 나온 이 나귀에 대해 살펴보면 최소한 네 가지의 모습을 생각해 볼 수가 있다. 첫째는 ‘매여 있는’ 나귀이고, 둘째는 ‘풀어 진’ 나귀이고, 셋째는 주님을 ‘태운’ 나귀,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님을 태우고 ‘환호를 받으면서’ 성으로 들어가는 나귀의 모습이다. 이와 같은 나귀의 모습은 ‘나’의 모습, ‘우리’의 모습이다. 즉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습이다.
1. 매여 있는 나귀
주님은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 제자 둘을 보내 맞은 편 마을에 보내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2)고 하셨다. 여기 베다니 맞은 편 마을에 매여 있는 이 나귀는 믿기 전 우리 모습이고,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루소는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디서나 사슬에 묶여 있다.’고 했다. 물론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는 말은 동의할 수 없는 틀린 말이지만 ‘어디서나 사슬에 묶여 있다’는 말은 맞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태어날 때부터 어디서나 묶인 존재이다. 원죄를 안고 태어난 죄인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죄에 묶이고, 사단에 묶여 죄의 종, 사단의 종으로 살고 있다. 불의한 생각, 악한 생각, 탐욕적인 부끄러운 온갖 생각들에 사로잡혀 있고, 나쁜 습관, 악한 습관, 경건하지 못한 여러 습관에 매여 있고, 근심과 걱정, 불안과 염려, 시기와 질투 등과 같은 나쁜 감정에 매여 있다. 질병에 묶여 있는 사람도 많다. 리차드 포스트는 현대인을 묶고 있는 대표적인 것으로 ‘돈-성-권력’을 꼽았다. 플라톤이 말한 ‘동굴안의 죄수’는 곧 우리가 사는 세상과 우리 자신을 의미한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불행이고 비극이다. 그런데 더욱 불행한 것은 자신이 묶인 존재라는 사실을 모르고 사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냥 체념하고 사는 것이다. 베다니 맞은 편 마을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매여 있는 새끼 나귀는 알게 모르게 영/육간, 그리고 유/무형의 수많은 것들에 의해 매여 사는 우리의 모습이다.
2. 풀어진 나귀
그런데 예수님께서 두 제자를 보내 그 매여 있는 새끼 나귀를 “풀어 끌고 오라”고 하셨다. 그래서 매여 있던 이 새끼 나귀는 주님의 제자들에 의해 풀리게 되었다. 매임에서 놓이게 되고, 속박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나귀는 주님에 의해 묶임에서 풀리게 되고, 매임에서 놓이게 되고, 속박에서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죄의 본성을 갖고 있는 존재이기에 죄를 짓는 일을 멈출 수가 없다. 항상 죄의 ‘내용’(탐심, 교만, 불순종, 정욕 등)과 ‘결과’(죄책감, 수치심, 상처, 고통, 분열, 죽음, 심판 등)를 짊어지고 산다. 이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는데, 이 구원은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세상의 어떤 사상과 지식, 종교가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어떤 훈련으로도 불가능하다(갈2:16). 오직 그리스도이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모든 묶임에서 풀리게 하시고, 매임에서 놓이게 하시고,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신다. 찬송가 252장이 이를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찬송에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라는 가사가 15회나 반복되고 있다. 이는 주님밖에 없다는 뜻이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다시 정케 하기도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예수의 흘린 피 날 희게 하오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우리를 죄의 속박에서 자유롭게 하시고, 사단의 굴레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밖에 없다. 모든 불의와 더러움에서 정결하게 하실 수 있는 분도 주님밖에 없다. 인생의 수많은 짐들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분도 주님이시다. 예수님만이 우리 구원의 유일한 길이다(요14:6, 행4:12). 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이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 곧 우리다. 제자들의 손에 의해 자유롭게 된 새끼 나귀는 이와 같은 우리의 모습이다.
