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쟁이에서 큰 용사로, ‘기드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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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17,041회 작성일 15-01-25 13:05본문
겁쟁이에서 큰 용사로, ‘기드온’
삿6:11~18
2015. 1/24. 08:00, 11:00
낮은 자존감
신자를 무너뜨리기 위한 사단의 병기고에는 수많은 무기가 있다고 한다. 그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것은 심리적인 무기들이다. 두려움, 의심, 분노, 악한 생각, 걱정, 열등감, 죄책감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런 것들은 모두 우리 마음에서 나온 것인데, 사단은 이런 것을 이용하여 우리를 집요하게 괴롭히고, 우리를 파멸로 끌어간다. 이 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무기가 ‘열등감’이다. 이는 자신을 부족하게 생각하고, 자신의 가치를 무시하는 감정이다. 다른 말로 ‘낮은 자존감’(Low self-esteem)이라 부른다. 이를 현대인의 심각한 마음의 병으로 꼽고 있는데, 현대인은 자존심은 강하지만 자존감이 낮은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아무튼 사단은 이를 이용하여 우리를 무너지게 만든다. 특히 사단과의 이 싸움은 ‘신분대결’이다. 사단은 상황을 호도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잘못된 자화상을 그리게 하고, 거기에 묶이게 만든다.
우선 사단은 낮은 자존감으로 우리의 잠재력을 마비시키고, 우리의 꿈을 파괴시킨다. 그리고 계속 열등감을 갖고, 부족하게 느끼도록 하여 우리를 다른 사람으로부터 고립되게 만든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사람들과의 접촉을 회피하려든다. 그 결과 원만한 대인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 이렇게 사단은 낮은 자존감으로 대인관계를 끊어버린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약점을 통해 그의 능력을 나타내시려는 놀라운 계획을 방해한다. 사실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 중에 슈퍼맨이나 원더우먼이 많지 않다(고전1:26-31). 하나님은 약점과 연약함을 가진 사람을 부르셔서 그들에게 일을 맡기시고, 그것을 할 수 있는 은혜를 공급하신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계획에 가장 큰 장애물이 낮은 자존감이다. 사단은 이 점을 집요하게 이용하여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무너지게 만든다. 성경을 보면 모세에게 그랬고,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나 엘리야에게도 그랬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그들의 자존감을 회복시킨 다음 사역을 감당하게 하셨다. 본문에서 사사 기드온도 정확하게 같은 경우다.
기드온을 부르심
기드온이 활동했던 시기를 사사시대라고 한다. 사사시대는 여호수아 이후 왕정(王政) 이 시작되기까지 기간(약 400년)을 말한다. 그때는 이스라엘 역사의 암흑기였다. 사사기의 역사는 옆의 도표와 같이 일정한 구조로 진행이 되었다. ①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를 하면, ②하나님은 그들을 죄에서 돌이키도록 주변의 민족을 통해 압제하게 하셨다. 그러면 ③그들이 고통 중에 하나님께 회개하며 부르짖고, ④그들의 부르짖음 들으신 하나님은 사사를 보내 그들을 구원해 주셨다. 이것의 반복이 사사기 역사(신명기적 역사관)다.
기드온은 미디안 족속이 이스라엘을 학대하던 시대에 살았다.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7년 동안 미디안의 압제와 수탈을 당하였다. 백성들은 대부분 산으로 도망하여 토굴을 파고 두더지처럼 생활하면서(2), 극심한 식량난을 겪었다(3). 그 때 기드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가 미디안의 눈치를 보며 밀을 타작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났다. 그리고 그를 이스라엘의 구원자 사사로 부르셨다. 그리하여 300명의 작은 수로 135,000명이라는 대군을 물리쳤다. 본문은 하나님의 사자가 그를 찾아와서 낮은 자존감에 사로잡힌 그에게 자존감을 일깨워서 하나님의 용사로 세우신 장면이다.
큰 용사여!
노예에게는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결정하는 모든 것이 금지되어 있다. 그저 주인이 시키는 것만 하고, 주인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그만이다. 그러다보니 결국은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고, 결정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래서 이와 같이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힘이 있는 다른 사람에게 맡겨버리는 것을 흔히 ‘노예근성’이라고 한다. 행동심리학에서는 이것을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이라 부른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사람은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이는 그가 그 일에 학습이 되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미디안에게 수탈(收奪) 당하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면서도 그들로부터 벗어나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고 있는 기드온의 모습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자가 ‘너는 가서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 손에서 구원하라.’(14) 했을 때 화들짝 놀라며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까?’(15)고 반응하는 기드온의 모습이 이를 잘 보여준다. 어느덧 그도 미디안의 압제와 수탈에 익숙해진 것이다. 그러니까 ‘가서 네 민족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는 말씀이 부담으로 작용한 것이고, 그래서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이다.