3. 주님을 태운 나귀
우리 신자에게 자유는 단순히 ‘~으로부터의 자유’(From freedom)가 아니라 ‘~을 위한 자유’(For freedom)이다. 본문이 이를 잘 보여준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귀를 풀어 끌고 오라고 하실 때 분명한 이유를 밝히셨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려느냐 묻거든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3). 주님께서 이 나귀를 풀어주신 이유다. 그것은 주께서 쓰시기 위해서였다. 예루살렘 입성이라는 영광스러운 일에 이 나귀를 사용하시기 위해서였다(7). 그러니까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풀려난 것이다. 소위 ‘~을 위한 자유’인 것이다.
그렇다. 신자의 자유는 그 자체가 목적인 ‘~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다. 키르케고르는 이런 자유를 ‘가출한 소년’에 비유했다. 또한 ‘영토 없는 왕’이라고 불렀다. 사르트르 역시 이런 자유를 ‘저주받은 자유’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인간이 자신의 삶의 의미를 살려내기 위해서는 어떤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함은 물론, 어떤 것에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잡아매는 행위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자유란 현재 상태로부터의 ‘자기해방’인 동시에, 스스로 선택한 상태로의 ‘자기구속’인 것이다(앙가주망). 이것은 바울이 말한 신자의 자유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갈5:13). 주님께 받은 자유를 올바르게 사용하라는 것인데,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기회로 삼으라는 것이다. 즉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으나 그 자유를 포기하고 사랑으로 서로 종이 되라는 것이다. 이것이 신자의 삶이다.
4. 영광을 받은 나귀
태어나서 한 번도 등에 짐을 실어본 적이 없는 이 나귀에게 30대의 건장한 사람을 태운 것은 숨이 막히도록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예루살렘은 높은 산성이고 건조하고 뜨거운 땅이다. 빈 몸으로 올라가도 땀이 흐르는 힘든 길이다. 그러니 어린 나귀에게 얼마나 버거운 일이었겠는가? 사실 이것이 신앙의 길이다. 그래서 신앙의 길을 좁은 문, 좁은 길이라고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고난의 길이란 뜻이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하여 세상에 태어나 거친 일만 하다가 죽을 이 새끼 나귀는 큰 영광을 얻게 되었다. 주님을 태우고 뭇사람의 겉옷이 깔리고 나뭇가지가 깔린 그 길을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걷게 되었다(7~10).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땅에 얼마나 많은 나귀들이 있었는데, 그가 만왕의 왕이신 주님을 태운 유일한 나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이 나귀가 이런 영광을 받은 까닭이 무엇인가? 그의 노력과 수고 때문인가? 아니다. 오직 주님께서 그를 택하여 주셨기 때문이고, 또한 영광의 주님을 등에 태웠기 때문이다. 주님 때문에 환영을 받고, 주님 때문에 영광을 받은 것이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다.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부르신 주님을 위해 헌신하면 주님 때문에 인정받고, 주님 때문에 환영받고, 주님 때문에 영광을 받게 된다.
사슴의 무통분만(無痛分娩)
어느 동물원에서 사슴이 새끼를 낳을 때 무통분만을 시켰더니 새끼를 본척만척하며 돌아보지 않았다고 한다. 해산의 고통을 경험하지 않으니까 모성애가 발휘되지 않은 것이다. 고통을 통과하지 않은 창조란 창조가 아니고, 고난을 통과하지 않은 영광은 참된 영광이 아니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 나아가서 하나님의 법칙이다. 오늘 주보 글에서 소개한 춘화현상도 같은 의미다. 어려움을 통과해야 보람이 있고, 영광이 있고, 값진 열매를 기대할 수 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는 앞에서 소개한 나귀의 네 가지 모습 중에 두 가지는 이미 통과한 사람들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묶고 있는 모든 사슬을 풀어 주셨기 때문이다. 이제 주님을 태우고 영광을 받는 나귀의 모습만 남았다. 이것이 곧 우리 신자가 살아내야 할 현재의 삶이고, 영광스러운 미래를 보장받는 길이다. 신앙생활은 어린 나귀가 주님을 태우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그 길은 빈 몸으로 가도 힘든 오르막이다. 땀이 흐르고 숨이 막히는 고통의 길이다. 하지만 영광이 보장된 길이다. 우리는 이 길을 가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주님을 태우고 묵묵히 순종하는 저 어린 나귀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이 고난의 길을 즐겁게 순종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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