이런 기드온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찾아오셨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큰 용사여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12)고 했다. 여기서 그를 ‘큰 용사’로 부른 하나님 사자의 말은 지금까지 살아온 그의 모습이나 지금의 모습에 비춰볼 때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다. 그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서 가장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15)고 했다. 집안도 별 볼일 없고, 그 별 볼일 없는 집안에서도 별 볼일 없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사자가 큰 용사라고 했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를 민족의 구원자로 삼았다(14)는 말씀을 듣고도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전형적인 낮은 자존감의 표현이다. 뿐만 아니라 6장에 나타난 그는 ‘의심’도 많고(17), ‘겁’도 많고(27), ‘소심한’ 사람(36,39)이다. 결코 용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자는 의심도 많고 소심한 겁쟁이에게 큰 용사라고 했다. 그것은 그의 과거나 현재를 본 것이 아니라 그의 미래를 보았기 때문이다. 장차 하나님이 그를 큰 용사로 쓰시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주님의 시각, 주님의 판단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의 평가는 사람의 평가와 다르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군가를 평가할 때 그의 과거 행적과 현재 상태를 보고 판단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과거나 현재를 중요하게 보시지 않는다. 앞으로 그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보신다. 이것을 믿음의 관점, 혹은 비전의 시각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람을 보시고, 판단하시고, 격려하신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고, 현재 어떠하든지 하나님이 선포를 하시면 그대로 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평가는 단순히 듣기 좋은 입 서비스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는 ‘의지적 표현’이다. 그래서 기드온은 300명의 군사로 135,000명을 무찌른 용사 중에 용사가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소심한 겁쟁이가 큰 용사로 거듭난 것이다. 신약에서 주님의 제자 베드로도 마찬가지다. 주님은 첫 만남에서 ‘베드로’라는 의미있는 이름을 그에게 주셨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이다. 반석처럼 어떤 시험과 시련,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반석과 같은 사람이 되리라는 의미다. 이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그의 모습이나 현재의 모습에서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훗날 베드로가 그런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보시는 주님의 시각이고, 우리를 격려하시는 주님의 방법이다.
사단은 자꾸 우리를 과거에 매이게 한다. 현재에 묶어두려고 한다. 그래서 틈만 나면 과거로 돌아가게 만든다. 부정적인 자화상을 그리게 만든다. 자신이 큰 용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작용한다. 낮은 자존감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게 만든다. 사단은 투르게네프의 단편 「무무」에 나온 늙은 여자지주와 같다. 그녀는 비록 벙어리지만 힘도 세고 일도 잘하는 노예 게라심에게 누구도 무엇도 사랑하지 못하도록 한다. 노예가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람(혹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주인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과거라는 동굴에서 ‘나오라’(요11:43)고, 현재라는 사슬에서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44)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우리의 과거나 현재를 깊은 바다에 던져버리시면서 더 이상 낚시금지를 선언하셨다.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미7:19). 주님의 시선은 우리의 미래에 있고, 그것을 보시고 격려하신다. 그래서 겁쟁이 기드온이 큰 용사가 되고, 가난하고 무식한 어부 베드로가 주님의 수제자가 되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분
사회학에 ‘거울자아 이론’(Theory of looking-glass self)이라는 것이 있다. 사회학자 쿨리가 주장한 것인데, 자아는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형성된다고 했다. 즉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따라 형성된다는 것이다. 얼굴이 예쁜 사람도 처음에는 자신이 예쁘다는 것을 모른다. 다른 사람이 예쁘다고 말할 때 그 말을 들음으로 자신이 예쁘다는 것을 알게 되고, 반복하여 들으면 그에 걸맞게 행동하게 된다. 학생이 선생님으로부터 우수하다는 칭찬을 들으면 그는 자기가 우수하다고 생각하고 선생님의 칭찬대로 우수한 학생처럼 행동한다. 그리고 실제로 우수한 사람이 된다. 이는 자기 자신을 믿어주고 존중하는 사람으로 인해 긍정적 자아가 형성되어 그렇게 되리가 확신하면서 스스로 그렇게 만들어간다. 그리고 자기를 믿어주고 존중해주는 사람이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그 영향력이 크다. 그래서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대로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사람을 사회학에서는 ‘의미있는(중요한) 타자’(Significant Other)라고 부른다. 그러니 우리 인생에서 이 중요한 타자가 누구냐에 따라, 중요한 타자의 역할에 따라 우리의 삶이 크게 달라지는 것이다. 우리 신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타자는 예수님이시다. 주님의 바라보심과 그 주님의 말씀에 우리 인생이 달렸다. 그러므로 주님을 우리 인생의 중요한 타자로 모시고, 주님이 바라보신 거기에 우리의 초점을 두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그러면 과거의 나, 혹은 현재의 나에게서 벗어나 주님이 말씀하신 변화된 새로운 나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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